챗GP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등장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의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누구나 스마트폰 화면 속에 질문을 던지고, 기계가 사람처럼 문장을 만들어 내는 장면을 마주하면서, 인간만의 언어가 더 이상 고유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이다. 놀라움과 불안이 교차하는 그 순간, 기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유의 동반자처럼 다가왔다. 김대식 교수는 이 낯선 경험을 충격으로만 남기지 않고, '기계와의 협업'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해석한다. 사랑과 죽음, 정의와 행복, 신의 존재와 같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이 이제는 기계와 함께 던져지고 응답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전환점에서 인류가 맞닥뜨린 본질적 물음을 파고든다. AGI의 도래는 무한한 풍요와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동시에, 인간다움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힘을 품고 있다. 저자는 기술의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전제로 삼는다.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선택이다. 기술은 멈출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방향은 인간의 성찰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이 사유의 여정은 단순한 기술 담론을 넘어, 존엄을 지키며 AGI 시대를 통과하기 위한 나침반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점은, 인류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 아워'일지 모른다.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 첫날 교실, 초등학생 오컬트 마니아 기지마 유스케는 여름 방학 동안 다녀온 ‘담력 테스트’ 때 찍어온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몇몇 친구들이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나서 경험담을 풀어놓는 유스케. 어느새 친구들에 둘러싸여 주목을 받으며 우쭐해졌던 것도 잠시, 학급 회장이자 모범생 하타노 사쓰키에 의해 친구들의 주목은 금세 다른 곳으로 쏠리고 만다. 허탈한 마음도 잠시, 유스케는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는 학급 벽신문 담당자에 지원하여 도시 전설이나 심령 현상을 주제로 한 오컬트 코너를 만들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모범생 하타노도 벽신문 담당자에 지원하고, 전학생 하타 미나 역시 함께하게 된다. 이리하여 오컬트 애호가 유스케와 현실주의자인 사쓰키, 신비한 전학생 미나는 마을의 ‘7대 불가사의’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오컬트와 현실이라는 두 가지 가설을 나란히 세우고 논박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미제로 남은 1년 전 살인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데…
<시인장의 살인>의 작가 이마무라 마사히로가 괴이를 추적하는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오컬트와 논리가 치열하게 맞붙고,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믿어버리지 않으며, 무서워도 멈추지 않는다. 정확히 같은 속도로 달려가는 공포와 추리. 그 끝에서 기다리는 진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현실 세계와 같은 룰로 오컬트를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를 이번 책의 과제로 삼았다고 고백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맞닥뜨린 아이들이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특수설정을 덧씌우지 않고, 본격 미스터리가 전제하는 ‘독자와 작가의 암묵적 합의’를 정면에서 활용하겠다는 작가적 야심이 돋보인다.
무채색 일상. 밤새워 일한 후 부스스 일어나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다. 집은 쓰레기가 쌓여간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던 청년은 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이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걸 구경한다. 저들은 무얼 보고 있는 걸까? 헤드셋을 벗어 가만히 귀 기울이니 새 소리가 들린다. 공원의 행인이 빌려준 망원경을 들여다보니 파란 새가 한 마리 보인다. 파랗고 파란 새.
독립 출판물 <낮게 흐르는>에서 독보적인 이미지 연출과 수채 그림 스타일을 선보이며 그래픽 노블 애호가들의 남다른 주목을 받은 변영근 작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던 2020년 무렵,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고립된 청년이 새를 관찰하며 변화하는 내면 이야기를 아름다운 책으로 만들었다. 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작은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새소리와 햇빛을 아스라이 부수는 나무들의 흔들림, 하늘을 수놓는 큰 구름.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책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책을 펼쳐본 독자라면 반드시 알게 될 테다.
신경생물학자 수전 배리는 48세에 입체시를 얻게 되었다. 평생 세상을 평면으로만 보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입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계에도 보고된 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쓴 편지를 올리버 색스 박사에게 보내보기로 한다. 큰 용기와 적당한 긴장감, 작은 기대를 가지고. 그리고 고작 며칠 뒤, 그는 색스의 정성 가득한 답장을 받는다. 우정의 시작이었다.
인연의 재밌는 지점은 관계의 온도와 지속 시간이 딱히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뜨거운 우정이 빠르게 끊어질 수도 있고 미지근한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기도 한다. 배리와 색스는 입체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쭉 편지와 왕래를 이어갔다. 그들의 관계는 따뜻하고 활발하게 오래오래 이어졌다.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150통이 넘었다.
이 편지들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 기분 좋은 위트와 포근한 다정함이 담겨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아름다움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꼭꼭 짚어 흠뻑 느끼는 자세는 이들이 지닌 공통점이었다. 이 순수함의 토대 위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밝은 에너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읽는 이들을 자극하고 감화시킨다. 그리웠던 올리버 색스의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책.
아시아 작가 최초로 2025 국제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이 수상 이후 처음으로 신작 시집을 선보인다. 난다시편의 첫 권이다. 시인 개인의 열다섯번째 시집, 미발표작 시 65편에 시인 김혜순의 편지, 대표작 시 1편이 영문으로 번역 수록되어 편편이 유영한다.
시인은 일렁이는 생물을 마주본다. 커다란 어항 같은 화면에서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는 한 인간을 무척 위로해주었다고 시인은 적는다. 그 존재의 명패는 'Sea Anemore'. 이것이 이 시집의 제목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가 된 연유다.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부분
'죽음 3부작'을 통해 죽음을 지나친 시인은 이제 다른 존재로 자유자재로 몸피를 바꾼다. '고통으로 가득차서'(182쪽) 쓰던 시가 아닌 '리듬이 찾아오면 그냥 받아 적'(182쪽)은 시가 흐른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우리도 뼈 없는 존재가 되어 둔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무엇이 되는 시, '발 없는 명랑한 귀신'(183쪽)이 되는 시와 함께, 시가 난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다. 원문 속에 담긴 사상과 감정을 다른 언어로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재창조의 과정이다. 원작자의 의도를 오롯이 지켜내면서도 새로운 언어와 문화의 맥락을 입히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좋은 번역서는 원서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같은 원서라 해도 번역자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울림은 완전히 달라지고, 책의 평가와 운명마저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번역은 저자의 목소리를 옮기는 동시에 번역자의 해석과 시대적 감각이 스며드는 창조적 행위이며, 한 권의 책을 낯선 세계에서 친숙한 삶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다리와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 권의 번역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시대와 독자를 연결하는 특별한 매개체이다. <워런 버핏 바이블 완결판>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간 이어진 버핏과 멍거의 말과 글을 엄선해 한국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맥락으로 풀어내고, 여기에 한국의 대표적 버핏 전문가 10인이 장마다 친절한 해설과 조언을 덧붙였다. 이로써 독자는 단순히 '버핏이 이렇게 말했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그 말이 지금 우리 시장과 삶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 체감할 수 있다. 초심자에게는 투자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열어주는 길잡이이며, 이미 공부해온 이들에게는 해석의 깊이를 더해주는 나침반이 될거라고 확신한다. 버핏과 멍거를 가장 한국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 책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 주는 독보적인 '완결판'이다.
최고의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매년 수여되는 '콜더컷상'은 19세기 영국의 삽화가 '랜돌프 콜더컷'의 이름을 딴 상으로, '칼데콧'이라는 익숙한 발음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커커스 리뷰가 선정한 '올해의 그림책'으로, 우리가 지금처럼 좋은 그림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든 인물, 랜돌프 콜더컷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50년대에는 그림책이 거의 없었다. 그 시절, 어린 랜돌프 콜더컷은 그림 그리는 일에 푹 빠져 지낸 아이였다. 그림 그리는 아들이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은행에 일하도록 보낸다. 하지만, 은행 창구에서 돈을 계산하는 대신, 당나귀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등 그림을 사랑했던 랜돌프. 런던의 저명한 출판인과의 인연으로 첫 그림책을 출간하게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의 움직임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는 그의 탁월한 그림 재능과,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그림책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 책은 그림책의 새로운 시대를 연 랜돌프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물리학자 김상욱과 천문학자 심채경이 서로의 세계를 기반으로 나눈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가장 일상적인 대화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난다. 2024년과 2025년에 걸쳐 유료 구독 서비스를 통해 공개된 서신을 정리하고 매만져 실린 글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흥미롭고, 독자 역시 편지를 함께 주고받는 듯한 생생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주와 물질의 근원을 찾아 세상을 잘게 쪼개'는 물리학자와 '대상을 부수거나 변형할 수 없'어 '있는 그대로 쳐다볼 뿐'인 천문학자는 같은 과학을 다루는 듯 하지만 실상은 아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듯 하다. 그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그래서 평행선을 그리다가도 끝내는 하나의 완벽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그리고 사람이라는 아주 작고 연약한 생명체에 대한 사랑 같은 것으로. 독자는 두 과학자의 대화를 따라가며 지식 너머의 따뜻한 울림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을 말하지만 과학만을 말하지 않는 다정하고도 아름다운 책.
박웅현의 문장을 그리워하던 독자들에게 반가울 신작, 이번 책은 시 강독집이다. 김사인, 전남진, 반칠환 등 그는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며 자신의 경험을 겹쳐보고, 시인이 바라본 풍경을 상상한다.
시가 어렵다는 이들에게 그는 "시를 읽는 일은 곧 삶은 읽는 일"이라고 말한다. 박웅현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문장으로 읽어내는 시를 따라가다보면 시 읽기는 어느새 삶을 바라보는 창이 된다. 천천히, 다정하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줄 책.
<폭풍 속으로>는 그림책의 거장들이 힘을 합쳐 완성한 특별한 작품이다. 콜더컷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브라이언 플로카는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안데르센 상을 받은 일러스트레이터 시드니 스미스는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와 섬세한 표현으로 독자를 폭풍의 한가운데로 이끈다. 두 작가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 책은 현실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함과 경이를 그림책이라는 안전한 무대에서 생생히 전한다.
이야기는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섬마을에서 시작된다. 남매는 폭풍이 닥치기 전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기 위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길을 나선다. 익숙하던 길은 점점 낯설고 두려운 풍경으로 변하지만, 아이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너는 내 손을 꼭 잡고, 나는 네 손을 꼭 잡고”라는 다짐 속에 이어지는 여정을 통해, 두려움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보여주는 이 책은 용기와 희망, 그리고 함께하는 힘의 가치를 오래도록 새겨주는 작품이다.
평범한 고등학생 주현. 어머니가 스리랑카 출신이고 한국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한국인으로 살아왔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승윤이 호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현은 승윤과 다시 놀게 된다. 수도권이지만 도시와는 조금 비껴간 동네인 그곳은 '다문화의 현장'이다. 승윤은 본인도 호주에서 '이방인'이었을 텐데 이주 배경 청소년인 요한에게 '동남아'라 칭한다. (칭찬은 아니고 비하의 뜻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콕 꼬집어서 욕이냐고 반문하기는 또 어려운 그 단어) 하지만 주현은 승윤과의 오랜 우정, 주말 대치동으로 학원 수업을 듣게 해준 배려 같은 것 때문에 불쾌한 감정만을 끌어안은 채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승윤과의 관계는 마침내 폭발하고 마는데...
박지리문학상, 문윤성SF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단요의 날카로운 글쓰기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큰 칼로 도려낸 서늘함과 소름 끼치는 유사성을 다 가지고 있다. '지방 일반고'의 유일한 강점이 다문화의 현장이라거나 자존감이 낮은 청소년이 게임하면서 욕하며 일순간 우월감을 얻는다거나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구분해 내는 사람들의 무신경함 같은 것들을 덤덤하게 소개한다. 주현은 한국인인가? 스리랑카 혼혈이기 때문에 '힙한가'? 공부를 안 하면 한심한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친구에게 안겼다 해도 멸칭으로 호명되는 건 괜찮은가?
단요 작가는 "소설은 실존하는 세계에 대한 허구의 모사물로서 그 가치를 지니며, 이때 세계는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인과의 역동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반듯하게 썰린 무의 단면처럼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캐리커처처럼 과장되어 단 하나의 특징으로 묘사되지만 실은 또 그렇지 않다. 현실은 언제나 고단할 만큼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이 짧은 소설은 그 모든 걸 다 말해준다. 단요 작가의 글쓰기가 적확하게 독자의 마음에 꽂히는 이유이다.
천둥번개가 몰아치던 어느 밤, 소년 천은 열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케이크 위에 초를 밝혔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 깊이 매료될 수 있는 것을 찾아 완전히 매료되면 된다는 아버지의 알 수 없는 이야기와 희끗희끗 나기 시작하는 새치를 뽑지 말라며 화를 내는 어머니의 볼멘소리.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은 평화로운 일상의 한가운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것’이 나타났다. 벽에 걸린 그림에서 튀어나온 유령처럼 벽을 뚫고 들어온 농구공만 한 크기의 구(球)형 물체. 희미하게 붉은빛을 뜨며 검붉은 화염을 같은 긴 꼬리를 매달고 머리 위를 날던 그것은 일순간 눈을 뜰 수 없는 섬광과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뿜으며 사라졌고. 천의 부모님은 재로 변해버렸다. 구 형태의 기묘한 번개, ‘구상섬전(Ball Lightning)’에 부모를 잃은 천은 그것의 비밀을 풀기 위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말했던 것처럼, 천은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시아 작가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한 류츠신이 그의 대표작 <삼체> 3부작 이전에 출간했던 장편소설. 구상섬전에 부모를 잃은 과학자 천이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무기에 매혹된 장교 린윈, 물리학자 딩이와 함께 집요하게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구상섬전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잇따라 나타나고, 이들의 연구는 기존 물리학을 뛰어넘는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지지만, 이내 인물들과 세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소설은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면서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과 중국-베트남 전쟁 같은 역사적 상흔을 녹여내며 순수한 지적 열망이 전쟁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아이러니와 인류 문명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진중한 성찰을 담고 있다. <삼체> 3부작과 공유하는 설정과 인물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그 자체로 완결된 서사를 지닌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매력이 공존하는 소설.
거대함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회와 조직, 기술과 제도의 무거운 구조는 이제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대신, 작은 규모의 모둠과 개인이 민첩하게 연결되어 빠른 전환과 유연한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경량문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덜 소유하면서도 더 풍요롭게, 덜 의존하면서도 더 단단하게 연결되는 삶의 방식은, 우리가 오래 지속 가능한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이러한 문명의 전환을 분석하며, 우리가 마주한 변화의 본질과 그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
작은 단위의 힘이 모여 커다란 진보를 이루는 경량문명은, 개인과 공동체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될 때 사회가 어떻게 재편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거운 체계와 전통적 권위가 더 이상 효율과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 시대, 우리가 선택할 길은 분명하다. 유연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필요한 연결과 협력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오늘 우리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들이 겹겹이 쌓여, 내일의 문명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오늘 내가 내딛는 작고 가벼운 발걸음이, 언젠가 큰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2022 배첼더 상 수상작 <귀명사 골목의 여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영감을 준 <안개 너머 신기한 마을>. 이 두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작가 가시와바 사치코는 단숨에 한국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단 한 권만 읽어도 다른 작품을 찾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작가의 작품 세계는 독창적이고 매혹적이다.
이번 신작은 시리즈 동화 <용이 부른 아이>의 첫 권으로, 용의 부름을 받은 소녀 '미아'의 화려한 모험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동화다. 작가의 이전 두 작품과는 결도, 분위기도 사뭇 달라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용의 부름을 받아 왕궁으로 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온 이모에게서 길러진 미아는, 용을 타고 왕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녀의 저주로 주머니가 되어 버린 '용의 기사' 우스즈의 신하가 되어 모험을 함께한다. 우스즈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정은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과 호기심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앞으로 어떤 모험과 성장 이야기가 펼쳐질지, 후속권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빛과 멜로디> 조해진 소설. 넘버링된 북태그와 겉커버를 두른 감각적인 디자인의 '다소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표지 속 세탁소. 푸른 조명 아래 세탁기는 어쩐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쓸쓸해 보인다. 럭키타운 인근 오르막의 세탁소 워시토피아는 한때 '무무 씨와 나만의 작은 해변'(7쪽)이었다. 세탁기와 건조기의 기계음이 파도 소리처럼 들리는 곳에서 김은희는 무무 씨와 해변을 상상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 본명은 '상무'지만 대리인 적도 없었던 수리공 무무 씨는 김은희보다 먼저 럭키빌라 402호에 살았던 사람이다. 암 진단으로 집을 비우게 된 활동가 김은희 대신 그 집의 고양이들인 양평과 오모리를 돌보기 위해 함수연은 럭키빌라 402호에 입주해 그들의 사연에 연루된다.
김은희는 나이들고 쇠약한 몸으로도 노동의 할퀴고 간 흔적이 폐에 남은 '무무 씨'를 '지상에 재현된 별자리를 걷는 것만큼이나 황홀'(61쪽)하게 사랑했다. '나로 인해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바뀌리란 그 믿음이 나를 살게 한다'(73쪽)는 문장을 일기장에 적으며 세계의 불합리를 사랑하려 한 이 사람의 곡진함을 향해 '함수연'은 다가간다. '남들에게는 없는, 그녀의 고유한 무늬'(131쪽)를 적어내려가려는 소설가의 진심이 독자에게 전해져 이윽고 공명한다. 소설 속 고양이 '양평'과 '오모리'부터 작가의 일기 속 '단심'과 '복희'까지 끝내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는, 단단하고 진실된 소설이 도착했다.
예술은 참으로 복잡한 분야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그림이 대체 왜 좋은지 알 수가 없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회화나 사진은 그나마 개인의 취향에 기댈 수 있다면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로 장르가 바뀌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대체 보고 뭘 느껴야 하냔 말이다, 뭘 보고 좋다고 해야 한단 말이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비앙카 보스커는 이런 의문을 품고 '순수 예술' 업계에 몸을 던진다. 브루클린 작은 갤러리의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의 작업실 조수를 거쳐,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예술을 본다는 행위란 무엇인가?', '좋은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핵심.
〈타임〉·〈이코노미스트〉·〈NPR〉 선정 2024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이 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아 보자. 보는 방식을 바꾸면 삶을 창조하는 방식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실패'라는 단어는 유난히 차갑게 들린다. 대학 입시에 한 번 떨어지면 낙오자로 불리고,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창업에서 고배를 마시면 '망했다'라는 단정적인 말로 평가받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실패가 새로운 시작의 과정이라기보다 '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 사회에서는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Fail fast, fail better'라는 말처럼, 실패는 다음 시도를 위한 연습이자 자산으로 여겨진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야말로 더 단단해졌다고 여겨지며, 투자자들조차 그러한 경험을 값진 자산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듯 같은 실패라도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실패'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자신의 좌절과 잘못된 선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패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습관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 책은 결국 실패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게 만든다. 책은 실패를 극복이나 성공의 반대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를 끝까지 통과해내는 과정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단단한 성찰을 보여준다. 창업자의 기록에서 출발했지만, 그 안에서 독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꿈꾸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순간,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책망했던 시간,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걸어야 했던 경험 말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흔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나가느냐는 질문이다.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실패를 두려움이 아닌 성찰의 기회로, 좌절이 아닌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봉진, 신수정, 제현주가 강력추천했다.
9월 초 성수기 진입. 일에 치여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평소 하지 않는 실수를 연발함. 성수기의 정점을 지나 다시 안정을 되찾는 중. 올해의 결정적 시기, 바로 지금.
자본주의에 대한 독보적인 관점으로 잘 알려진 사회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와 비판 이론 제4세대의 촉망받는 학자인 라엘 예기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인 위기들을 함께 통찰하며 나눈 대화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낸시 프레이저와 라엘 예기의 대화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직면한 다층적 위기를 날카롭게 해부하며, 전통적 계급투쟁을 넘어선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재생산, 인간·자연, 인종, 정치·경제라는 네 가지 분할 위에 성립한다. 그리고 각각의 경계는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 이면에 존재하는 돌봄, 가사노동 분담 같은 재생산 영역에서 분출하는 사회 문제, 인간 활동이 초래한 자연 파괴와 생태계 위기, 경제 난민과 이주 노동 형태로 여전히 유지되는 인종 구분선, 민주주의를 형해화하는 대기업과 글로벌 금융의 전횡 등의 위기상황을 맞이한다. 따라서 자본의의 전경(前景)과 자본주의를 기능하게 되는 토대적 배경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경계투쟁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식민주의, 정치투쟁 같은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여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학자는 특히 트럼프 현상과 세계적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을 두고 첨예한 논쟁을 벌인다. 프레이저가 1970년대 이후 미국 좌파들이 신사회운동에 매진하느라 구식의 계급투쟁을 지워버리고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흐름으로 이어진 것을 비판하며 진보적 포퓰리즘을 대안으로 제안하는 반면, 예기는 성취한 진보의 방어와 차별주의에 대한 대응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맞선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오늘날 정치철학의 난제를 생생히 드러내며 독자에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실천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오싹오싹 팬티!> <오싹오싹 크레용!>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웃음과 오싹함을 안겨준, 콜더컷 상 수상 작가 에런 레이놀즈와 피터 브라운이 다시 뭉쳤다. 이번 책은 그림책보다 글밥이 조금 더 많은, 어린이를 위한 첫 스릴러 동화다. 막 읽기 책에 입문한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난이도지만, 전작보다 한층 더 으스스해졌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오싹오싹 팬티!>의 토끼 재스퍼가 커다란 털북숭이 친구 ‘찰리 마멋’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빨갛게 퉁퉁 부은 편도 때문에 수술을 받게 된 찰리. 그는 ‘수술 후 잘라낸 편도를 유리병에 담아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해야지!’라며 들뜬 마음으로 수술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잠시 후, 의사가 찰리 엄마를 불러 전한 충격적인 말... “찰리의 편도선이 사.라.졌.어.요!”
과연 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라진 편도는 어디로 간 걸까? 호기심과 긴장감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된다. 그림과 글이 적절한 분량으로 함께 담겨 있어 그림책에 익숙한 어린이도 부담 없이 몰입하게 만든다. 시리즈명 <토토 징검다리>처럼, 그림책에서 읽기 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놓인 독자들에게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줄 작품이다.
셜리 잭슨 상 수상작인 편혜영의 소설 <홀>은 김지운 감독의 연출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고 있다. 마비된 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부릅뜨고 봐야 하는 <홀>의 주인공 '오기'의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를 스크린으로 감상하며 몸서리 칠 날을 기대하며 편혜영의 서스펜스를 압축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신작을 소개한다. 11편의 짧은 소설을 엮은 소설집이다.
"과거가 문제야. 우릴 끊없이 괴롭히니까." (78쪽)
<어른의 호의> 속 호의를 베풀 자격이 있는 중산층 남자 기명을 연약한 한 남자가 집요하게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잘 생각해보세요. 누구한테 원한 산 거 없는지.'(34쪽) 후배의 말로 기명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아봐야 할 상황에 처한다. <이윽고 밤이 다시>의 마을버스 운전기사 장이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내야 할 거야."(132쪽)라는 잘못 걸린 전화의 목소리에 낚여 제 과거를 맨정신으로 마주봐야 한다. 어플 상대방에게 사진을 보낸 것부터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고의로 끝도 없는 서류 제출을 요구해 민원인에게 굴욕감을 준 것까지. 폭력과 복수 없이도 인생은 서스펜스가 될 수 있다. '지난 일들이 긍지가 되지 않는 사람들'(183쪽)의 '미움과 원망 같은 것으로 근근이 이어지는'(144쪽) 어떤 인생은 그 자체가 소설이 되기에. 적재적소에 놓인 경제적인 문장으로, 밀도와 압력으로, 고요한 박력으로 밀고나가는 날렵하면서 가여운 인생사 서스펜스. 편혜영의 세계로 초대한다.
<파과>, <단지 소설일 뿐이네> 구병모 장편소설. 구병모는 3차원 세계의 속박을 무시하며 가뿐히 날아올라 자신의 세계를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작가다. 이를테면 보육원에서 다친 친구의 출혈을 멈추기 위해 상처를 누른 순간 친구의 생각이 자신에게 쏟아져 입력되는 경험을 한 소녀 같은 설정. 제목의 '절창切創'은 베인 상처, 혹은 소녀가 읽는 텍스트가 된다.
상처에 접촉하면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닌 한 소녀가 있고, 소녀의 능력을 알아챈 사업가가 있다. 사업가는 신전 같은 저택에서 소녀의 능력을 이용해 사업을 전개하고 소녀의 입주 독서 교사가 될 서술자의 면접을 본다. 평생 그토록 많은 책을 읽은 독서 교사는 오독을 무릅쓰고 그들의 관계를 읽어나가며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15쪽) 라는 가이드를 독자에게 던진다. 우리는 이 이야기꾼의 안내에 의지해 소설을 해독해나가며 잘못됨을 무릅써야 한다.
상처와 문학은 같은 층위에 있고, 칼에 베인 상처와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교차한다. 책에 베이고 책에 찍혀본 독자라면, 무너진 책더미에 깔려 죽는 건 호상이라고 생각하는 읽기주의자라면 게걸스럽게 읽을 수밖에 없는 유혹적인 소설이다.
이상적인 세계란 무엇일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삶, 아프지 않은 몸, 무엇이든 가뿐하게 성공하는 쾌감 같은 것들. 그런 세상이 있을 리가 없다만 남모르게 기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대다수의 사람은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갈 것이냐, 이상을 좇아 현재를 망칠 것이냐.
중학교 2학년 양유주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혼자가 싫어 용기를 내보지만 쉽지 않다. 부모님의 관심도 자신보다는 언니에게 향하고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유주는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을 느낀다. 어느 날, 우연히 먹은 초록색 알약 '트윈' 덕분에 현실과 또 다른 세계에서 깨어난다. 그 세계는 유주가 바라던 그 세계다.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부모님에게도 따뜻한 관심을 받는 그런 세계. 영원히 이 세계에 살고 싶다 생각하지만, 부작용이 발목을 잡는다. 이제 선택의 기로다. 이 세계에 남을 것이냐, 현실로 떠날 것이냐.
신예 작가 유진서는 청소년 시절 <비스킷>과 <무르시블 소녀>의 독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으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청소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작가가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중독되기 쉬운 세상이다. 마약이나 알코올, 흡연뿐 아니라 숏츠, 불량식품, 과도한 운동 등 중독으로의 유혹은 도처에 있다. 슬금슬금 접근했다가 어느새 발이 꽉 묶여 조금씩 망가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독 심리학 분야의 권위자인 저자 저드슨 브루어는 중독의 원인을 뇌의 보상과 처벌 메커니즘에서 찾는다. 이전의 특정 상황과 행동으로 인해 현재 중독된 대상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반복 강화되면서 더 이상 보상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지속하게 되는 상태가 중독이라는 것이다. 중독이 '습관화된 뇌'의 문제라면, 새로운 학습을 통해 현재의 상태를 바꿀 수도 있을까?
브루어의 대답은 예스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신경과학자인 그는 놀랍게도 '마음챙김'에서 답을 찾는다. 명상을 하고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것. 스스로의 충동, 불안, 갈망을 들여다보며 마음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뇌의 충동적 보상 회로 조절 능력이 강화된다고 한다. 그는 실험과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병원과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면 이 방법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언가에 인생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드는 이라면 이 책을 통해 마음챙김의 은혜를 받아보시길 바란다.
둥근 보름달이 차오르는 대보름을 앞두고, 먹음직스러운 이야기 <토끼전 대 호랑전>이 도착했다. 지글지글 노릇노릇, 고소한 전 한 판의 승자를 가리는 불꽃 요리 대결을 담은 흥미로운 그림책이다. 마을 잔치에서 맛본 전의 맛을 잊지 못한 토 선생과 호 선생은 자신 있는 재료와 비법을 내세워 한판 승부를 벌인다. 과연 소문난 전 대감 댁의 업둥이의 오감을 사로잡을 자는 누구일까? 아삭한 파전이냐, 고소한 육전이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냉큼 맛보고 싶은 팔색 고명의 명절 음식이 펼쳐지고, 판소리 특유의 말맛이 더해진 흥겨운 리듬이 이어진다.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분주한 풍경 속에서, 잊혀가는 이웃의 정과 명절의 풍속을 되살려 보는 특별한 그림책이다. 명절날 상 위에서 업둥이의 입맛을 돋우는 맛깔스러운 시식 평 가락처럼, 우리도 함께 어울려 전을 부쳐보면 어떨까. 익어가는 계절, 함께 나누는 문화로 이어가는 명절 속 흥미진진한 맛 대결 속으로 다 함께 들어가 만나보자.
세계 경제의 흐름이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중국과 아시아를 세계의 공장으로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국을 생산의 주체로 만들면서도 패권국의 지위를 놓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이 과정에서 국가 간 갈등은 점점 더 노골화되고, 국제 질서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출 중심의 성장 모델을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했지만, 지금은 내수 침체와 가계부채의 급증, 고금리 장기화, 그리고 기업 경쟁력 약화라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선순환 구조가 무너진 자리에는 불확실성과 불균형만이 남아 있으며, 언제든 더 큰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요인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기 인식이 아니라, 거대한 전환의 흐름을 읽고 대응하는 전략적 안목이다. 불황과 고금리가 일상이 된 경제 환경 속에서 과거의 성장 공식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다. 개인 투자자는 자산 배분 전략을 세워 새로운 생존 방안을 모색해야 하고, 기업은 낡은 사업 모델을 과감히 포기하면서도 기술 혁신과 글로벌 패권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정부 역시 제도 개혁을 넘어 경제 전반의 체질을 다시 설계해야 하며, 국민은 이 과정을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위기를 외면하는 순간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불안의 시대를 돌파할 마지막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 오고 있다.
바삐 뛰어가는 다람쥐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아이는 신비한 과자점을 발견한다. 소록소록 몽블랑, 햇살 절임 오렌지, 낮잠 꿀차, 쿨쿨 샌드… 이름만 들어도 사랑스러운 과자들이 진열대에 가득하다. 기분까지 보들보들 달콤해지는 이 특별한 과자들은 긴긴 겨울잠을 앞둔 손님들을 위로하기 위해 구워졌다. 누구나 맛볼 수 있지만, 과잣값은 꼭 내야 한다. 다람쥐, 뱀, 고슴도치, 곰은 이미 값을 내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빈손으로 찾아온 아이와 강아지 봉봉이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밤 소풍>, <코코 스키> 등 사계절 소풍 시리즈로 계절의 설렘을 담아온 김지안 작가가 이번에는 가을 숲 속 비밀스러운 ‘계수나무 과자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달큰한 캐러멜 향과 환한 금빛 나무 아래 과자값을 치러야만 맛볼 수 있는 숲속의 달콤함.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는 과자값으로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묻고 답을 찾는 동안 은은한 가을 햇살이 마음에 스며드는 듯하다. 작가의 포근한 그림과 함께 즐거움을 넘어, 우리 주변을 돌보자는 마음을 건네는 사랑스러운 그림책.
이 책의 저자인 인류학자 마이클 크롤리는 달리기 선수이기도 하다. 달리기에 관한 애정과 호기심으로 그는 오랫동안 장거리 달리기의 국제 무대를 지배해온 나라, 에티오피아로 가서 그들의 달리기 문화를 참여 관찰한다. 인류학 연구들이 대개 그렇듯 '참여'와 '관찰'의 경계는 희미하다. 그는 에티오피아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보고 들으며 함께 훈련해나간다.
선수들의 훈련에 관한 이야기도 에티오피아라는 국가의 문화도, 생활 조깅 너머의 달리기 상식이 딱히 없는 한국의 일반 독자에겐 모두 낯선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이 책을 읽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에티오피아에 처음 들어가 살며 조금씩 적응해나가는 마이클 크롤리의 눈높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훈련 방식도, 생각도, 문화도 재미나게 엿볼 수 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달리기 훈련에 관한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해방감은 덤이다. 한국의 달리기 열풍에 몸을 실은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책이다. 인류학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19세기 중반 미국,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 제임스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이 다른 지역으로 팔려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제임스는 미시시피강의 잭슨섬으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동네 꼬마 헉을 만난다. 헉은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집안에 돼지피를 뿌려 자신이 살해당한 것처럼 꾸미고 도망쳐 온 것이다. 아이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제임스는 이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단순한 도망 노예가 아니라 백인 소년을 죽인 흑인 노예로 오해할 것이라는 예감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그 포악한 아버지에게 아이를 돌려보낼 수 없기에, 제임스는 헉과 함께 가기로 결심한다. 모험의 흥분에 들뜬 소년 헉과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하는 제임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 작가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2024년과 2025년에 걸쳐 퓰리처상을 포함해 5개 문학상을 수상하고, 5개 문학상의 최종후보에 오르며 최근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1884년 발표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허클베리와 여정을 함께했던 흑인 노예 '짐'의 시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경이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소설 속 제임스는 도망 중에 얻게 된 연필과 종이를 마주하고 자신은 글을 써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고, 가족이 있으며,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에게서 강제로 찢겨나간 사람이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써 내려갈 사람임을 말하고 싶다.”
세상은 언제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하루아침에 등장하는 기술은 인간의 삶을 다시 쓰고, 예상치 못한 사건은 우리가 세운 질서를 무너뜨린다. 변화는 늘 준비보다 빠르고,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존재가 되기 쉽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변화가 거셀수록 통찰은 더욱 값진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흐름을 읽고 본질을 파악하는 힘은 단순히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의 인생을 흔들림 없이 항해하도록 돕는 길잡이가 된다. 매년 우리에게 찾아오는 지적 의례이자 시대를 바라보는 가장 신뢰할 만한 창 '트렌드 코리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올해도 여지없이 '트렌드 코리아'가 찾아왔다.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닻이고, 혼돈의 바다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하는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한 해를 관통할 통찰과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해주는 힘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미리 엿보고, 스스로를 단련하며, 기회를 발견하고, 도전을 준비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주는 가치는 ‘내일을 먼저 만난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매년 이 책을 찾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내일의 시대를 가장 먼저 만나고 싶고, 무엇보다 그 시대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서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 때문이다. 자, 이제 올해의 키워드 'HORSE POWER'를 만나러 떠날 시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기 위해 줄 서서 오픈런까지 한다는 기사를 접하는 나날이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기 위해 줄을 선다는 말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조차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본 적이 없다. 방문하지 않은 걸 떠나서 한국 문화유산에 관심을 크게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이제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방문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저자 유홍준은 1985년 공개강좌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를 시작으로 '한국미술 전도사'를 자처하며 대중과 호흡해 왔다. 또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13년에 걸쳐 완간하며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는 오랜 시간 현장과 강단을 오가며 쌓아온 저자의 경험과 지식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나치게 간략하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루지 않았고,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모든 시대, 회화에서부터 공예까지 전 분야를 아우르는 친절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내게 가장 가깝고도 먼 한국미술사를 이 한 권으로 시작해 볼 요량이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장애학의 기본 관점인 이 문장은 책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장애를 '본질적인 것'인 동시에 그렇기에 당사자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장애는 늘 관계 안에서 발생된다. 장애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아닌 적 없었다.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 이후 6년 만에 내는 이번 책에서 장애가 왜 관계와 정치의 문제인지, 장애 문제에 왜 이 사회의 일부가 아닌 모든 구성원이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페미니즘의 섹스/젠더 개념에 장애학의 손상/장애 대입해서 이에 얽힌 논쟁을 훑으며 개념에 대한 이해를 짚은 후 책은 장애해방운동의 이야기를 거쳐 노동해방, 기후위기와 장애의 관계로까지 나아간다. 따뜻하고 날카로운 지성의 문장들이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참을성 있게 되풀이하며 알려준다.
혐오가 물오른 이 시대에 세상의 일부는 장애인을 향해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지만 장애학은 그들까지를 포함해서 ‘연립聯立’과 ‘공생’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아야만 비로소 모두의 해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와 위기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해방의 책.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경찰서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조’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낮에는 어눌한 말투와 순진한 표정으로 주변의 동정을 사는 청소부, 밤에는 일곱 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악명 높은 연쇄 살인마 ‘크라이스트처치 카버’가 그것이다. 아니, 하지만 사실은 일곱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다. 그중 한 건은 조의 ‘작업’이 아니었다. 경찰은 이미 여러 번 따돌렸고, 낮에는 어리숙한 청소부 연기를 하며 수사 진행 상황을 완벽히 따라잡고 있다. 이제 모방범을 찾아 자기가 저지를 범죄까지 뒤집어씌우기만 하면 된다. 경찰의 무능을 비웃으며 증거를 모으던 조는, 모방범 역시 자신처럼 경찰 내부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며 후보를 좁히기 시작하는데…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북미, 유럽, 호주까지 3개 대륙의 범죄소설상을 모두 석권했다. 2024년에는 아마존 프라임 TV시리즈로 방영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드라마화가 진행 중일 만큼 미디어의 큰 관심도 받고 있다. 소설은 아름다운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를 배경으로 연쇄살인마 조와 그를 관찰하는 선량한 동료 샐리의 1인칭 시점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가 흔히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살인범 캐릭터가 아니라지질하고 오만한 동시에 자아도취와 착각에 빠진 범죄자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왜곡된 내면과 자아를 가진 주인공이 저지르는 무참한 범죄가 더 큰 잔혹함을 만나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빠져들면서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해 단숨에 끝까지 밀어붙인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카드값 걱정이 밀려온다. 명절 준비에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은데, 명절이 끝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보복 소비'라는 말이 벌써부터 부담스럽다. 스트레스받은 만큼 나를 위로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생한 나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핑계로, 우리는 또다시 지갑을 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명절의 시작도 소비, 끝도 소비,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정작 무엇을 얻는 걸까?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행복해지려고 돈을 쓰는 건가요, 아니면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불안을 지우려고 쓰는 건가요?" 이 책은 단순한 절약 노하우가 아니라, 소비라는 습관에 잠식당한 우리의 감각을 되찾는 이야기다.
저자는 월세 포함 70만 원으로 살아가며 중요한 걸 발견했다. 돈을 아껴서 통장 잔고가 늘어난 것도 좋았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돈을 함부로 쓰면서 잃어버렸던 것들, 작은 것에서 느끼는 기쁨과 나만의 취향,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가는 즐거움이 돌아온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저소비 생활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극단적 절약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애초에 불필요한 소비 욕구 자체가 생기지 않는 삶,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명절 후 보복 소비 대신 '보복 저축'은 어떨까? 지갑을 여는 대신 마음을 여는 법을 알려주는 이 책이 지금 딱 필요한 이유다. 소비가 줄면 행복도 줄까 봐 걱정했다면, 이 책은 정반대의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소비가 줄수록 행복을 느끼는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그림' '이야기' 이 세 가지를 한 권에 알차게 담은 책으로, 어른이 봐도 무척 유익하고 재밌다. 개, 기린, 매부터 능구렁이, 청개구리, 개복치까지, 총 25종의 동물이 등장한다. 단순히 동물의 특징과 능력을 나열하는 대신, 일상 속에서 자주 쓰는 동물 표현들을 소개하며 "과연 사실일까?"라는 질문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차야다 작가의 아기자기하고 유쾌한 그림이 더해져 동물에 관한 진실이 한 장 한 장 흥미롭게 펼쳐진다.
예들 들어, 대충 씻으면 '고양이 세수', 헝클어진 머리는 '까치집', 잘 잊어버리면 '금붕어 기억력',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은 '개미지옥',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기러기 아빠'와 같은 표현들. 그런데, 정말 고양이는 대충 세수할까? 까치는 집을 어떻게 지을까? 금붕어는 정말 3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개미지옥은 대체 어떤 곳일까? 수컷 기러기는 진짜 혼자 사는 걸까? 이 모든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답이 이 책에 있다.
고양이 집사 14년 차인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나서 내 두 고양이의 수염과 앞다리 수염, 발바닥은 물론, 식사 후의 작은 행동들까지 이전보다 더 시간을 들여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 잦아졌다.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이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나의 고양이들을, 나아가 우리 곁의 동물을 더 세심하게 보살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다쓰야 쇼세이는 서른 두 살의 회사원이며, 회사에서 제공하는 독신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총무부의 일원으로써 회사 레이아웃 변경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고 있으며, 후배나 동기들의 상담역도 종종 수행한다. 이렇게 주변이 기대할 법한 모범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쇼세이지만, 실은 자신이 공동체와 그리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공동체의 균형, 유지, 확대, 발전, 성장에 공헌하려는 마음, 공동체 감각은 유년기부터 지속적으로 쇼세이의 개체감각을 억눌러왔기에, 쇼세이가 인생에서 신경 쓰는 점은 하나뿐이다. 세상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지 않으며 사는 것. 모두가 함께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길 때, 손을 얹고 방향과 걸음을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실은 힘은 전혀 주지 않는 것. 소설은 이런 쇼세이를 관찰해 온 ‘나’의 이야기이다.
최연소 남성 나오키상 수상 작가 아사이 료가 <정욕>에 이어 다시 한번 내놓은 문제작. 우리가 당연히 옳다 믿어 온 가치를 뒤엎고 ‘정상성’에 대해 다시 묻는다. 화자 ‘나’의 눈에 비치는 인간이라는 종(種)은 사회를 이루고 공동체의 성장을 추구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동시에, 공동체가 정한 길에서 벗어난 개체는 배제해 버리는 종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공동체의 발전이 개개인의 삶에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더 성장하고 확장하는 미래로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성장과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의 뒤에서 우리가 미처 읽어 내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출간 당시 출판사에 화자의 정체를 포함해 책의 주요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홍보할 것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소설의 주제가 되는 내용에 관심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부터 근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까지, 기꺼이 공터에 꼿꼿하게 서있기를 택한 시인이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엮었다. 한 해의 마지막 분기만 남긴 시월의 길목에 서서 시인은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라고 이 계절을 정의한다.
가을은 회고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봄의 끝자락, 여름의 도입부에 피는 꽃,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19쪽)이었던 꽃을 보았던 사람.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고요를 알아채고, 이 알아챔에 '책임을 진다.'(19쪽)
나쁜 소년은 일찍이 알아챈 일이 있다. 귀가 어두워지기 전부터 남의 말을 안 들으시는, 본인은 참지 않으신, 초개인주의자인, 고척동 남부교도소에 구속된, 사라질, 시 <판교>에 묘사된 아버지. 화가 나서 나를 때릴 때 만큼은 아버지를 잊는 것 같았던 <사경(寫經))>의 어머니. 대문을 박차고 나선 나를 절룩이며 배웅한 <엄마는 타버렸다>의 재가 된 어머니. 알아챔의 천형을 타고는 이는 '늘 궁금했던 인생이라는 것이 / 언뜻 보이다 만'(146쪽) 작약이 서 있던 공터에서 이별밖에 할 줄 모르는 계절을 담담히 본다. 그 알아챔은 그처럼 삶을 이르게 알아챈 불온한 이들의 입술에서 여전히 암송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