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구매 4년만에 완독하였다. 물론 4년 전에는 1판 종이책을 샀으며, 완독은 밀리의서재 2판 전자책으로 했지만 말이다. 뭐랄까, 책에서도 프레데릭 제임슨을 인용하며, "모든 것이 유행과 미디어 이미지의 영속적인 변화에 종속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다"고 밝혔듯 좌파이론 역시 해가 다르게 유행과 변화(그러나 진정으로 새롭지는 않은)를 거듭하기 때문에 2009년에 쓰인 이 책은 2026년의 독자가 보기에는 팜플렛으로서 그다지 새로운 얘기가 없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올드하다고 해서 결코 구린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클래식하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싶다.타리크 고더드와 역자의 후기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피셔의 방대한 이론적 작업물의 서막 내지 디딤돌 역할 정도로만 기획되었었고, 이제 그 전체적인 기획 자체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가 제시한 개념적 작업은 단연 클래식으로 남은 것 같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닫힌, 대안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유토피아적 체제의 성질이자 실체.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균열을 낼 수 있다는―거의 실존주의적으로 느껴질 정도의―호소는 실제로 당시 영국 학생운동 차원의 대항실천을 구축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도 대항의 몸짓을 추구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효한 지침이 되고 있는 것 같다.특히 책에서는 입론 수준으로만 논의되고 있는 정신질환과 관료제의 정치화라는 주제의 경우, 전자는 국내에서 『손절사회』(2026) 같은 시도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책도 뭔가 야심찬 태도로 일관되어 있는데, 피셔의 예의 그 호소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물론 실제로도 손절사회의 저자는 책에서 피셔를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다). 자신의 기획을 미완으로 남기고 떠난 마크 피셔가 오늘날의 리버럴좌파 계열 젊은이들에게 특별히 매력을 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의 문체는 별로 대중친화적이지 않고, 순전히 클래식이어서, 아니면 실천적 지침을 일부나마 제공해줘서 매력적이라는 건 불충분한 설명인 것 같다. 그럼에도 어쨌든 사람들은 마크 피셔를 찾는다. 물론 나도 4년만에 찾았고. 좌파이론으로서 『자본주의 리얼리즘』보다 우수한 책은 많겠지만, 어떤 반향력, 특히 이 절망적인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제 삶에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반향력을 갖는 책은 드물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 생각이다.
일랑일랑님
나는 저자가 에세이만 잘 쓸 거라 생각했는데, 2년 만에 장르를 달리하여 서늘한 이야기를 건네준다. 문장들은 늘어짐이 없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허상을 꾸리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숨 쉴 법한 인물과 케이블 채널이나 유튜버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르포처럼 기획하고 보도할 각을 재고있는걸 가로채 쓴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살아있다. 모든 인물들이 밋밋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만든다. 날 선 눈빛을 숨기고 각자가 원하는 바로 무탈히 모든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운이 용궁장 주변으로 낮게 드리워져있다. 선한 말만 뱉어내는 입꼬리 끝엔 무엇이 달려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각자가 기대하는 것들이 다르지만 결국 용궁장이 눈앞에 사라져야만 다음으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책소개를 보면 이 이야기는 '가족미스터리 소설'이라 알려두고있다. '천륜'과 '인륜'이 지옥이 되는 순간과 그 지옥에 대항하는 평범한 사람들.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 각자가 짊어진 지옥의 갈래를 보여주고있다. 그곳이 지옥탕이라 해도 무관할 용궁장을 앞에 두고 개인 인터뷰를 딴 듯한 'OOO의 고백'으로 이뤄진 5부작의 단편. 고백인지 회개인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며 대나무 밭에서 울화를 뱉어내는 복두장이의 마음과도 같은 후련함이 깔려있다. 적어도 이렇게 고백한 이들이라면 오늘 밤 잠은 푸욱 잘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 해 본다. 발 좀 뻣고 한숨 푸욱 자고, 다음날 담 걸리는 일 없이 팔에 쥐나는 일도 없이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 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보태본다.📖피해자의 고백_툭. 가슴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연결되고 싶었던 나의 미련이었다.가족이라는게 모두 다복하고 아끼는 집단은 아니다. 가까우니까 더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걸 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깎아내리고 뜯어발기는 육신과 정신의 생채기는 폭력의 범주를 꽉 채우고도 남는 인간의 낯짝들을 마주하게된다. 그럼에도 가족이니까, 엄마니까로 선을 그어버린다. 내 가족이니 품으려 마음먹고 노쇠한 육신을 거두고자 생각을 고쳐먹지만 가시를 품고 무엇 하나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이를 눈 앞에 둘 때 우리는 포기라는 단어를 온 몸으로 얻어내게된다. 포기와 미련이 얽혀있던 마지막 실타래가 늘어지다못해 끊긴 소리였다. 타인은 학대라 했다. 하지만 천륜이었다. 그래서 잡고 있었다.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아는 이 였으니까. 한 쪽에서만 퍼다주는 관계는 결국 독이 구멍이 나고 깨져도 염치를 모르고 닥달하게된다.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랬다. 그건 손 위든 손 아래든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 결국 그냥 사람 자체의 문제였다. 📖가해자의 고백_"자식 된 도리? 이제 와서?"역시나 한 쪽의 말만 들어서는 안된다. 중립 기어 박고 양쪽의 입장을 다 들어봐야 알 수 있다. 이야기 초입부터 얘만 해맑다. 그리고 얘만 특혜를 얻는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 때부터 이상했다. 모든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기본으로 삼는 놈이라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하게 이뤄지는 것이 없는데 제 핏줄이라 무조건 품어두고 지원하며 조력자의 역할을 해 주길 바라고 있다. 모르는게 약이 아니라 몰라서 바보되가 되어가는 꼴을 보여주었다. 학문에 대한 시야가 넓다고 난 사람이 아니다. 고마워 할 줄 알고 미안함이라는 걸 기저에 깔고 살아내어야 했는데 이걸 가르치지 않은 아버지를 탓해야 할까, 알려고 하지 않고 자란 막내를 탓해야 할까. 피장파장이다만 노인은 죽어서도 제대로 깨우치며 생을 마감하지 못했을 것이고, 막내는 살아온 세월 동안 모르고 산 시절을 다시 되감아서라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외국 물 먹으면 뭐하겠어 헛 공부한 인생 수업 다시 재수강이 절실해 보인다.📖설계자의 고백_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해졌다. 나는 이 부조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영원히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용궁장이 염라대왕 문턱 언저리쯤이 되는걸까. 하나같이 다들 죽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고약함을 뿜어냈고, 그 덕에 용궁장으로 들어온 듯 하다. 어떤 이의 생이 마감된 것을 사력을 다해 기뻐하는 사람들. 날뛰듯 신나서 춤을 추진 않지만(남겨진 이들은 일말의 양심이라는 걸 소유한 자들이라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져있다) 서류상으로서의 모든 절차 이후 후련해질 자신의 삶을 기대하며 빠른 절차를 이어간다. 인과연이 달랐다. 그러니 그간의 시간을 통해 사람의 감정이 변질되었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를 보여주고있다. 도리와 인륜이 닿아있는 관계에서 그 근처도 닿지 못한 마음들이 이제사 숨통을 틔는 시작점이 되었다. 용궁장은 누군가의 생의 끝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의 시작인 것이다. 📖조력자의 고백_ 계획이 머릿속에 있을 때는 죄책감과 망설임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화마에 잡아먹힌 용궁장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기회가 내게 주어졌음을 알았다.나 부터 살고 봐야했다. 이건 욕심을 이겨먹은 생존의 욕구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기반이 된 욕심, 복수, 희열로 켜켜이 쌓아올린 생존 욕망이다. 이 상황까지 오도록 설계했고 실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의 딸에게 자신도 거룩교회의 신자가 되려하고 하나님은 이런 나를 용서해 줄지를 묻는다. 고해성사를 하는 상대가 장로의 딸이라는 점. 이 상황을 이미 알지만 용서 해주실까요를 되묻는 걸 보면 너도 하느님이 용서한 딸인데 나라고 못하겠느냐는 식의 공범이자 가담자로서 엮으려는 뉘앙스을 안겨온다. 악함의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어떤 것도 마냥 선함과 베푸는 마음으로 채워진 집단은 없었던걸로 꾸려져있다. 거룩교회라고, 용궁장 같은 검은 마음이 없는 집단이라 단언 할 수 없는 것 처럼.주님께 거두어진 것이라는 말이, 결국 거룩교회의 장로 집단으로 소속됨으로서 이 지역, 이 집단의 최상위 계층에 앉아버렸다는 걸 표현했다. 자신의 불운을 태워버리고, 타인의 불운을 먹이삼아 세력을 키우는 것. 보고 자란 관계의 악이 결국 악을 키워낸 것이지 모.당연한 희생도 없고, 당연한 불행도 없다. 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지는 강요와 독선은 사람을 주눅들게 했고, 자기연민마저 소멸시켰다. 으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라 여기며 희생이라는 단어의 정의로 명명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모른다. 그렇게 커왔고 그렇게 살아야되는 줄만 알다가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아는 순간 쌓여있던 감정은 폭발의 상태로 터져나온다. 그간 참아왔는데 왜 더 못 참을까 싶지? 숨이 턱턱 막히고, 온 몸이 쪼그라 들 것 같은데 살아야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로 사람을 죄어낸 결과였다. 읽는 나도 목 끝까지 육두문자가 부글거리고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이러한 삶을 진실로 버텨냈을 인물을 생각하면 용궁장이 그들의 성능좋은 대나무밭이지 않았을까. 복두장이의 답답함을 해결 하듯 묵혀있어서 내 것인줄 알고 살던 울화를 토해 낼 수 있는 장소의 마련이라 씁쓸함보단 후련함이 크다. 눈물 안나오는 장례식장이라는 말을 이제 완벽히 이해 할 수 있게되었다.죽기 직전까지 피말리게 사람을 쥐어 짜는 이를 가해자라 봐야할까, 그간 해온 악행에 맞는 결론을 짓도록 방임의 끝이 생의 끝으로 이어지도록 놓아만 두는게 가해자일까. 모든 것이 귀하다는데, 그 귀함을 모르고 하대를 일삼았기에 나는 전자를 가해자로 보고싶다. 후자는 잠정적 가해자가 될 수 있으나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만든 것의 원흉 또한 결국 전자로 인해 빚어진 것.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 난다고 하잖아. 악을 뿌려 놓은 곳에 악이 자란 상황이니 결국 제가 뿌린 씨를 제가 거둬들이고 그 업을 받아들이는 걸이라 용궁장에서 타들어간 이는 어느 누구를 탓해선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다.나의 희생이 당연하지 않으며, 당신의 희생 또한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확실히 못 박아두고 싶다.
다정한곰님님
앤디 위어

김애란 지음

짐 머피 지음, 지여울 옮김

헬렌 슈크만 지음, 구정희, 김지화 옮김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