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랜만에 읽는 SF의 전설, 레이 브래드버리. 1959년에 발표한 소설집. 벌써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이와 비슷한 연배에 유독 눈에 띄는 SF 작가들이 제법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스타니스와프 렘. 1920년 부근에 갑자기 태양 흑점 폭발이 심했었나? 그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방사능을 지구에 쏟아부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거명한 사람들과 브래드버리를 구별하게 만드는 건, 브래드버리는 시를 쓰기도 해서 그럴 것 같은데, 번역문을 읽으면서도 문장이 여간 고급진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독자를 유혹하는 힘이 있다. 게다가 SF, 즉 과학소설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그로테스크 또는 고딕과 (결코 귀신은 아니지만)귀신 비슷한 것도 출몰한다. 이 소설집 《멜랑콜리의 묘약》은 SF라기보다 고딕과 그로테스크 소설을 더 많이 실었다. 외계생명체와 우주여행을 주제로 하는 건 두세 작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긴 이 두세 작품을 영향이 다른 비슷비슷한 고딕/그로테스크 작품에 비하면 훅, 하는 무게감이 상당하지만. 모두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들어 있다. 이 책을 고르면서 조금 캥겼던 것은 이이의 다른 (우리나라에서 유명한)단편집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과 겹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거였다. 독자라면 당연히 의심하는 것일 텐데,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읽으시라. 한 편도 안 겹친다. 이 책은 1959년판 《A Medicine for Melancholy and Other Stories》를 두 권으로 분책에 옮긴 첫 권이다. 다른 한 권은 《온 여름을 이 하루에》라는 제목의 소설집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찍었다. 그냥 한 권을 한 권으로 만들면 안 되었을까? 합하면 7백쪽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라 책이 팔리지 않을 거 같아 그랬을까? 뭐 그냥 장삿속이었겠지. 출판사도 돈 벌어야 하는 기업이니 우리가 이해하자. 이 책, 어제 읽었다. 지금 목차를 보면 그래, 이거, 이거, 이것은 어떤 이야기였지. 재미있었어. 이렇게 떠올릴 수 있지만 일 주일 있다가, 더 멀리, 이 독후감이 업로드 된 날에도 여전히 기억할 수 있을 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제일 앞에 배치한 <어느 잔잔한 날에>. 미국인 부부 조지와 앨리스 스미스는 여름 한낮에 남서 프랑스 해변인 비아리츠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남편 조지는 대단한 예술 애호가. 그중에서도 회화를 좋아하고 파블로 피카소를 추앙하다시피 한다. 문제는 해변에서 조금, 몇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어촌의 별장에 하필이면 때를 맞춰 피카소가 와 있다는 것. 조지는 괜히 기분이 들썩들썩. 카라바지오의 과일 정물, 맹인조차 이글거리는 화사한 해바라기 꽃을 그린 고흐도 좋지만 지브롤터 전역에 한여름의 소나기를 퍼부며 수평선 위로 우뚝 솟아오른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도 같은 <거울 앞의 소녀>와 <게르니카>의 창조자인 파블로 피카소만큼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조지한테 얼마 머지않은 곳에 있다. 실물의 피카소가. 바다에 첨벙 몸을 담그고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멀리 힘을 다해 수영을 해봐도 그를 그저 한 번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해변엔 저녁이 다가오고, 오래 수영을 해 진이 빠진 조지와 다른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훌쩍 떨어진 저쪽에 조지 스미스보다 키가 작고 머리를 각지게 자른 한 남자가 홀로 고요한 대기 속을 걷고 있었다. 이렇게 해안선 무대가 마련되었고 몇 분 후 두 남자는 마주칠 운명이었다. 낯선 남자는 주위를 흘끔거리더니 자신이 혼자 있는 걸 확인하고 잠깐 몸을 돌려 모래 위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라임 맛 아이스크림을 꽂았던 가느다란 막대.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몸을 숙이고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그가 제일 잘 하는 일을 지금 모래 위에서 시작하는 거였다. 모래 위에서 태어나기 시작한 굉장한 형태들. 금세 자신의 작업에 완벽하게 심취하여 몽혼의 상태에 이른 짧은 머리의 남자. 두번째, 세번째 형체에 이어 계속 이어지는 사물의 모습. 해변을 따라 걷던 조지 스미스의 저 앞쪽에 남자의 숙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까맣게 그은 몸을 한 남자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예순다섯? 일흔? 어쩌자고 모래밭에 저토록 거친 그림을 마구 펼치고 있을까? 어떻게…. 한 발자국 그림에 더 가까이 접근한 조지. 그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편편한 모래밭에는 그리스 사자와 지중해 염소, 금가루 모래로 살집을 만든 처녀, 손으로 깎은 뿔피리를 부는 사티로스, 바닷가를 따라 꽃을 뿌리고 춤을 추는 아이들, 하프와 리라를 연주하며 깡충깡충 뛰는 악사들, 젊은이와 유니콘. 님프와 나무 요정들이 이삼십 미터가 넘는 길이로 펼쳐지고 있었다.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상형문자 또한. 모래는 녹아내린 구리색이 되어 어느 시대, 어느 인간이 읽어도 오래오래 음미할 수 있는 영원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 허리를 펴고 눈길을 든 늙은 화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는 천진한 모습. 어깨를 으쓱하는데 마치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짓을 보시오. 어린애 장난 같지 않소? 누구나 한 번은 바보가 되는 법이라오. 당신도 그럴 수 있지 않겠소? 그러니 이 바보 같은 늙은이를 용서해주시오. 아무렴. 아무렴.” 늙은 화가는 발길을 돌려 갈 길을 갔다. 조지 스미스는 넋을 잃은 채 황금 가루로 그린 바닷가의 대작, 칠 팔미터를 훌쩍 넘는 대작 중의 대작을 보느라 해가 완전히 떨어져 어둠이 내리는 지도 몰랐다. 숙소로 돌아온 조지 스미스.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너무 배가 고파서 먼저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 함께 식당 테이블에 앉은 부부. 조지가 메뉴를 집어들고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봐.” 아내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안 들려?” “응. 무슨 소린데?” “그냥 파도 소리.” 그는 잠시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어.” 아오, 정말 좋지 않나? 뭐 열일곱 편 가운데 하나를 좀 자세하게 소개했다고 줘어박지는 않겠지. 이것 말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다락방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다가 정말로 그 세계로 가버린다는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도 즐겁게 읽었고, 외계 생명체 이야기인 <번데기가 된 사나이>도 흥미진진했다. 사람이 번데기가 돼? 그럼 다음 단계는 성충이다. 사람이 변태하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까? 눈이 서너개 더 달릴 수도 있고, 몸의 피부가 뼈만큼 단단한 갑각으로 바뀔 수도 있다. 혹시 모르지 가슴 근육이 완전 빵빵해지고 등 뒤로 날개가 달려 인간 드론으로 변할 지도. 더듬이까지 생길 수 있다. 빽빽하게 공중을 메우고 있는 모든 전파를 잡아낼 수 있는 더듬이, 영어로 하면 안테나. 어떻게 변하는 지는 안 알려드리겠음..
Falstaff님
무속은 종교인가 방치된 믿음, 이성원, 손영하, 이서현, 바다출판사, 2025.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가, 그래서 사람을 안달하게 한다. 불안과 희망 속에서 욕망과 바람을 조금이라도 확고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보다 눈에 잡히는 인생을 살아가고픈 이들이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다. 사람을 믿는 것, 신을 믿는 것, 신을 대리한다는 이를 믿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 이상하게 견고한 믿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무속. 사회면에서 주로 다뤄지거나 연예면의 주요 콘텐츠이기도 하다. 물론, ‘정치’면을 휩쓸고 있기도 하다. 사회면에서 보게 되는 무속은 무속인이라 불리는 이들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에 무속인은 ‘무’는 사라지고 ‘속인’의 대표가 된다. 속이는 사람. 그리하여 무속인은 한편으로는 ‘사기꾼’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무속인의 인기는 대단하다. 새해가 되면 일상적으로 무속인을 찾고 일상의 변화가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무속인을 찾는다. 아니, 아무 일이 없어도 무속인을 찾는다. 무슨 일이 있을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찾아오게 될 노화나 질병이 그즈음이 아니라 ‘언제’ 오는 지도 운명의 상대가 ‘언제’ 오는지, ‘누구’인지 이런 것들을 알고자 하는데 무속인은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이 책은 기자들이 파헤치는 무속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무당이라고 해야 하나. 이 책의 저자인 3인의 기자는 최근 10년 동안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 무속 관련 범죄 판결문을 분석하여 무속인에게 입은 피해자의 사연을 들여다본다. 실제 피해자들과의 사연은 대부분 비슷한데, 무당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피해자들을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하여 돈과 사람을 착취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피해자도 있고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가해자’로서 보다 시원하게 법적 처벌을 받는 무당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유는? 무속 범죄에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법원이 굿 같은 무속 행위에 대해 결과로 판단하기보다는,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위로 봤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실제 굿이 치러지거나 무속인이 신도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증거가 있다면 죄가 없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재판부가 인정하는 통상적 종교 행위의 범위가 모호하기에 유무죄 판단이 엇갈리기도 했다. 법원은 굿을 비롯한 무속 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하기 위해 무교 단체인 사단법인 대한경신연합회에 자문을 구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무속 신앙은 율법과 교리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기에 적법이나 위법이냐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할 수 없다. 법적인 다툼이 있었는데,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라고 볼 수 있을까? 무속인이 행한 행위가 결과가 예상한 바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위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행위와 금액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한 경우가 있고, 무속인 본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무속의 결과를 과장하여 무속행위를 유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속인 본인의 역량. 신내림을 받았다고 하는 무속인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연예인이 무속인이 된 사례로 연예면에서 제법 보았다. 이쯤되면 무속인의 지위는 어떻게 탄생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들이 실제 만난 무속인과의 인터뷰를 보면, 무당은 산에도 있지만 도시에 많다. 무속인이라면 당연 ‘신당’, 점집을 차리는 줄 았는데 이 책을 통해 ‘수행’하는 무속인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화는 있어서 강남 지역에 신당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논현동의 무당들은 신당 표시를 하지 않고 입소문으로 고소득이나 권력층 손님들을 받고 있으며, MZ 무당은 카카오톡과 유튜브 등을 중점으로 고객을 포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를 통해 이뤄지는 콘텐츠 속에도 ‘가스라이팅’이나 ‘거짓’의 형태를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상화되고 확대되고 있는 ‘무속시장’이 창출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무속의 존재이유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속은 종교일까? 잘 모르겠다. 오락? 무속을 단순한 ‘오락’으로 치부하며 소비할 수 있을까. 단순한 오락이 주는 문제가 ‘병폐’ 수준으로 지속되고 있는데, ‘무속’을 소비하면서도 그 ‘무속’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경하기 이를데 없는데, 무속이 뒷골목 깡패처럼 군림하고 계속 그렇게 나아간다면 무속은 늘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무속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전무하다. 무속인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신고가 필수가 아니기에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점집을 운영하는 무속인도 많지 않다고 한다. 또한, 정부의 종교지원 사업 지원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물론, 공식적인 지원이야 받지 않고, 뒤로~ 그렇게 해쳐먹는 경우가 있기도 했겠지만……. 기자들이 만난 ‘무속인’ 중 ‘여성 무당은 해방된 첫 번째 여성’이라고 주장한 자도 있고, ‘올바른 무당이라면 고통받는 이들의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 경우도 있다. 채 씨는 신병을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연결해 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신병은 영적인 몸이 영적 창의력에 굶주리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며 자신처럼 1940년생 여성들은 억압적인 유교 사회에서 큰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당은 모든 전통적인 규칙과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며 “여성 무당이야말로 진정으로 해방된 첫 번째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올바른 무당이라면 고통받는 이들의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정 씨(‘나라 만신’ 김금화 수제자. 민중 무당)의 생각이다. “무당은 하늘에서 선택받았기에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을 해결하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행이 충분하면 신이 무서워서라도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신은 무정하고 배려와 용서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무속은 다른 종교와 달리 ‘제도’적이지 않다. 그러나 무속인은 실제 무속행위를 통해 소득을 벌고, 이러한 행위가 사기가 아니라 직업으로 인정되는 무속인 범죄 사건을 보면, 무속이 더 이상 어두운 형태로 시장을 형성하고 사회에서 성장할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이 부르짖듯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무속이 제도화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무속인들은 ‘무속인 인증 자격제’ 도입을 얘기한다고 하는데, 다른 종교들이 제도적으로 편입되어 무속범죄와 같은 일들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무속도 이와 같은 정도의 정리는 필요할 듯하다. 더불어, ‘믿음’과 절대적 ‘신’이라는 단어로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모든 종교의 ‘사악한’ 행위들이 정리되고 그 위상 또한 합리적인 수준으로 격하되기를 바란다.
모시빛님
앤디 위어

해커스 GSAT 취업교육연구소

해커스 GSAT 취업교육연구소 지음

SDC(Sidae Data Center)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외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