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단어는 윌리엄의 마음속에서 녹이 슨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기스저라이님
저자인 배리 로페즈는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를 쓰고자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다니며 깨우치고 쌓여가는 생각들을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 욱여넣을 의향이었고 그렇게 했다. 솔직히 책의 전체 모습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완독하기 전까지 그의 글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오지에 가까운 낯선 곳들이 등장하는 데다 문장 자체가 길기도 해서다. 그래서 처음 책을 다 읽고 글을 써보려 했을 때, 내 계획은 내가 했던 여행을 소재로 배리 로페즈처럼 이야기를 구성해 보자는 거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그 계획은 바로 접었다. 그는 이 책을 위해 몇 군데의 여행지를 선택해서 글감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선택되지 못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다른 세 곳의 이미지를 언급했다. 중국과 캐나다와 아프가니스탄. 중국에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하층계급과 야시장에 전시된 각종 동물의 모습을, 캐나다의 북단에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사냥의 터전을 잃어가는 모습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가 이런 것이라면, 내 여행 글을 여기 덧붙일 순 없었다. 삶의 경중을 논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여행은 너무나 진지하고 압도적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책 첫머리쯤에서 했던, 같지만 다른 질문 두 개로 내 글을 시작한다."이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서 갑자기 내 안에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지금, 이 호전적인 파벌의 시대, 일상적인 폭력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하나의 질문. 이제 시작이다. 내 글도 길어질 거 같다. 내 탓이 아니다. 900여 페이지를 쓴 작가 때문이다.- 파울웨더곶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월감을 가져본 적이 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확신을 갖고서 상대방을 대할 때가 있다. 내가 옳다, 내가 더 낫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동일 분야, 특히 기술적 측면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다른 분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가능할까? 더 크게 확장해서 다른 문명에 대해서도? 내가 옳고,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독선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우린 현실에서 너무 많이 목격하는 중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서구 열강이 침범하고 무시했던 여러 문화를 바라본다. 그 말살에 대한 책임과 이후 이어져야 했던,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선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사라지고 잊힌 문화가 제시했을 지혜, 현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들만의 시각을 안타까워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요구되지만, 독선과 오만에 압살되어 버린 인류의 또 다른 시선을 말이다.작가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주로 찾는 곳은 파울웨더곶이다. 이곳은 제임스 쿡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을 때 상륙한 곳이라고 한다. 제임스 쿡은 영국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으며 3차에 걸친 원정을 통해 남극 대륙 내부를 제외한 태평양의 모습을 대부분 그려낸 인물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래널드 맥도널드. 백인과 치누크족의 혼혈로 개항 전인 일본에 들어가 침략에 대응하도록 영어를 가르쳐준 인물이다. 작가가 이 둘을 집착에 가까운 관심으로 쫓는 것은 일단 그들이 제국주의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맥도널드는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둘 다 작가에 따르면 미지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지녔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도전 정신을 갖췄다. 다만 어떤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종착역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이나 갈등은 인간적인 면모이기에 그 또한 작가의 관심에 한몫한다. 작가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과거를 살피고 자신의 질문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우월감과 확신을 바탕으로 소유와 소비를 위해 자연과 문명을 침범해 그들의 설 곳을 없애버리는 이 세상에 우린 무슨 대응을 해야 할까?- 스크랠링섬작가가 두 번째로 펼쳐내는 여행지는 그린란드 부근 스크랠링섬이다. 여행이란 단어에 헷갈릴 수 있지만, 작가는 이곳에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온다. 이 섬엔 도싯 문화와 툴레 문화의 거주지가 있고, 두 문명은 몇백 년간 시기가 겹친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도싯인은 멸종했고, 툴레인은 흔히 에스키모라고 부르는 이누이트족의 직계 조상이 된다.여기서도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고고학자들과 함께 작업할 때 신경 써야 할 점, 사라진 문명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비극으로 끝난 미국의 북극 원정대가 남긴 마지막 흔적들. 수많은 에피소드를 오가며 작가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타인이나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그 의미를 찾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존중, 배려 등 타자에 대한 인정이 부족한, 어쩌면 아예 할 줄 모르는 현대문명의 우월한 이기심을 향한 걱정. 동시에 그 이기심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유적지에서 작가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을 통해서 읽는 이들에게 상기시킨다."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선물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는 것은 그저 자기 탐닉적이거나 이기적이기만 한 일이었다." (P339)- 푸에르토아요라저 지명만 놓고 보면 어디야 싶겠지만 갈라파고스 제도에 속한 지역이다. 맞다. 다윈과 종의 기원,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곳. 따지고 보면, 이곳만큼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곳도 흔치 않다.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윈은 자신의 생물학적 이론으로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특별한 위치에 치명타를 가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낸다. 인간은 완성을 위해 변화해 가는 중이며, 그래서 생태계의 최정점에 선 존재라는 식으로.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진화'라는 단어에 '진보'라는 단어를 덧씌운 개념이다. 그런데 정작 다윈은 진화를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성의 증가라고 판단하면서 '고등'이나 '하등'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이론을 차별적인 방향으로 적용했다. 어찌 보면 배리 로페즈가 쫓던 제임스 쿡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인물이 찰스 다윈인 셈이다.작가는 다윈의 그림자가 강력하게 드리워진 이곳의 섬들과 바다를 넘나들며 계속해서 사고를 확장한다. 특히 바다거북 새끼가 해변에 묻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포식자를 피해 바다로 향하는 장면과, 뒤이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생화된 개들에게 쫓기는 작가의 모습이 연이어 배치된 부분에선 과연 인간은 이 생태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돌아보게끔 한다. 또한 이곳은 갈라파고스 특유의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만, 상어 지느러미 획득과 같은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삶과 죽음이 침범해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각종 바다 생물과 함께 유영하며 실질적인 치유와 경이를 선사 받기도 하지만, 남태평양의 낙원이나 돈벌이 같은 환상이 들러붙어 기대와 실망, 희망과 반목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론 특이하지만, 보편적으론 세상의 축소판 같은 곳.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함을 주장했던 문명이 동식물을 대상으로 겸손할 리 없다. 이곳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린 지배자나 지도자가 아닌 생태계의 동등한 일원이어야 하지 않나?"호모 사피엔스가 오로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을 취하고, 물리적 환경이 인간 유전체에 선택압을 가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단순명료한 하나의 판단에 이르게 된다. 바로 환경을 보살피는 일이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깨달음이다." (P453~454)- 자칼 캠프아프리카 케냐의 나키라이라는 곳에 있는 발굴 캠프다. 나키라이는 이곳 선주민인 투르카나족의 언어로 '자칼들의 장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작가는 이곳에서 발굴자들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찾는 작업에 동참한다.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화석 증거가 있어야 어떤 실체를 상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통을 이어가야 하므로 현시점에서 과거의 모습은 뚜렷할 수가 없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 진화의 한 시점은 언제나 과도기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실체도 과도기에 해당하고, 미래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인류의 화석 증거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쿡 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했던 때처럼 도전 의식과 열린 사고를 갖추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장소와 대상만 바꾸며 같은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셈이다.하지만 동어반복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결과의 불확실성 또한 포착한다. 선주민들 역시 사람이기에 똑같은 호기심과 욕심을 지녔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일구어낸 나라의 국민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거꾸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려고도 한다. 심지어 물질문명을 향한 광신으로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가치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할 정도다.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캠프의 모습과 병치시키며 생각들을 풀어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모습이라는 듯이.작가는 이번 여행지를 통해서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가 예외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단어는 '뛰어난'이 아닌 '예외적인'이다. 그가 인류의 기원, 정확히는 그 흐름을 찾고자 하는 것은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무분별함의 특별함을 추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생태계 한 귀퉁이에서 출발한 생태계의 일원임을 확인하고픈 욕망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질문의 형태를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바꾼다. 인류의 기원을 찾듯이 모든 질문의 시작을 찾아서."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진보한 인간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도발적인 질문은 그 예외적인 성질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다." (P510)- 포트아서에서 보타니베이까지갑자기 친구의 불평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시험 문제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의 표기로 '6.25'와 '6·25' 중 어떤 것이 맞는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점을 가운데 찍는 것이 정답이었는데 친구는 오답을 선택했었다. 그는 두고두고 투덜거렸다. 점의 위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사소한 일화지만 이건 우리 세대가 반공 교육의 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하나의 예시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조차 한국전쟁의 참사를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제주 4.3, 광주 5.18. 이 단어 배열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만, 요즘 세대가 이 의미를 삶의 주변부로 밀어냈다고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다. 이념이나 신념, 성향을 떠나 희생자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또 그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을 미루어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과 이익과 소비를 위해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다.공동체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는 진보를 내세워 확장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을 억눌렀고, 심지어 자국의 국민에게까지 차별의 잣대를 들이댔다. 호주의 포트아서는, 영국이 자국의 죄수나 함량 미달이라 판단한 사람들을 격리 또는 교화시키려고 영국 밖으로 추방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작가가 방문했을 당시 이곳은 과거 교도소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였고, 얼마 후 한 남자에 의해 총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는 포트아서를 거쳐, 자원 획득이란 명목으로 선주민을, 그들의 문화를, 자연을 대상으로 각종 수탈이 이루어지는 중인 호주를 둘러보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사회 및 환경에 가해진 해악의 상당 부분에 대해 ‘터보차저를 장착한’ 자본주의가 극악무도한 원흉으로 수시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하이퍼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다. 그 핵심 질문이란, 우리 인간은 왜 서로에게 그토록 참혹한 해를 입히는가다." (P633~634)이건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전 장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호주의 어떤 공원을 거닐다 문득 희망을 붙잡는다. 어떤 종류의 희망인지 설명은 못 하겠지만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하지마비 새끼 고양이를 극진히 보살펴서 살려낸 노부부를 담은 유튜브 클립에서. 방송국의 도움으로 다리를 수술하고 더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자, 눈물을 머금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서.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안도 섞인 희망을.- 그레이브스누탁스에서 포트패민 도로까지지구상에서 아주 독특한 남극 대륙에 관한 얘기다. 선주민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고, 방문자의 위치에 따라 생명체라곤 자신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 역사상 드물게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나누겠다는 평등한 남극조약이 맺어진 곳. 뚜렷한 목적의식과 도전 정신을 지닌 과학자들과 개척자들을 불러 모으는 곳. 작가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겸허하게 세상을, 인간을, 생명을 바라본다. 나 역시 책에 나온 문장들로 이 챕터의 감상을 대신하겠다. 절대 긴 글을 쓰다 지쳐버린 게 아니다.“예전에 한 신학 교수님이 종교를 갖는다는 건 확신을 갖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지. 의심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어떤 심원한 신비에 대해 품었던 존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P751)이제 내 글도 끝이 보인다. 이 책은 작가의 생각들이 바다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접하면 그저 막연할 뿐이지만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잡아내면 읽는 이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해류와 바람이 각양각색이듯 도착지도 다들 다를 것이다. 심지어 한눈이라도 잠깐 팔면 자신도 모르게 일정 거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즉, 일관된 흐름은 있지만 생각의 방향이 사정없이 뻗어나갈 여지가 있고, 호흡이 긴 문체 특성상 집중하지 않으면 문장 단위로 헤맬 수도 있단 얘기다. 게다가 작가는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라면 다독을 권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 적어놓은 문장은 일부러 길게 늘여 쓴 편이다. 게다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챕터를 나눠 여러 에피소드를 집어넣었고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줬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읽기에 버겁거나 불편하다면, 사방팔방으로 펼쳐질 길이 부담스럽다면 시간을 투자할지 말지 신중히 결정했으면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독서가 내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대굴대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