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컨디션을 좋게 끌어 올리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해요. 연습이 부족하면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지요. -알라딘 eBook <아르헤리치의 말> (마르타 아르헤리치.올리비에 벨라미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라이언럽님
이제 곧 꽃망울이 여기저기 톡톡 터질 거다. 그럼 나는 또 출근길에 괜히 핸들 꺾고 싶어지겠지. 그냥 계속 가보고 싶을 테지. 이유도 없이, 어디 갈 것도 아니면서.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한 줄기 들어온다. 그 빛 하나로 방이 따뜻해진다. 얇은 숄 하나 가볍게 두르고 츠쯔젠의 책을 펼쳤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좀 멍해진다. 이럴 때는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나를 읽는 건지 잘 모르겠다. 느릿하게 읽어 내려간다. 한 줄씩, 게으르게. 중국 변방, 오래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화려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쪽과 달리, 북쪽의 룽잔진은 스무여 가구 남짓이 모여 밑바닥 삶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도축을 하는 사람, 비석을 깎는 사람, 가장 위에 있는 사람, 그리고 아래에서 버티는 사람. 각기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순진한 사람도 있고, 눈앞의 이익과 손해를 저울에 올리듯 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변죽이 들끓듯 쉽게 달아오르고 또 쉽게 식어버리는, 그 가벼운 태도 속에서 인간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인물들의 삶은 17개의 장으로 나뉘어 이어진다.갓 내린 아이스커피 한 잔을 쭉 들이키자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한 장, 두 장. 속도가 붙는다. 콧구멍에서 피식피식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잠은 다 달아나 있다. 시동이 제대로 걸렸다. 칼로 벤 고리버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마치 떨어지는 노을 같다고 하는 감성과 칼끝에서 진동하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집 안에 향수병을 달아놓은 듯하다는 후각을 자극하는 사실적인 묘사, 후루룩후루룩 바닥을 드러내도록 탕면을 먹어 치운 도축업자 신치짜와 그의 부인 왕슈만의 불구덩이 같은 첫날 밤 이야기가 투박하고 거칠지만, 정제되지 않은 무드가 묘하게 좋다. 며느리 인물이 영 못마땅해 아들을 대신해 억울함에 치를 떠는 노인, 신카이류. 그가 왜 본명 신융쿠가 아닌 ‘도망’이라는 뜻을 지닌 신카이류로 불리게 되었는지의 사연부터 스쳐 지나갈 법한 오리와 말, 돼지까지도 제 몫을 톡톡히 하는 세계가 쏟아지는 잠을 다 가져갔다.이 집은 시계도 필요 없다. 계절도 상관없이 아침 6시면 일어나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는 삼식이 신치짜가 온종일 지친 몸을 녹여주도록 뜨거운 물에 발 담그면 딱 밤 9시다.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흐른다. 신치짜는 자식을 원하지 않았지만, 부인의 부탁으로 ‘신신라이’라는 아이를 입양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신라이는 비뚤어지고, 결국 가장 거친 자리로 흘러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멈췄다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처음엔 맑은 국물처럼 담백하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 그런데 안성탕면이 순식간에 핵불닭볶음면으로 변했다. 혀끝이 얼얼해질 만큼 강한 장면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삼키기도 애매하고, 뱉어내기도 어려운 감정들.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확, 온도를 올려버린다. 그 온도 속에는 쉽게 말로 풀 수 없는 선택들도 섞여 있다. 누군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그 여파는 오래도록 남는다. 손바닥만 한 자리에서도 사람 사는 일은 끊이지 않는데, 하물며 끝이 보이지 않는 땅이라면 그 안에 쌓인 이야기는 얼마나 많겠는가. 이 작품은 좋은 사람을 보여준다기보다, 그냥 사람을 그대로 꺼내 놓는다. 그래서 읽다 보면 감정이 하나로 정리가 잘 안된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자꾸 남는다. 특히 염습사 리쑤전의 시선이 그 결을 더 짙게 만든다. 삶과 죽음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인물들이 더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 안에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 존엄과 이기심이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다.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젊은 여자를 염습하게 된 리쑤전은, 그녀의 남편이 정성껏 준비한 꽃으로 가득한 관을 마주한다. 생전에 아내가 좋아했다던 꽃을 하나하나 그려 넣은 정성을 보며, 리쑤전은 잠시 부러움을 느낀다. 동시에, 깊은 애도를 건넨다. 그러다 문득, 반신불수의 남편을 위해 새와 꽃을 들여놓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떠오른다.“생이 어찌 이리 불공평하죠. 당신은 생긴 것도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정다운 삶을 살다가 하늘이 부르셨잖아요. 나는 생긴 것도 그냥저냥 한 데다 고생이란 고생은 잔뜩 했는데 몸은 또 왜 이렇게 멀쩡한지. 내가 당신을 대신해 갔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안타깝게도 하늘은 나를 원치 않네요. 당신은 가서 꽃의 신이 될 수 있는데 나는 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요? 하늘에는 먼지가 없잖아요.” (p. 87) 삶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는 체념과, 자신을 별것 아닌 존재처럼 느끼는 감정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한편, 어떤 가족은 막 숨을 거둔 할머니의 반지를 두고 싸운다. 누군가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계산을 한다. 리쑤전은 그런 인간을 보며 씁쓸함과 허무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녀 역시 불륜이라는 모순된 선택을 한다. 불공평하고 뒤엉킨 삶 속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이런 장면들이 계속해서 확인시켜 준다. 이해가 되다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밀어내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로 남는다. 나 역시 불완전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선택을 쉽게 판단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를 더 생각해보려고 했다.광부의 미망인 옌포 역시 그렇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지만, 자신의 말을 대신해 주는 것이 있었다. 반 척 높이에 구리로 만든, 입이 긴 찻주전자였다. 그 주전자에는 한 번도 차가 떨어진 적이 없었고, 옌포가 건네는 한 사발의 차는 만 마디 말을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광부의 미망인이라는 삶, 짜리몽땅한 키와 새카만 얼굴 때문에 재혼 상대로는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던 옌포지만, 그녀의 차를 마셔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괜찮은 여자라고, 장가들어도 좋을 사람이라고. 어쩌면 사람을 이해하게 만드는 건 많은 말이 아니라 이런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존재하며 마음을 건네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옌포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건을 슬쩍하는 버릇이 있다. 이따금 중국 소설을 읽어보는데,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가인 위화나 류전윈과는 결이 다르지만, 현실을 꽤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만 츠쯔젠은 그걸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기억처럼 천천히 들려주는 쪽에 가깝다. 중국 소설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사람도 의외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이번에 읽은 《뭇 산들의 꼭대기》는 좀 놀랐다. 갑자기 수위가 확 올라간 느낌이랄까. 생각보다 거칠고, 잔인한 장면도 나오고, 읽으면서 “어... 여기까지 간다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분위기가 깨지는 건 아니고, 여전히 특유의 맑은 서정성은 살아 있다. 다만 그 안에 좀 더 날 것 같은 감각이 섞였다. 그래서 더 강하게 남는다. 쿰쿰한 곰팡내가 배어 있는 구석진 곳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따사로운 햇살을 기다린다. 그 사람을 향한 츠쯔젠의 순한 마음씨는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자꾸 마음이 동요한다. 이전에 읽은 그녀의 《가장 짧은 낮》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든 풀과 차가운 눈뿐일 때가 더 많다고 말하던 그녀. 그런 시선을 지닌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 인물들은 다들 자기 방식대로 버티며, 자기 몫의 통증을 안고 살아간다. 만약 고단하고 서글픈 풍경만 이어졌다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고 조금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츠쯔젠의 글은 들키고 싶지 않은 내면을 슬쩍 건드린다. 괜히 아는 척했다가 불똥이라도 튈까 외면했던 기억처럼 찔리는 마음까지 드러나, 조금은 남부끄러워진다. 그런 걸 정확히 건드린다. 내린 비에 숲은 한층 더 푸르렀고 공기 역시 예전처럼 맑은 향기를 사방에 퍼트렸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 달라 누구는 구주소나무 향기를 맡았다 하고 누구는 백합 향기를, 누구는 자작나무 향기를, 누구는 들국화 향기를, 누구는 호제비꽃 향기를 맡았다고 했다. 무료하기 짝이 없을 때 사람들은 향기를 놓고 입씨름을 하곤 했다. 마치 자신의 후각이 인정받지 않으면 자기 코가 무시당하는 것과 같다는 듯이. (p. 395)계절이 다르듯, 인생에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삶은 생각처럼 잘 흘러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오늘도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괜찮고, 누군가는 무너진다.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많다. 그러나 한쪽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좋은 날이 오면 또 아닌 날도 오고,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흘러간다. 다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가끔은 가슴 속에 맺힌 걸 꺼내고 싶어지는 순간만큼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란 하늘의 시편이 아니라 범속한 사람들의 즐거움과 눈물이라는 문장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왜 한동안 놓아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는지. 그 마음을 따라 다시 한 장을 넘긴다.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덧붙여본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쉴 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밖 하늘을 보고 속으로 세상은 이렇게 따사로운 햇볕으로 찬란한데 왜 내 세계에는 늘 서릿발만 날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없이 비탄스러웠다. 나는 소설 속 비천한 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그러기가 쉽지 않지 않은가. 내가 요양할 때 내 붓끝의 인물들 역시 따라서 ‘동면’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더더욱 세세하게 그들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었다.
곰돌이님
앤디 위어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외 감수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세이노(SayNo)

김애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