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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안희연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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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1.
작은 상자 같은 방 안에서 정물이 되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신수형의 첫 시집은 완벽한 겨울 시집이다. 무거웠던 잎들을 다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만으로 존재하는 겨울나무들처럼, 신수형의 시는 최소한의 언어만으로 백지를 채운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컵이라면, 거기 “아무것도 넣지 않고/하얗게 끓어오르는 물만 붓는”(「티타임」) 식이다. 컵에 담긴 내용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면 할수록 섬세한 맛과 향이 느껴진다. “선명한 사실”이 되기 위해 “최소한의 동작만 하기로 한”(「타임캡슐」) 사람의 독백이 그의 시다. 그의 시집에는 “부동의 자세”(「무중력」)로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사람이 산다. 그는 이 세계를 낯설어한다. 세상은 암호로 가득하다고 여긴다. 살아 있다는 게 뭔지, 오늘이 왜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세계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무빙워크’와 같다. 그는 이 세계의 속도가 버겁다. 살아 있는 한 멈출 수도 내릴 수도 없는 무빙워크 위에서 ‘나’의 육체는 자주 증발한다. 투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존재의 소실’이라는 만만치 않은 사건과 대면하는 일이다. 마음을 다쳐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조금씩 피를 흘려보내는/밤의 압력 장치//피에 대해서라면/조금 말할 수 있어요”(「무중력」)라고 무심히 고백하는 사람.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을 흘려보낸 뒤 “일요일이 지나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 (「시차」)라고 뒤늦게 깨닫는 사람. 작은 상자 속의 작은 상자 같은 방 안에서 수시로 정물이 되는 당신이라면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이 시들이 얼마나 간절한 신호인지. 우리를 태운 시간의 무빙워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전진”(「무빙워크」)할 뿐. 그래도 신수형의 시집을 손에 들고 이 겨울을 통과할 수 있어 좋다. 나는 이 말을 자랑처럼 하고 있다. 그의 문장을 따라 읽는데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후드득 떨어진다. 마음속에서 고요한 소란이 일었다는 뜻. “나는 나의 유일한 장소이자/유일한 실물이므로//나와 상관없이 이어지는/그 어떤 지루한 전개에도 놀라서는 안 된다”(「잠기다」)라는 진술에 의지하여 걷다 보면 이 무빙워크가 조금은 빤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조금 더 걸어볼 힘이 난다. 시는 금세 끝나버렸지만 조금도 짧지 않은 여운이 이어진다.
2.
그는 꿈이 깨지고 사랑이 부서진 자리에서 시를 출발시킨다. 시집 제목인 『장송행진곡』에 모든 힌트가 들어 있다. 죽은 이를 장사 지내는 ‘장송’의 시간은 그의 시적 현실이고, 앞으로 나아감의 의미를 품은 ‘행진’은 그의 시적 지향을 응축한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지켜 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티니 타이니」)가 필요한 시대, “더 크게 자신을 찢어야만 도망칠 수 있”(「날개」)는 존재의 취약성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희망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사랑으로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제가/ 죽음으로 희망하기를 바란다면/ 그 슬픔은 어떻게 저와 맞설까요?”(「그 슬픔」)라고 슬픔에게 대놓고 묻는 일. 차라리 죽음을, 죽음의 절대성과 진실성에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거는 일.
3.
인간이 집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집이 인간을 선택한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 책은 내 오랜 생각에 대한 증명이다. 백수린 작가 역시 “허름한 산동네의 낡고 작은 단독주택”의 선택을 받았다. “쓸모와 효용”의 잣대로 보면 얼마간의 불편이 따르지만 “세월의 무게”를 따진다면 “품위와 존엄”을 가진 집. 이 집에서 그는 대체 불가능한 사랑을 배우고 무수한 삶의 비밀들을 목격하며 한층 깊은 눈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는 집 안에 고요히 머물며 계절과 마음의 흐름을 읽는다. 자신의 계단에 잠시 앉았다 가는 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이 느린 산책에 동행하며 내 안에 생의 의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걷는 것은 그인데 도리어 내가 아름다워져도 되나. 책장을 덮은 뒤에도 내내 환하고, 구들 같은 온기가 이어진다. 덕분에 나 또한, 아주 오랜만에 충만하다는 느낌. 근래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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