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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신형철

출생:1976년

직업:문학평론가

최근작
2024년 8월 <정확한 사랑의 실험 (10주년 기념 특별판,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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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1.
이 책의 중심에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일, 즉 ‘사회적 비가시성(social invisibility)’에 대한 질문이 있다. 오랜 이민자 생활로 체득한 이 렌즈로 이훤은 우리의 사적·공적 삶을 들여다보고 어떤 진실들을 빛 속으로 데려온다. 이 주제만큼 돋보이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다. 초심자에게 권장되는 단문 쓰기는 실수를 피하자는 소극적인 전략이지만 이훤의 단문은 행간에 사려와 다정을 품기 위한 것이어서 ‘적극적 단문주의’라 부르고 싶어진다. 이상의 두 요소 중 전자는 사진 찍는 이훤, 후자는 시 쓰는 이훤이 스며든 결과물일 텐데, 이 책과 함께 에세이 쓰는 이훤도 우리에게 불가결해졌다. 몹시 깊고 아름다우니, 모두의 눈에 띌 거다.
2.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주머니가 아니라, 내용물을 꺼내려 하면 깨지고 마는 도자기여야 한다. 콘텐츠가 아니라 아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서너 페이지에 한 번쯤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벨트가, 그 자체가 목적인 아름다운 문장들 때문에 멈추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응모작 중에 이 작품뿐이었다.
3.
비인간적인 시스템 속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유령, 괴물, 도망자가 돼버린다. 작가는 주요 등장인물의 전직을 취업 준비생, 대기업 사원, 남파 간첩 등으로 다채롭게 설정해 사실상 누구도 시스템의 덫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절박하게 선택한 마지막 도피처는 근대인의 자연 착취를 상징하는 동물원이다.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동물을 흉내 내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아이러니의 포맷은 통렬하다. 그런데 동물원에서 동물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애를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작은 기적은 이 소설이 준비한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이 되어보고 나서야 다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된다. 누구는 콩고로 날아가 동물로의 완전한 귀화를 선언하고, 누구는 재취업에 성공하거나 혹은 시험에 합격하고, 또 누구는 곧 태어날 2세를 기다리며 여전히 동물원에 남아 가슴을 두드리고 모형 빌딩에 오른다. 이 희망의 결말이 얼마간 관습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워서, 차라리 아이러니를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이 결말이 전체적으로 경쾌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이 소설에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인 데다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고릴라들과 함께 기꺼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오르겠다는 이 작가의 선량한 의지의 소산인 것 같아서, 결국, 덩달아 따뜻해진 마음으로 작가의 편에 서기로 한다. _
4.
언젠가 ‘구락부의 문학사’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게는 최인훈의 ‘그레이 구락부’가 있었고, 가깝게는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있었으며, 더 가깝게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었다. 서진은 다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총체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절묘하게 조응하는 다인종 구락부 ‘언더그라운드’를 문학사에 새로이 등재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이 소설은 파퓰러하다. 앞의 것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어렵고 뒤의 것은 아주 적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야심만만한 이야기꾼의 출사표가 얼얼하다.
5.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1월 13일 출고 
평론가 송경원의 이미지는 온화한 편이지만 그건 그의 화법이 겸손해서이지 주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할 땐 내가 겸손해져서 듣는다. ‘시네마’란 무엇인가. 그의 기준은 ‘시간의 현상학’과 ‘카메라의 화용론’인 것 같다. 그는 “시간을 어떻게 만질 것인지의 문제”가 영화의 존재론과 직결돼 있다면서 〈보이후드〉와 〈아이리시맨〉이 담아낸 시간의 질감을 옹호한다. 또 “카메라의 의지는 영화적”이지만 그 “모든 결과는 비영화적”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라라랜드〉의 악기 카메라와 〈1917〉의 게임 카메라의 욕망을 비판한다. 옹호할 때나 비판할 때나 내성內省적 깊이를 잃지 않는 게 그의 매력이다. 이런 사람이 뭘 사랑한다고 할 땐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15년 동안 쓰인 그의 연서戀書가 완성됐다.
6.
신형철이 심사해서 김서라가 당선된 2021년 《광남일보》 신춘문예는 당선자가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게 아니라 심사자가 ‘시상의 영광’을 누린 대표적인 사례다. 잊힌 작품으로부터 신탁처럼 건네진 질문에, 누군가가 제 존재의 일부를 걸고 답을 찾아나가면, 비평은 숭고한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나는 김서라로부터 마치 처음인 듯 배웠다. 이 책은 그 방법과 태도를 확장한 결과물이다. 그는 이제 도시를 읽는다. 그 위에 쓰인 자본/권력의 지배서사를, 거기 덧쓰인 배제된/저항한 사람들의 대항서사를, 행간에 쓰인 기억-흔적과 신체-파동과 소리-풍경을 읽는다. 사진 비평가처럼, 도시사(urban history) 연구자처럼, 인류학자처럼 읽는다. 몸을 움직여 읽고, 제 삶을 섞어 읽는다. 3년 반 전 당선 소감에 그는 “광주의 여성 연구자”라는 3중의 정체성을 철필로 새기듯 적어 놓았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진심이었는지를 이 얇은 책이 입증해 내는 상황이 나는 좀 놀랍다. “죽도록 내버려 두는 도시에서 살기로 결심하는 일이 항의가 시작되는 최초의 힘”이라는 저자의 문장을,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다.
7.
소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이제 진부해져서 그 진부함을 지적하는 것조차 진부하게 느껴지는데, 진부함과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 싸울 것 같은 한 사람이, 다시 한번 이렇게 묻는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삶과 글쓰기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변화를 유려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이 작가로 말할 것 같으면 2011년 소셜 미디어에 입성한 후 괴상한 트윗으로 팬덤을 만들어낸 ‘내부자’여서, 그는 계몽적인 연설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주장한다. 먼저 삶을 삶에 바치자고, 그럼으로써 서로 연결되자고 말이다. 스스로 주체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의 재능이 쏟아내는 이 야심과 진심에 대해선 더 많은 분량의 글이 필요하다.
8.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를 다 읽고 나니 그 빳빳한 양장 커버가 이야기를(특히 그 소중한 결말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소설도 그렇다. ‘키거니언 엔딩’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것의 본질은 무슨 반전 같은 게 아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하나를 얻게 된다.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9.
『최선의 삶』은 ‘체급’ 자체가 다른 소설이었다. 이것이 소설에 할 만한 칭찬으로 적당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이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
10.
평론가 송경원의 이미지는 온화한 편이지만 그건 그의 화법이 겸손해서이지 주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할 땐 내가 겸손해져서 듣는다. ‘시네마’란 무엇인가. 그의 기준은 ‘시간의 현상학’과 ‘카메라의 화용론’인 것 같다. 그는 “시간을 어떻게 만질 것인지의 문제”가 영화의 존재론과 직결돼 있다면서 〈보이후드〉와 〈아이리시맨〉이 담아낸 시간의 질감을 옹호한다. 또 “카메라의 의지는 영화적”이지만 그 “모든 결과는 비영화적”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라라랜드〉의 악기 카메라와 〈1917〉의 게임 카메라의 욕망을 비판한다. 옹호할 때나 비판할 때나 내성內省적 깊이를 잃지 않는 게 그의 매력이다. 이런 사람이 뭘 사랑한다고 할 땐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15년 동안 쓰인 그의 연서戀書가 완성됐다.
11.
감정의 피라미드 꼭대기엔 고통(pain)있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에 따르면 어떤 고통은 그 실재성을 의심받기 때문에(“정말 아프기는 한 거야?”) 그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형상을 부여해서 공적 공간에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은 ‘연대’다. 피라미드 중간엔 슬픔(sorrow)이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슬픔과 같은 정념에 종속돼 있을 땐 그것을 명철하게 인식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슬픔에 분석적 언어를 입혔다. 이것은 ‘성찰’이다. 피라미드 아래쪽엔 기분(mood)이 있다. 그 어느 날과도,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난감한 기분은 적절한 단어와 정확한 비유로 표현될 때 비로소 내가 다룰(즐길) 만한 것이 된다. 이것은 ‘창작’이다. 존 케닉은 이 피라미드 위를 오가며 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묵묵한 위로, 자신의 슬픔을 위한 지적인 언어 처방, 그저 온갖 기분들에 대한 눈부신 시 쓰기. 케닉 씨, 이것도 명명해보세요. ‘구상은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읽으면서 뭔가 뺏겼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좋은 책 앞에서 느끼는 허탈한 쾌감.’
12.
  •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다만 이제 더 절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응징과 복권의 서사이기보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일 것인데, 이를 통해 한국문학의 인간학적 깊이가 심화될 여지는 아직 많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 소설은 그날 파괴된 영혼들이 못다 한 말들을 대신 전하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파괴를 각오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엄의 위대한 증거를 찾아내는데,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함께 쓴 것 같은 문장들은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13.
  • 나쁜 책 - 금서기행 
  • 김유태 (지은이) | 글항아리 | 2024년 4월
  • 19,800원 → 17,820원 (10%할인), 마일리지 990
  • 9.4 (54) | 세일즈포인트 : 10,948
이 책은 권위적인 국가권력이 불온함을 감지한 책과 평균적인 시민사회가 불편함을 느끼는 책을 모두 다룬다. 그게 중요하다. 이제 불온함의 가치는 생존주의와 부족주의에 의해 무시 혹은 냉대의 대상이 됐고, 불편함의 가치는 때로 타인에 대한 윤리적 섬세함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 그 명분이 약화됐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여전히 이 두 가치를, 그것의 갱신된 버전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좀 특별한 독서 에세이인 정도가 아니라 그런 정치적·문화적 맥락 속으로 뛰어든 결단이다. 성실한 본문을 압도하는 서문의, 저 이글거리는 문장들의 결기를 보라. 김유태는 나쁜 책이 좋은 책이라고 적었다. 이 책은 나쁘기 짝이 없는 역작이다.
14.
『맡겨진 소녀』를 다 읽고 나니 그 빳빳한 양장 커버가 이야기를(특히 그 소중한 결말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소설도 그렇다. ‘키거니언 엔딩’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것의 본질은 무슨 반전 같은 게 아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하나를 얻게 된다.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15.
『맡겨진 소녀』를 다 읽고 나니 그 빳빳한 양장 커버가 이야기를(특히 그 소중한 결말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소설도 그렇다. ‘키거니언 엔딩’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것의 본질은 무슨 반전 같은 게 아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하나를 얻게 된다.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16.
언젠가 ‘구락부의 문학사’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게는 최인훈의 ‘그레이 구락부’가 있었고, 가깝게는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있었으며, 더 가깝게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었다. 서진은 다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총체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절묘하게 조응하는 다인종 구락부 ‘언더그라운드’를 문학사에 새로이 등재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이 소설은 파퓰러하다. 앞의 것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어렵고 뒤의 것은 아주 적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야심만만한 이야기꾼의 출사표가 얼얼하다.
17.
  • 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 김인정 (지은이) | 웨일북 | 2023년 10월
  • 17,500원 → 15,750원 (10%할인), 마일리지 870
  • 8.8 (55) | 세일즈포인트 : 16,703
십 년 전 광주에 직장을 얻어 막 이삿짐을 풀었을 때 어떤 분이 내게 광주MBC 김인정 기자에 대해 말해주었다. 당연히 그를 알아야 하고, 최대한 빨리 만나야 한다는 듯이. 그분의 취지를, 이후 김인정의 기사를 따라 읽으며 이해했다. 그의 5.18 취재를 보라.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해야 할 것을 한다. 내게 그의 저널리즘은 거의 투쟁처럼 보였다. 그런 나날들의 상처와 보람이 증류된 이 책을 앞에 두고, 나는 십 년 전 그분의 마음으로 되뇐다. ‘우리는 당연히 김인정을 알아야 하고, 최대한 간곡히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을 고통의 재현에 대한 한 언론인의 자기 성찰로만 규정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재현 윤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 언론 환경에 대한 저항적 성찰이기도 한데, 그 환경의 배후 행위자는 뉴스 소비자인 대중과 그들의 욕망이므로, 이 책의 모든 예리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있다. 김인정은 직업상 할 만한 반성을 한 게 아니라, 성찰하지 않는 대중을 위한 일종의 대속代贖 작업을 했다. 이 책은 정확한 질문들로 현지화된, 《타인의 고통》(2003)의 20주년 기념 속편 같다. 이제 이 책에 의지해 ‘우리’와 싸우자.
18.
여기엔 짐스러운 육체를 이끌고 포복하며 살아가는 고유명사들의 삶이 있고, 그들 곁에서 기어이 어떻게든 희망을 생산해 내려고 하는 한 인간의 행군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들은 누가 준 사람이고 도 받은 사람인지를 구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의 상호 감염과 그 뭉근한 확산의 드라마에 이른다.
19.
“우리가 걸린 병은 ‘무의미에 이르는 병’이고 더 짧게 말하면 ‘허무주의’다.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책은 정확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빛난다.”
20.
광주에서 7년 반을 근무하는 동안 자주 협업했던 최화영 선생은 유능하고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유능과 다정을 겸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 책을 읽고 알게 된 것은, 그가 용감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랑 때문에 가장 용감해진다. 스물 셋일 때 머물렀던 시드니에 마흔이 되어 다시 간 것은, 그래서 ‘스물 셋의 나’를 만나 건강하게 작별하고 ‘마흔의 나’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독자로서의 자신과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자신을 대등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여러 간절한 대목들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내 것보다 더 용감한 사랑을 가졌구나. 이미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물론 그것은 직장에서의 관례적 호칭일 뿐인데), 이제부터는 좀 더 또렷한 마음으로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선생님, 잘하셨어요. 잘하실 거예요, 선생님.
21.
엄숙할 정도의 다정함, 이 책에서 그런 것을 느끼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건 가톨릭 교회의 미사 같다고. 시를 음미하고 산문을 이어 읽을 때의 호흡이, 말씀을 독서한 후 사제의 강론을 들을 때와 닮았다고. 시를 떠받들고 권위적으로 해설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을 근심하고 세상의 건강을 바라는 간절함의 깊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중후반부에 이 책의 진면목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거기서 저자의 본바탕이 억제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는 아름다운 핑계이고, 정은귀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22.
소설이라는 이름에 값하려면, 인간의 내면이라는 저 우주가 소설의 무한한 광맥이라는 사실을 비장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헌신하는 것이 소설가들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물들이 장기판의 말처럼 도구화되어 소비되는 이야기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소설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까닭이 아닌가.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이 작가가 보여 준 성의는 내 마음을 움직였다.
23.
“남자가 아는 것은 지금 여자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 이 문장을 적을 때 이 작가는 솔직하고 필사적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이 작가가 아는 것도 그것뿐일 테니까. 지금 ‘그들’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들의 말을 들어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대신 전해 줄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애쓴 시간 동안 이 일곱 편의 작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가 바로 그들이니까, 그가 타자이니까. (……) 진정한 작가들은, 이렇게 조금씩, ‘나는 타자다’의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이 책은 조해진의 과거이고 우리의 미래다.
24.
나희덕의 문학을 직립하게 하는 세개의 중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적 인간’과,라고 쓴 다음에 ‘역사적 인간’을 적는 백낙청, ‘생태적 인간’을 적는 김종철, ‘상상력의 인간’을 적는 정현종. 시인은 역사적 현실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고, 그러면서 인류의 종(種)적 책임을 성찰해야 하며, 이런 무거운 사명이 시를 제압할 수 없게 탄력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 가치들이 제 안에 조화롭게 용해되도록 한 촉매는 물론 나희덕 자신이고, 그러므로 이 문학의 이름은 ‘나희덕’일 수밖에 없으며, 어느덧 그도 한국 현대시의 한 중력이 되었다. 몇년간 가까이에서 그를 경험할 기회가 있었으므로 잘 안다. 나는 그처럼 부지런히 공부하는 시인을 본 적이 없고, 그처럼 동료와 제자를 잘 보살피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그런 저자를 닮았다. ‘공동체’론에서 ‘인류세’론에 걸친 그의 근년 공부의 결실이 치열하고, 윤동주와 김수영에서 조온윤과 박규현까지, 선후배의 시를 보살핀 시인론들이 자상하다. 이 열정과 정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가 애독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빌려 짐작해볼 뿐, 사랑이 그의 진짜 중력이라고. 이제 그 사랑이 ‘문명의 바깥으로’ 우리를 이끈다.
25.
  • 사물의 철학 - 질문으로 시작하여 사유로 깊어지는 인문학 이야기 
  • 함돈균 (지은이) | 난다 | 2023년 4월
  • 17,000원 → 15,300원 (10%할인), 마일리지 850
  • 8.0 (1) | 세일즈포인트 : 642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서 오랜 시간 함돈균 형의 글을 봐왔다. 나는 어떤 시에 대해 그가 먼저 쓴 글을 본 뒤 내 글을 포기한 적이 있다. 더는 보탤 말이 없을 만큼 내 생각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잦지는 않다. 두 비평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둘이 언제나 같은 판단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나와 달리 판단할 때도 그 사실 자체가 내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평가 함돈균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한편 인간 함돈균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은 거의 존경에 가깝다. 그가 말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그가 “이런 일이 필요해 보인다,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면, 곧 그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보게 된다. 그 일이라는 것은 대체로 옳고 어렵고 아름다운 일들이어서, 그가 먼저 저지르고 나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만의 어떤 무뚝뚝한 열기는 따뜻해서 고맙기도 하고 데일까봐 두렵기도 한, 그런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펴내는 책은 뜻밖에도 『사물의 철학』이다. 김선우(2005), 박영택(2012), 장석주(2013), 권혁웅(2014), 로제 폴 드루아(2014) 등이 쓴 사물에 대한 책들과 나란히 꽂힐 만하다. 가끔 비평가는 자신이 ‘세계’라고 말할 때 그 어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허하다는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사물’들의 실감 속으로 하강하고 싶어진다. 이 책에서 그는 마치 처음인 듯 사물 하나하나를 다시 사용하면서 세계를 근원적으로 경험해보려 노력한다. 이런 책을 쓰는 데 응당 필요한 꼼꼼함과 기발함도 그는 갖고 있지만, 그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과감함이며, 그것이 이 책의 개성을 이룬다. 이를테면 ‘배달통’의 무의식을 프로이트와, ‘백팩’의 효용을 니체와 궁리하는 대목, 혹은 물티슈에서 ‘나치즘’ 으로, ‘보자기’에서 ‘카리스마’로 휙 넘어가는 대목들이 그렇다. 이처럼 과감한 사유는 고만고만한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리둥절한 자극을 준다. 무뚝뚝하게 예리한, 그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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