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시인의 말
첫 시집은 첫째, 내 시쓰기의 영도, 내 시의 DNA다.
그러므로 둘째, 첫 시집을 봉인해두라. 첫 시집은 모든 그다음 시집들을 위한 금기이다. 첫 시집은 이렇게 말한다: "함부로 나를 열지 마라.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얼마나 멀리 갔는지 그리고 멀리 간들 빙빙 맴도는 평행시우주(詩宇宙)임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지니……"
그래서 셋째, 못 잊을 첫 시집이라지만 못 잊어서는 안 되리. 시인이 자기 시집을 읽는다는 건, 더욱이 자신의 첫 시집을 읽는다는 건 멜로이기 이전에 스릴러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런데 넷째, 첫 시집은 어떤 식으로든 꼭 다시 돌아온다. 망령으로든 시혼으로든, 애착으로든 통점으로든, 자랑으로든 한계로든……
첫 시집을 두 번(째로) 내게 됐다. 첫 번 냈을 때처럼 ‘발굴된’ 느낌이다. 그 자리에 겸상해야 하는 쑥스러움만 아니라면 이 시집이 세상의 식탁에 어엿이 새로 올려지게 된다니, 더없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오, 가엾은 첫 시집이여! 다시 한번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처음 그때보다 당당히 기를 펴고 네 언어들이 가고 싶어했던 만큼 갈 때까지 멈추지 말아라.
202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