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우선해 밝혀야 할 것은 586세대 라는 것. 그래서 586세대 전체의 세대론을 쓴 거지만 개인적 성장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잖을까 하는 것. 개인적 이야기가 많이 삽입돼 이런 류의 얘기치고는 꽤 재미나다는 것...”
· 성균관대 卒
· 출판사 대표
· 작가(’95년 『작가세계』 등단, 2001년 『라뿔륨』으로 재등단)
·저서 : 『이매, 길을 묻다』 『친일문학은 없다』
『누가 이 여인을 가두었나?』 외 다수
이 작품은 2019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이다. 상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혹자는 이 상상에 대하여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 좋다.
본인이 이런 상상을 한 것은, 현 한국사회의 난장을 함 이해해보자는 욕구에서였다. 현 한국사회가 난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해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이런 상상은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상상을 통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상상은 허구이겠지만, 허구는 진실을 이해하는 한 행로요 지름길일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은 2019년의 한국사회를 상상해봄으로서, 한국사회의 어떤 진실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본인으로서는 이 상상이 진정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상상 속에서 본인이 본 한국사회의 어떤 진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그걸 본다면, 여러분의 독서행위도 본인의 상상만큼이나 무의미했던 것은 아님을 수긍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이 작품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대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온전한 의미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시나리오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영화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대본이고, 온전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점에서 또 소설형식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양자를 결합해서 보면, 일종의 '영화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예전에는 실제 '영화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영화를 받아들인 초창기 시절의 얘기다.
이 작품의 형식은 그렇게 영화의 초창기로 돌아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과거의 형태를 도용한 이유는, 그게 오늘날 외려 효과적인 소설쓰기의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비쥬얼이 극대화된 오늘날의 문화영역에서, 소설은 지나치게 비(非)비쥬얼적이다. 오늘날 소설이 맥을 못추고 인기가 추락해가는 핵심적 이유이다. 지나치게 읽기 위주로 되어 있는 소설은, 오늘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다.
작가라면, 이런 상황에 의구심을 지니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독자는 비쥬얼을 요구하는데 작가는 반비쥬얼 작품에만 매달려 있다면, 소설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소설의 비쥬얼화, 오늘날 작가들의 화두요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늘날 소설은 영화처럼 쓰여져야 한다. 나쁘게 말하면 세태영합이겠고, 좋게 말하면 시대와 호흡을 맞추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소설이다.
여튼, 이걸 보고 엥 이게 뭠밍 하는 소리가 나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독자를 작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작은 비쥬얼적 노력이었다는 것만큼은 이해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자유인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이다. 누구든, 이 작품을 읽고 자기 자신 안의 자유를 찾고, 자유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자유민주통일혁명이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음을 감지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