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삼의 호는 추재(秋齋)와 경원(經畹)이며,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趙重黙)이 화원(畵員)이었다는 사실과, 과거의 시험과목이었던 공령시(功令詩)에 뛰어나《추재집》권7에 공령시가 59편이나 전할 정도로 이름났던 그가 정작 자신은 83세나 되어서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실을 보아서, 아마도 그가 중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그는 1789년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중국에 다녀오기 시작하여, 여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는 여섯 차례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 많은 기행시를 짓기도 했거니와, 난설(蘭雪) 오숭량(吳崇梁)이나 유희해(劉喜海) 등의 많은 시인들과 사귀며 견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차례 국내를 여행하며 많은 기행시를 남겼는데,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다루어 장편시를 지었으며, 함경도에서는〈북행 백절(北行百絶)〉을 지었다. 강명관은 그의 석사논문〈추재 조수삼 문학연구〉에서《풍요삼선》에 실린 그의 시 23편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홍경래의 난 이후에 지어진 시가 21편이나 된다는 점을 들어서 후기의 시가 더욱 평가받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문에 그의 시가 변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평안도에서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1812년 4월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평정되었다. 그는 이즈음에 마침 평안도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1812년 7월에 정주 현감의 초청을 받고 정주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 방문길에 홍경래의 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서구도올(西寇檮杌)〉이라는 장편의 시를 쓰게 되었다. “도올”이란 원래 악(惡)을 기록하여 경계로 삼는 나무인데, 초나라에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역사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조수삼은 홍경래를 “서쪽의 도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죄악을 기록하려고 이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창작 동기는 이 시의 서(序)에 잘 나타나 있다.
<북행 백절>에는 이밖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은광을 찾아가거나 밀무역을 하는 민중들을 그리면서, 양반 위주의 여러 제도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처절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이(紀異)〉에서 발견되는 것도 서민적인 덕성이며, 조수삼 자신이 이러한 덕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 <추재 조수삼의 생애와 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