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1897)
에도江戸 막부 말기 기슈번紀州藩(와카야마현和歌山県) 출신 무사武士. 메이지明治 시대 외교관, 정치가. 메이지 초의 판적봉환, 폐번치현, 징병령, 지조개정 등에 큰 영항을 끼쳤다.
10대 중반에 에도에 유학, 야쓰이 솟켄安井息軒, 미즈모토 나루미水本成美 등에게 배우면서 도사土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죠슈長州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교유했다. 1863년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고베神戸 해군조련소에 들어갔고, 1867년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에서 활동하며 시종일관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료마가 암살된 후 복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덴만야天満屋사건).
메이지 신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천거로 외국사무국에서 관직을 처음 맡았다. 그 후 효고현兵庫県 지사(1869),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1871)를 지냈으나 삿쵸薩長의 번벌 정치에 격분, 사직하고 와카야마로 낙향했다. 1877년 고치현高知県 도사의 자유민권운동 정치단체 릿시샤立志社의 정부전복기도에 연루되어 금고 5년형으로 투옥된다. 1883년 1월 특사로 출옥한 뒤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에 유학, 런던과 빈에서 내각제도, 의회, 민주정치 등에 관해 공부했다.
1886년 귀국, 변리공사 직책으로 외무성에 들어간 후 주미 공사, 농상대신을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된다. 1892년 이토 히로부미 제2차 내각의 외무대신(제5대)에 취임, 청일전쟁 개전 직전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 막말 이래 불평등조약인 영사재판권 철폐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조약을 개정. 그해 7월 25일 발발한 청일전쟁의 전후 과정 및 삼국간섭의 외교를 주도하여 ‘무쓰외교’라는 말이 생겼다.‘면도칼 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그의 동상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