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25일, 영국 크로이던의 엄격한 케이코 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런 가정 분위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극장 구경은 생각도 못하고 집안 일을 봐주는 어느 부인에게서 채플린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정도였다. 마침내 영화 구경을 허락받고 더글러스 펜크스 주연의 <조로>를 보고서야 현실과는 다른 놀랍고도 근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영화사에서도 가장 입지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레이턴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인 회계사였던 아버지를 도와서 사무보조원으로 런던의 사무실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책으로 가득찬 그의 서재를 본 숙모가 왜 영화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냐는 말에, 그는 곧장 TV 스튜디오로 달려간다.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 심부름부터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주급 5파운드로 영화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촬영의 처음과 끝을 알리는 '딱딱이' 치는 사람, 즉 슬레이트(slate) 보이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편집 보조원, 카메라 보조원을 거친 뒤, 카메라 맨이 되고 뉴스 영화사로 옮겨 편집기사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무려 15년 동안을 영화 주변을 맴돌면서 실력을 쌓았다.
이후 편집자로서 인정을 받은 그는 1942년에 극작가 노엘 카워드(Noel Coward)와 공동으로 전쟁 홍보 영화 <토린호의 운명(In Which We Serve)>(42)으로 첫 감독에 데뷔한다. 2차 세계 대전 중 만든 이 영화는 토린이라는 구축함을 배경으로 이 구축함에 탄 군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영국 해군의 용기와 희생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다음 세 작품도 노엘 카워드의 원작이었는데, 1919년부터 1939년 사이의 런던의 한 가족 얘기를 그린 <깁슨 가족 연대기(This Happy Breed)>(44), 활기 넘치는 코미디 영화인 <즐거운 영혼(Blithe Spirit)>(45), 조용하지만 인상적인 영화 <밀회(Brief Encounter)>(45) 등이다. 세번째 작품 <밀회>는 그의 명성을 쌓게 하였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하고 어린 시절부터 심취해 애독해왔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영화화하는데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46),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48)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복잡한 소설을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후일에 스크린의 서사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명분은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이렇게 탄탄한 영화들을 연출한 린은 다음 영화들로 세미다큐멘터리 풍의 작품을 만들었다. 총 세 작품인데 그중 <소리의 장벽(Breaking the Sound Barrier)>(54)이 가장 유명하며 이 영화는 그가 데뷔작 에서 보여준 주제와 같이 의무와 학생 사이에서 느끼는 감동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후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이야기인 <홉슨의 사위 고르기(Hobson's choice)>(54). 이 영화는 연극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으로 이 영화를 시작으로 데이비드 린은 독립적인 여성상을 그리기 시작했다.(<닥터 지바고>의 라라, <라이언의 딸>의 로지 라이언, <인도로 가는 길>의 무어 부인 등)
1955년 그는, 물의 도시 베니스로 휴가를 온 올드 미스 캐서린 헵번이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은발의 신사 로사노 브라지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또다른 멜로 드라마 <여정>으로 성공을 거둔 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자기 기만에 빠진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1957년작 <콰리강의 다리>는 멜로 드라마나 문예물 등의 작품에서 웅장한 서사시 형태의 대작영화로 연출방향을 바꾼 첫 작품인 동시에 데이비드 린이 추구한 스펙타클 영화의 전형이었다.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휩쓸면서 그에게는 첫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그가 평소 정신적인 우상으로 삼았던 19세기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이튼 경처럼 데이비드 역시 이국적인 공간과 미지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선보일 영상의 탐험가로 자리를 잡는다. 1962년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1차대전 중의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인간적인 영웅의 일생을 그려 그는 다시 아카데미 작품,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여기서 그는 영화음악가 모리스 자르를 만나 그와 함께 만든 1965년작 <닥터 지바고>는 상업적인 대성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밀려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지 못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데이비드 린의 낭만적인 성향을 부추김해 문제의 작품 <라이언의 딸(Ryan's Daughter)>(70)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 영화의 실패로 그는 영화계에서 떠나게 된다. 3년 이상의 제작 기간과 당시로서는 거액인 14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여해서 화제를 모았음에도 상업적인 실패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은 것. 1906년에 독립 운동이 한창인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학교 선생의 아내 로즈와 새로 부임한 영국 수비대 장교와의 불륜의 사랑이 발각되고 로즈는 적과 불륜을 한 죄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내용이다. 스펙타클 영화 이전의 멜로 드라마와 스펙타클 시대의 서사드라마와 혼합한 듯한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데이비드 린 영화의 완결판이라고도 한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린 자신이 처음으로 창작 시나리오를 택할 정도로 의욕이 넘쳤던 영화로 데이비드 린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 많았지만 비평가들로부터 3시간 18분이나 되는 이 긴 영화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라이안의 처녀>는 '거장의 객기'라고 혹평을 해댔다. 데이비드 린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그로부터 14년 동안 일채 메가폰을 들지 않았다. 거장의 침묵에 비평가들은 당황했지만, 데이비드 린 자신은 오히려 초연했고 그동안 <라이안의 처녀>는 서서히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4년이 지난 1984년, 그는 E.M.포스터의 원작을 들고 인도로 간다. 1920년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84)은 그의 나이 77세에 인도라는 이국의 풍경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세계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감성을 영상으로 표출해 당당히 명예을 회복한다. 이 영화는 그가 즐겨 이야기하던 주제, 즉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과 낭만적이며 사실적인 자신의 영화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 데이비드 린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재편집에 몰두하는데, 당시 소개된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상업적인 이유로 제대로 편집되지 못했다고 여기고 이 영화의 짜투리 필름들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말년에 그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방대한 자본이 필요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새로운 편집은, 열렬한 팬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콜롬비아사에게 반강제적으로 떠맡겨져 새로운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창조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84년 그는 영국 영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왕실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고, 그의 이름 앞에 귀족을 뜻하는 'Sir'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죽기 바로 전에 6번째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여든이 넘은 나이에 컴비 각본가 로버트 볼트와 함께 조셉 콘나드 원작의 16세기 멕시코를 배경으로한 대작 <노스트로모> 작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스펙타클 영상에 집념을 태우다, 1991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거장답게 촬영 현장에서 쓰러진 뒤 곧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