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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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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가락국왕 김수로 0048>

가락국왕 김수로 0048

나는 언제나 그렇듯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수순으로 소설 『가락국왕 김수로 0048』을 썼다. 처음 김수로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하게 된 것은, 지금은 열반에 드신 부산 금정산 미륵암에 살고 계셨던 백운 스님으로부터다. 스님과 연락이 끊긴 지 30년도 더 된 세월이 지났다. 올초 유튜브에 스님의 상좌라는 분이 올린 다비식을 보고 스님이 열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내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스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김수로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수로에 관심 없다는 내 관념 밑바닥에는 늘 언제나 스님이 한 말씀이 맴돌고 있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소재가 아니니 관심 두지 않으려 할수록,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 굳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내가 감히 김수로를 어떻게 얘기한단 말인가? 그러나 영화적으로 김수로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언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는 막연할 따름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고려 시대 때만 해도 알의 신화가 환타지로 읽혀지는 것이 대단히 재미있는 발상이라 여겼던 것 같다. 김수로뿐만 아니라 석탈해, 고주몽, 박혁거세를 넘어 동남아 지역에서 시조와 관련된 인물들은 대개가 난생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은 인간이 알에서 출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전혀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일연스님은 김수로를 흥미롭게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거라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묘사하려다 보니 난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30년 전, 오늘의 내 머릿속을 스님은 알고 계셨을까? 나는 어느새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수순으로, 스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머릿속에서 발효시키고 있었다. 일연스님이 꾸며낸 얘기를 이해하려면 일연스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김수로와 허황후의 만남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엄중한 역사로 보는 시각을 도출해 내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정작 처음에 언급하려 했던 김수로를 통한 우리 민족의 시원과 닿아 있는 고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들어가지 못했다. 『삼국유사』가 그렇듯 환타지적 요소로 포장되어 있는 유리상자를 깨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소설로 감히 김수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김수로의 사상과 이념에 대해 이 한 편의 소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김수로를 이해하는 데 비로소 한 걸음 뗀 것에 불과하다.

공유

소설 제목 「공유(空有)」는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뽑았다. 나는 아직도 진공묘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 굳이 진공묘유를 내세웠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나라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어깨 너머로 듣고 배운 것이 있다면, 공(空)은 유(有)를 만나야 공(空)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유는 공이 있어야 비로소 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이 유고, 유가 공이라는 말과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 또한 진공은 무극으로 체(體)이며 공(空)이고, 묘유는 태극으로 용(用)이며 색(色)이라는 것쯤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대자유인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계에서 진정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될 수 있는가?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사자에도 놀라지 않고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막힘없는 삶을 끝낼 수 있는가? 누구나 가고 싶었던 그 길을 공유를 통해 느끼고 싶었다. 남은 생(生) 그 길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어디서나 이기적인 세상의 체질은 변하지 않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욕이 사람의 눈을 가리니, 아무리 둘러봐도 대의적 인간 구원의 손길은 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그 사악함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성싶다. 다음 생(生)에도 똑같은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생에서 결판을 짓고 끝을 내야 하지 않을까.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만, 진리(眞理)를 구하는 일에 크고 작음이 있겠는가? 내가 감히 「공유」를 쓴 것은 단 한번뿐인 인간의 소중한 삶을 지 맘으로 살아야 하는지, 남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共有)해 보고 싶어서이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렇듯 소중한 삶을 끄달림에 뺏긴 채, 남의 마음으로 허비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생(生)인데 남의 마음으로 허비해 버린다는 것인가? 진정한 행복은 죽음을 뛰어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건은 자신의 죽음이다. 그 앞에 그 어떤 명예도, 재물도, 사랑도 봄눈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나뿐만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은 거기, 세상의 끄달림에 목숨이 다하고 온 곳도 갈 곳도 모른 채 떠난다. 남의 마음으로 살아서는 절대로 그것을 넘을 수 없다. 죽음 직전에 남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지 맘을 찾으려 발버둥쳐 보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최소한 공유(空有)를 이해한다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불법의 근본은 진공묘유에 있으며 공유(空有), 즉 진공묘유를 모르고 화엄법계연기(華嚴法界緣起)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공묘유를 떠나 무슨 불법(佛法)을 더 논할 것이며, 내 본래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진공묘유가 무엇인가” “지 맘을 보는 것이다.” “지 맘이 무엇인가” “우주의 중심자리다.” “우주의 중심자리가 무엇인가” 나는 우주의 중심 자리가 부처의 자리라고 말한다. 아직은 이 말에 틀림을 찾지 못했다. 시간에 쫓겨 가며 밤낮으로 책을 만드느라 수고해 주신 말벗 출판사 직원들에게 마음의 고마움을 보낸다. 끝으로 나의 생각과 다른 분들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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