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내가 목격한 폭력은 크건 작건 죄다 진부했다. 단언컨대 매력적인 배경을 두르고 근사한 이야기가 될 가치 따위는 없다고 믿는다. 반면, 파탄나고 산산조각이 난 파국이야말로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가 될 가치가 충분한 건 폭력에 맞선 쪽이다.
맥락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파편이 되어버린 무력한 일상을 끌어안고 우리는 이야기를 찾는다, 때때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유를 알고 싶고, 행여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원인을 찾고 싶다. 나를 도우려고 했던 혹은 망치려고 했던 이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머리를 싸맨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납득하려고 숨은 맥락을 찾아본다.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이야기로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파탄은 이야기를 낳는다. 나도 줄곧 이야기를 찾아왔다. 내게도 이야기가 필요했다.
다소 과욕일지 모르나 폭압과 횡포 속에 살면서도 자신만의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누군가의 길에, 자신의 기원과 유래와 파국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당신의 길 어딘가에 이 소설이 우연히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작가명 황모과는 이름뿐 아니라 성씨도 필명이다. 황씨는 어머니의 성이다. 부계 쪽 친척들이 다소 서운해하실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버지 시대와 단절하겠다는 내 결심을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한다.
단절은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테마다.
작가 정체성을 포함해 인생에 그 어떤 경력도, 성취도, 자산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자부할 수 있을까? 일머리 없는 워커홀릭이라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과정 자체를 긍정할 수 있길 바라고 또 다짐해본다.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것들이 모두 해체됐을 때도 내가 나일 수 있다면 그건 내가 그 순간에 함께 했던 타자들 때문일 거라 믿는다.
적어도 내가 목격한 폭력은 크건 작건 죄다 진부했다. 단언컨대 매력적인 배경을 두르고 근사한 이야기가 될 가치 따위는 없다고 믿는다. 반면, 파탄나고 산산조각이 난 파국이야말로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가 될 가치가 충분한 건 폭력에 맞선 쪽이다.
맥락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파편이 되어버린 무력한 일상을 끌어안고 우리는 이야기를 찾는다, 때때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유를 알고 싶고, 행여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원인을 찾고 싶다. 나를 도우려고 했던 혹은 망치려고 했던 이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머리를 싸맨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납득하려고 숨은 맥락을 찾아본다.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이야기로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파탄은 이야기를 낳는다. 나도 줄곧 이야기를 찾아왔다. 내게도 이야기가 필요했다.
다소 과욕일지 모르나 폭압과 횡포 속에 살면서도 자신만의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누군가의 길에, 자신의 기원과 유래와 파국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당신의 길 어딘가에 이 소설이 우연히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제대로 변별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놓인 맥락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할까. 폭력적이고 추레하고 비루하고 역겨운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도의나 양심이나 염치 이하의 상황에도 논리나 법이나 합의로 재단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을 거라는 묘한 믿음이 생기곤 한다. (……) 어쩌면 그가 내 평행우주는 아닐까. 나도 인생의 여러 분기점에서 자멸적 선택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으니.
스물셋 즈음의 나는 계급 ‘문제’가 취향 ‘이슈’보다 훨씬 시급하다는 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다. 대놓고 냉담했던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절규에 선택적으로 미지근했다. 내심 품었던 그때의 속내는 사실 지적인 척 사탕발림했던 혐오였다. 부끄럽지만 늦게나마 그 시절을 사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