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그들의 고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들의 고통, 이를테면 어떤 커다란 반죽 덩어리 같은 고통에서 부드러운 물풀 같은 손이 슬그머니 내 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자기와 비슷하지만 자그만 어떤 것, 그러니까 자기의 새끼 비슷한 고통을 살그머니 끄집어낸다. 세상에, 도대체 언제 이런 게 내 속에 들어앉아있었던가.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효하다. 소멸하는 앞의 음과 개시되는 뒤의 음이 겹치는 순간의 화음처럼, 나는 이 소설이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 뭔가를 만들어내는 레가토 독법으로 읽히기를 소망하면서 썼다.
그러나 시간의 겹침은 음의 겹침과 달라, 붉은 베일과 푸른 베일이 바람에 휘날려 찰나의 보랏빛을 만드는 마법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소녀의 보드라운 발뒤꿈치를 깨무는 뱀 아가리의 본능처럼 잔혹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겹침의 세계에서 출몰하는 것이 천사이든 악마이든, 레가토하지 않았다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을 무엇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음의 욕망이 겹침의 차원을 낳고, 겹침은 다시 새롭고 낯선 단절을 연다. 이것이 레가토의 역설이다.
십오년 만에 장편소설을 쓰고 연재하고 수정하면서 느낀 점이라면 내가 이러다 정말 소설가가 되려나보다 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이 느낌은 자못 놀랍다 못해 공허하다. 이 장편을 쓰기 전까지 나는 진심으로 글이 노동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꼭 ‘이 장편’이 분기점인 건 아니다. ‘다른 장편’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 장편’이나 ‘다른 장편’이 아니라 보편적인 장편의 길이에 대한 것이고, 그 길이를 메워온 내 에너지와 그 완성의 시간을 도래케 한 내 인내력에 관한 것이다.
기적은 단순하다. 소설가란 글을 한 글자씩 한 문장씩 한 문단씩 한 챕터씩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벽돌공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사실을 내가 뒤늦게 늦깎이로 겪었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이 우등상은 못 받아도 개근상은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나는 개근상의 가치를 사유할 기회를 박탈당해왔다. 그건 내가 어려서부터 우등상을 너무 많이 받아왔고 그 경험에서 우등상이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얻기보다 최고의 우등상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 크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예전엔 우등상만 받아봐서 고마운 사람들이 있기로서니 나만큼 고마우랴 했다. 시험 공부를 한 것도, 시험을 치른 것도,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전부 나니까.
그러나 개근상을 염두에 두고 보니 마음이 좀 색다르다. 연재 때 매일 들러준 사람들, 알은척해준 사람들, 내일 또 보자 한 사람들이 고맙다. 무엇보다 작년에 두달 넘게 머문 토지문화관은 나를 장편 학교에 입학시켜주었고, 연재부터 출간까지 이 소설을 끼고 살아온 창비의 이상술 씨는 매일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래도 개근상 받을 때 누가 제일 고마웠느냐 묻는다면 내가 제일 고마웠다 말할 것이다. 지각 안하고 등교한 것도, 놀고 싶은데 땡땡이 안 깐 것도, 아픈데 참고 조퇴 안한 것도 전부 나니까.
사람 참 안 변한다.
오늘은 술을 먹고 싶다.
벽돌공들이 원래 술을 잘 먹지 않는가.
2012년 4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나를 돌로 치고 내게서 등 돌린 것들. 나의 애인, 나의 신념, 나의 글. 지난 책에서는 그것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뒤에서 그것들을 돌로 쳤다. 어느 것이 어느 것의 그림자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돌을 깨어 나를 얻기도 한다는데 이 책에서 나는 나를 깨어 돌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내 속에서 나온 이 투박하고 못난 돌, 가만 보니 나를 깰 때 쓴 그 돌 같다. 또 쓰고 싶다. 깰 내가 남아 있는 한. 깰 돌이 남아 있는 한. 악몽 속에서 꾸는 또 하나의 악몽처럼 쓰는 글 속에서 나는 또 쓰고 싶다. 캄캄한 글쓰기의 악무한이 저 까마득한 만장 동굴의 막다른 장소에 나를 입묘할 때까지.
조바심과 인내심은 그게 일종의 ‘심’이며 ‘자의식’이며 ‘합리화된 포즈’인 한에서 절대 무심과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 병실에 누워 오랜 시간 그 여인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중얼거린 벤야민이나, 성마르게 귀를 곤두세우고 그 여인의 머리채를 기어코 휘어잡고 말겠다고 날뛰는 나나, 시골 식당 사람들보다 한 수 아래라는 면에서는 동급인 것이다. 신 앞에서 인간이 공평하듯, 언어 앞에서는 누구나 병자 또는 정신병자인 것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죽어도 쓰기 싫은 작가의 말을 썼다.
당신이 이 책의 소설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벌써부터 조바심이 난다.
재주 없이 생각만 앞서는 통에 어느 길로 갔어도 헤매는 시간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글 쓰는 일은 제게 참으로 녹록지 않은 세월과 수업료를 지불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완료형으로 얘기하니 마치 글쓰기를 졸업이라도 한 듯한 태도 아닙니까. 역시 또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섞이기 위해서, 질투를 덜 하기 위해서, 밟히지 않기 위해서, 끝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목마르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얘기해야겠습니다. 상이 독이 되기도 한다는 뭐 그런. 이 상을 저의 부족함에 대한 경고로 알겠다느니, 더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느니 말로야 번지르르 주워섬길 수 있지만 저 같은 얼치기에게 결국 상이란 너 잘났다는 인정의 표징인 것입니다. 문학상이면 한마디로 너 잘 쓴다는 뜻인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 나 잘 쓴다 생각하는 순간 피식 거품이 꺼지고 무언가 바싹 옴츠라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틈만 나면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제가 글 앞에서는 흡사 벌레와 같다고 느낍니다. 그깟 꼬물꼬물한 벌레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채찍질을 한들 얼마나 더 빨리 길 수 있겠습니까. - 수상 소감 중에서
A와 B가 만나 자연스럽게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내용을 쓰다 화들짝 놀라 삭제 키를 누르거나 통째로 들어내는 일이 잦다보니 글의 흐름이 끊기고 진도가 안 나가고 슬럼프에 빠졌다. 모국어를 잃은 작가의 심정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나의 모국어인 술국어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그 결과 주인공이 술집에 들어가긴 했으나 밥만 먹고 나오는 장면으로 소설을 마감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러자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고 술 얘기가 쓰고 싶었겠는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다 산문으로나마 음식 얘기를 쓸 수 있게 되니 마음이 아주 환해졌다. 빛을 되찾는다는 ‘광복光復’의 감격을 알겠다. 드디어 대놓고 술 얘기를 마음껏 할 기회를 잡았구나 싶다.
(…) 지인들은 벌써 내가 소설에서 못 푼 한을 산문에서 주야장천 풀어내겠구나 걱정들이 태산이지만 마음껏 걱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걱정하든 그 이상을 쓰는 게 내 목표다.
요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때로 어긋나고 싶고 종종 가로지르고 싶고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한 번은 치달리고 싶은데
못 그러니까,
깊은 모름 가파른 모름 두터운 모름까지 못 가고
어설픈 모름 속에서,
잔바람에도 진저리치며 더럽고 질긴 깃털만 떨구는 늙고 병든 새처럼,
다 떨구고 내 앙상한 모름의 뼈가 드러날 때까지
그때까지만 쓸 것인가.
모르겠다.
그래도 독자여 나의 눈물겨운 독자여 내가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그날이 오면 부디 우리 다시 만날까 작가의 말도 모르겠다는 말도 아직 멀었다는 말도 하지 말고 나는 식어 차고 당신의 손은 따뜻할 그날에
그렇게만 읽어준다면, 내가 쓴 것은, 내 글을 기다려왔을 것으로 상상된 단 한 명의 독자에게 내가 심혈까지는 기울이지 못했으나 오랜 세월 끈질긴 스토커로서 써 보낸 뒤늦은 연애편지라 믿고 싶다. 소설까지는 못 되어도 편지 정도는 괜찮겠다. 어쨌든 戀愛다.
戀愛라는 문자, 어찌 이토록 조밀하고 매혹적인지, 어찌 이토록 섬세한 삐침과 구멍과 여백을 품고 있는지, 현실의 연애를 어찌 이토록 흡사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모든 관계의 형상을 본뜬 이 슬픈 상형무늬 속에서, 그러나 들여다보면 일순 난개발된 도로망처럼 우연하고 무의미한 짧은 선분의무더기가 되고 마는 이 허무한 기적 속에서, 어디에도 숨을 곳 없는 쥐의 공포로 소설을 쓰고 싶다. 이제 편지를 찢는다.
나와 戀愛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고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들의 고통, 이를테면 어떤 커다란 반죽 덩어리 같은 고통에서 부드러운 물풀 같은 손이 슬그머니 내 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자기와 비슷하지만 자그만 어떤 것, 그러니까 자기의 새끼 비슷한 고통을 살그머니 끄집어낸다. 세상에, 도대체 언제 이런 게 내 속에 들어앉아있었던가.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