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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강병철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산

최근작
2023년 12월 <열네 살, 종로>

꽃이 눈물이다

마지막으로 전교조다. 정체성을 걸고 투신했던 신앙처럼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노라고 감히 확언한다. 그네들은 여전히 날아오는 표창을 흥부의 알몸으로 껴안으며 노랗고 하얀 무꽃, 배추꽃을 피워내는 중이다. 눈사람 부수듯 짓밟던 편견의 무리조차 초심의 체온으로 녹여내려는 바보 천사들, 부끄럽지만 그들이 내 글의 독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나팔꽃

서해안 천수만에서 유년을 보냈다. 양지편 대나무 언덕으로 파도가 출렁거리던 바다는 리아시스식으로 촘촘해서 얼핏 저수지처럼 아담했다. 대부분 논두렁밭두렁에 파묻히다가 농한기가 되어서야 갯바구니 들고 오그르르 바다로 나가던 풍경들이 아스라하다. 모든 마을마다 바다가 있는 줄 믿고 있던 유년이다. 철 이른 객지 생활의 습성일까, 갯마을 향수병에 시달리던 사춘기를 보냈다. 원효로 골목길 자취방 앉은뱅이 밥상에 고개 박으면 원산도 어디쯤 갈매기 날갯짓이 끼륵끼륵 어깨를 누르는 것이다. 그 기억들이 활자로 박히던 것도 운명이다. 성장소설의 배경을 착한 쪽으로만 뼈대를 맞추기도 했다. 깊은 밤, 모래밭에서 머리카락 쓰다듬던 이웃들의 하얀 이빨 떠올리며 아픈 상처를 아름답게 묘사하려 공을 들였던 것 같다. 『닭니』와 『꽃 피는 부지깽이』 그리고 몇 개의 출산물들이 대개 그랬다. 문득 그 ‘착함’의 캐릭터가 바리게이트 되어 문장들을 가로막지 않았나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제 그 틀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 후 산업화 시국 전후의 아리고 시린 사연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싶다, 권력자나 그 끄나풀들이 그랬듯이 민초들 사이의 그물망도 더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싶은 것이다. 글판에 몸을 담은 지 수십 년. 최루탄 연기 자욱하던 아스팔트 청춘들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고, 이제 초로의 시점이다. 그랬다. 소금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상처 속에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던 젊음의 언저리 즈음이다. ‘민주주의와 빵과 통일과 사랑’의 문장으로 이 땅의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싶었다. 36년간 몸담았던 교단을 떠나니 몸이 새털처럼 가벼우면서도 허허로움을 감추기 힘들다. 국어교사라는 마크는 나의 업보이면서 삶의 자존이었고 우렁각시처럼 통장에 숫자를 찍어주었다. 상처를 받았고 싸우는 방법도 터득하면서 사람을 만났고 삶의 뼈대를 만들어주었다. 등이 굽고 잇몸이 도미노 현상으로 허물어지던 몸의 변화에 익숙해졌다. 괜찮다. 번번이 조명을 피해가던 그늘진 일상도 기실 견딜만하다. 지금껏 벗들의 후광으로 살아왔듯이 이 글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난, 너의 바람이고 싶어!

열다섯 스승들의 글을 내보입니다. 왕성하게 집필 활동 중인 작가 선생님도 있고 젊은 날 문청의 기억을 벽장 속에 잠갔다가 기지개 켜고 나온 늦깎이 선생님도 등장합니다. 존경받던 스승이나 명망가의 사연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피붙이, 정붙이의 장삼이사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니까 빛나는 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들을 진하게 그려 주는 풍경들이지요. ‘쇠똥구리가 굴리는 구슬 똥과 용이 물고 날아다니는 여의주의 무게’를 대등하게 가늠하던 연암 박지원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책의 주제는 ‘선생님의 친구’로 정했습니다. 참교육의 길을 열어 주신 스승과 제자들, 가족과 옛 친구 그리고 먼저 하늘로 떠난 망자나 반려견, 고향 산천과 아스라한 유년의 스크린까지 망라하였습니다. 6개월 남짓 편집에 매달리다가 손바닥 냄새에 취하기도 했답니다. 오래된 풍경들이 새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고 초면의 등장인물들이 가까운 벗처럼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액자 속 누이가 민들레 홀씨 터뜨려서 행복했던 날, ‘날줄 씨줄 인생’이란 관용구가 문득 구체성의 문장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푹신 잠들다 보니 부은 발등들이 뽀송뽀송 나았답니다. 먼저, 30여 년 교단 생활을 마감하고 새내기 사회인으로 입문한 김수열 선생님의 글과 마지막 학급 문집 『공부하기 싫은 날』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숙독되길 기대합니다. 동시에 신현수 선생님이 되살려 준 故장재인 선생님이나 한상준 선생님의 故박배엽 시인 들을 떠올리면서 잊었던 망자들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라는 악보로 다시 살아났음도 고백합니다. 그들 모두 70∼80년대의 최루탄 시국을 헤치고 해직의 질곡을 거치며 교단을 지켰던 초로의 스승들입니다. 장년의 최영미, 권혁소 선생님이나 중년의 고병찬 선생님 역시 긴 세월 참교육과 민족 문학의 도정을 짊어지셨던 스승들입니다. 최 선생님은 삶의 벗으로 함께 가는 수십 년 전의 옛 제자를 활자로 불러내셨고, 권 선생님은 텃밭에서 만난 윤병렬·이정희 부부를, 고 선생님은 롤모델 상진이 형을 그리기 위해 유년의 풍경들을 삘기 뽑듯 그려 내셨습니다. 강원도 골짜기나 충청도 비탈길에도 한결같이 눈보라 헤치던 유년의 저력들이 싸 -하게 스며들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착한 악동 수성이와 개똥수박을 합체시킨 차정선 선생님의 천태리 분교에서도 제자들의 순정이 도깨비풀처럼 떨어지질 않습니다. 정지영 선생님의 할머니 사연은 ‘여자의 일생’ 순애보처럼 진한 전형입니다.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 그리고 교직 이후의 동행들을 ‘눈물겹다’는 표현으로 정리하는 게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강영진 선생님은 반세기의 시대적 배경으로 ‘어머니 → 여동생 → 딸’을 3대에 걸쳐 그려 냈으니 독자들은 필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감동으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절망의 벽에서 평생지기 친구를 숙명처럼 만난 최영신 선생님, 갑작스런 장애를 입은 동생과의 어깨동무를 담은 박명순 선생님의 사연 역시 응달 속에서 피어나는 새순처럼 감동스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미루나무처럼 쭉쭉 뻗은 청춘이 되었을 이수언 선생님의 제자 민철이도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입니다. 특히 박선희 선생님은 10여 년 간 함께 산 반려견 ‘마루’를 동행의 등장인물로 선보여서 소재의 폭을 넓혀 주셨습니다. 그래요. 잡은 밧줄이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빤히 바라보며 어, 어, 놓치기도 했고 때로는 산산조각 깨어진 스크린을 하염없이 보듬으며 숨을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아주 우연히 만난 밧줄을 쥐며 평생을 품기도 하고 느닷없이 등허리 뒤로 터지는 수맥 같은 동반자를 만나 아, 하며 안도했음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칠판을 통해서 글을 소통하는 울타리 식구들입니다. 그 밧줄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들이 높은 산을 기어가게 하고 거친 물살을 헤엄치게 합니다. 그리고 수십 성상 강단에 설 때와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했음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초록빛 보자기 너머로 밤꽃 냄새 물씬 풍기는 초여름입니다. 2016년 6월 신새벽

넌, 아름다운 나비야!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한다 기쁨과 슬픔의 세월을 보낸 스승이 꺼내 놓은 제자 이야기를 모은 글이다. 한 평생 교단에만 서 있던 딸깍발이 서생의 글도 있고, 교단밖 스승의 드라마틱한 글도 있다. 그 원고를 독촉하고 정리하면서 놀람과 감동으로 수도 없이 눈물을 쏟았음을 고백한다. 동시에 이 땅의 깨어 있는 영혼 모두가 이 글들을 읽고 행복한 울타리를 공유하는 꿈을 간절히 바래 보기도 했다. 시대의 아픔이 교사의 보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을 섬기는 착한 스승들이 있어서 아직도 세상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 같다.

다시 한판 붙자

서해안 바닷가에서 유년을 보냈다. 떡갈나무 언덕을 넘자마자 푸른 물결과 개펄이 번갈아 나타나던 그 자리이다. 새우젓 배 타는 어부들은 드물었고 대부분 고샅에 허리 굽힌 채 농사를 짓던 그 마을이다. 나는 백사장에서 씨름판 벌이던 벗들이 오구르르 떠나면 혼자 남아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저물녘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격렬비열도 어디쯤에서 맞은편 소년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6학년 어느 초가을,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서울행 완행버스에 몸을 밀었다. 그 후 청파동 후미진 골목에서 셋방 사는 서울 유학생으로 변신하면서 모든 시스템이 바뀌어버렸다,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강박증이 더욱 깊어졌다. 배가 고팠다. 연탄불이 꺼지면 무조건 굶었고 올빼미 수업이 끝나면 종로구 수송동에서 용산구 원효로까지 도시의 밤길을 걸었다. 3년 동안 키가 딱 7센티만 크는 더딘 사춘기에 날마다 적돌만 저녁노을을 떠올린 것 같다. 그 아스라한 사연들을 정리한 것이다. 공납금이 없어서 중학교에 못 가던 벗들, 노름판에서 논문서 날린 아버지들, 밤바다 해루질에서 귀신 흉내 내던 형님들, 저수지에 뛰어들고도 오래도록 아리랑 사진관 통유리 너머 화사하게 웃던 누이의 얼굴까지 모두 신산의 스토리이다. 그 유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에서 경운기 엔진소리가 쿵, 쿵, 쿵 들리는 것 같다. 그 후 열한 명의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세월의 빛의 속도이다. 한때 열혈 청년으로 아스팔트 한복판에 서서 깃발을 올리기도 했으나 시나브로 등이 굽고 잇몸이 무너졌다. 어느새 인생의 시계추로 밤 아홉 시 언저리이니 이제 곧 배추 뿌리 뽑아낸 자리마다 억새꽃 하얗게 날리는 계절이 오리라. 그 와중에 글을 쓰는 시간이 자존을 높이는 도정이었다. 지난봄, 담양 ‘글을 낳는 집’ 앞에서 벚꽃 사태만 바라보다가 남해안 진도 ‘시에 그린’ 앞바다로 옮겨 조개잡이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강원도 횡성의 ‘예버덩’ 푸른 벌판에 망망 몰입되는 중이다. ‘이렇게 태평하게 살아도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런 자책감을 무릅쓰고 시집 『다시 한 판 붙자』를 세상에 선보인다. 나의 언어들이 숲속의 나무보다 따뜻한 평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닭니

적돌만 가는 길목 마당에 밀짚방석 깔아놓은 여름밤이다. 저물녘마다 누나들이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질러 바다로 나갔다. 도회지 사람들처럼 별들의 그물망으로 넘실거리는 밤바다 풍경 만나는 줄만 알았다. “워디 간댜?” “후후후…… 바다 귀경.” 밤이슬 맞으며 소금 긁으러 가는 줄 안 건 훗날의 얘기이다. 저수지처럼 가두어 염분을 증발시킨 농도 진한 바닷물을 염전에 담아놓고 여름 땡볕으로 하염없이 말리는 고단한 도정이다. 마침내 바닥으로 소금기 깔리면 고무래로 버석버석 긁어 창고에 나르는 것이다. 짚누리 뒤에서 오줌을 누다가 마주친 누나들은 소금꽃 종아리 털어내며 박꽃처럼 푸짐한 웃음을 지어주곤 했다. 모든 마을마다 바다가 옆구리처럼 달려 있는 줄 알았던 유년의 사연이다. (중략) “갯장어 잡으러 갈리?” 정달이 성님이 팔소매 당기던 소리가 북아현동 자취방 유리창으로 쟁쟁 들리는 것이다. 그렇게 대밭집 머슴 증섹이성, 윤언이성까지 밤바다로 진출했던가. 출렁이는 썰물 아래로 도미새끼 지느러미 치는 게 훤히 보였다. “아름답징?” 감탄사 던지다가도 갯장어만 나타나면 작살을 날렸다. 박하지와 고등도 열댓 개 건졌고. “장개는 은제 갈라유?” 서낭당 아래 부모님을 만나는 순간 아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초저녁부터 다섯 시간 내내 남포등 들고 서성이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만 하염없이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단맞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밤바다 풍경만 가슴에서 출렁이는 것이다. (중략) 17년 만에 『닭니』를 복간한다. 2003년 그해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었으나 이차구차 사연으로 절판된 그 책이다. 닭의 이빨’이 아니라 ‘가려운 이(蝨)’인데, 도깨비밥풀처럼 달라붙던 유년의 사연이 실감나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해요 바보몽땅

『사랑해요 바보몽땅』을 세상에 내놓는다. 출산된 놈들의 숫자가 팽창하면서 이제 책의 두께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의 눈여겨봄과 별도로 면벽 상태로 책과 싸우는 운명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기왕지사 벗들이 시집의 제목을 칭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년의 기록만을 통째로 출간하고 싶었는데 서두른 감이 없지 않다. 36년 훈장의 마감인 정년퇴임을 의식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태생적 조급증 탓이 더 크다. 그랬다. 출산 6개월만 지나면 또 새 책에 대한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긴 세월 그 촉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 서두름의 사내가 세상의 조급함을 탓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클랙슨 빵빵 누르는 세태를 나무라고 스마트폰이 정지되면 절망에 시달리는 그들의 표정을 질타하는 것도 허접한 노여움이리라. 빛의 속도로 흐르는 세월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탓도 있다. 그 연륜을 깊이 느끼는 상황들이 되기를 간곡하게 바란다. 솔직히 말하면 초로의 몸 만드는 준비도 중요하다. 언제부터였나, 혼밥에 더 익숙하다. 깊은 밤, 나 홀로 독백에 빠지기 시작했으니 변신의 생애를 준비하는 게 확실하다.

선생님 울지 마세요

비행기가 연기를 하얗게 뿜으며 날아가던 겨울날이던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수리조합장 아니면 소금 긁는 아저씨가 되겠다고 했고 민수는 짜장면 메치는 사람이 되어 친구들에게는 반값만 받겠다고 했다. 나는 '글 쓰는 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 미안했다. '선생님'이란 눈 높은 이상과 '글 쓰는'이란 수식이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꿈대로 살아가는 나는, 지금 세상살이의 만만찮음을 겪는 중이다.

열네 살, 종로

‘공장의 불빛’ 대신 AI 두뇌가 블랙홀처럼 확장 수축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카톡 문자가 무지개처럼 뿅뿅뿅 소통한다. 이제는 지하철을 타도 독서에 빠진 승객을 만나기 힘들다. 그런데도 내 책만큼은 느리고 진하게 쓰려는 중이다. 아득한 1960-70년대 흔적들이 갈수록 두꺼워지며 때로는 더 아스라한 배경이 철옹성처럼 앞을 막기도 한다. 6.25와 베트남 전쟁 이후 억눌렸던 강박증들이 여전히 ‘잊지 맛!’ 혓바닥 날름거리며 등장한다. 그 척박했던 시국의 상처들을 상큼하게 변신시키도록 나름 고심도 했으나 어림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의 눈길을 간절히 기다리며 앞으로도 그렇게 토로하며 글을 쓸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

콩깍지 탯줄을 만나면서 전봉준과 전태일이 새롭게 등장 했던가. 번민의 사내는 날마다 반성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몇 해 전 모습이 부끄러웠고 몇 달 전, 아니 일주일 전의 몸짓도 설레설레 지우고 싶었던 청년 심장의 그 즈음이다. 번개처럼 흘러가는 청춘의 스크린을 까맣게 놓친 채 복종을 달게 받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이다. 당연히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구촌은 자본주의로 약진했고, 사람들은 조명발을 탐내다가 그늘의 의미를 잊었다. 유리 항아리 끌안고 얼음 동산 오르다 보면 자꾸만 거미줄이 얼굴로 쏟아지는 것이다. 착한 피들의 상용어였던 ‘유목의 깃발’ 이나 ‘녹색 벌판’으로도 예전의 구경꾼들이 치고 들어오더니 금세 우리들을 객석으로 몰아내었다. 그렇게 좁혀진 운신의 폭에서 벗들과 불안하게 다투면서 자꾸 감상적 체질로 바뀌는 것이다. 까만 논두렁으로 민들레 새순이 보이면 암울한 시국의 희망으로 은유하며 솜털을 바싹 세우기도 했으니 필경, 센티멘털이리라. 교실의 얄개들은 여전히 미루나무처럼 쭉쭉 뻗는 중이다. 첫 제자들의 이세쯤 되는, 그들이 터뜨리는 비늘 파편들이 여전히 내 삶의 자양분이지만 요즘은 교실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는 것도 익숙하지 못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섬세한 속내보다는 문장의 무늬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다. 잘못을 감추는 버릇이 빈번해지면서 노여움도 많아졌다. 정년 퇴임을 목표로 삼는 나목의 평교사는 후배들의 사랑을 먹고 그늘을 드리워야 하는데 여전히 눈길을 맞추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가장 젊은 날’이라며 장판 속에서 숨 은 배추 잎 찾아내듯 낮은 기쁨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재작년의 학습연구년의 행운이 글 뒷부분의 절반쯤 차지한다. 북유럽과 토지문화관, 연희문학창작촌과 마라도까지 진출하는 행운의 기회, 특히 마라도 유배지의 망망대해는 내 생애 에서 특별한 흔적으로 남을 것 같다. 마지막 배가 떠나면 찾아올 사람이 전혀 없어, 미운 사람도 그리워지던 그 사연들이 지하철 손잡이처럼 온정으로 묻어나길 기대한다. 이 책의 지면과 사진 제공에 전폭적인 도움을 주신 충남교육 연구소 조성희 선생님과 작은숲 출판사 강봉구 사장님의 점차 진해지는 인연에 감사드린다. 벗들의 사랑을 먹으면서 고질병인 조급증을 덜어 낼 수 있어서 조금은 안도할 만하다. 2014년 여름 마른장마를 보내며

작가의 객석

인연의 끈으로 글을 묶는다. 뜨악했던 관계망들은 거리를 벌리며 조심스레 엮었고 가까운 벗들은 방심한 채 덧칠하기도 했다. 그 벗들의 그늘에서 멍든 상처 삭히다가 등이 굽고 몸이 허물어졌다. 언제부터였나, 난세에 익숙해졌다. 벼랑 끝 스크린을 의연한 척 지켜보다가 밤이 되면 비로소 나 홀로 주전자 뚜껑 굴리며 새가슴 쓸어 담는 스크린이 그것이다. 등짐 진 계단에 서서 耳順의 사연들을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내다가 술이 없는 날을 골라 컴퓨터 자막에 빠졌다. 수렁에 빠질 때마다 글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무기가 되었음은 따로 밝혀야 할 것 같다. 무심했던 이웃의 수맥 같은 은총에 새도록 사무치기도 했고 가까운벗들의 송곳에 섬 하면서 대나무 속처럼 고독했음도 밝힌다. 만남의 깊이만큼 두려움이 깊어지는 것이니 그게 이별 연습일까, 가끔은 어둠에 파묻힐 때가 가장 편안했음도 따로 밝힌다. 시베리아 눈보라 순식간에 걷히더니 어느새 생강나무 꽃 피는 봄날이다.

초뻬이는 죽었다

글판에 들어온 지 서른세 해. 여전히 문장 앞에 서면 살얼음판처럼 조마조마하다.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내’로 규정하며 시위대 스크럼에 고개 디밀고 어깨동무도 했었다. 해직 이후 미소와 눈물 사이를 시계추처럼 넘나든 신산의 사연도 숙명이다. 기울어가는 젊음 어느 직후였던가. 응달 찾아 뿌린 씨앗들이 미루나무처럼 쑥쑥 커서 스승의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철없이 행복하기도 했었다. 그랬다. 울타리 공동체를 떠올릴 때마다 아스라한 청사진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멍든 상처 식히다가도 노여움에 울컥하는 이유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열세 번째 책이다. 비로소 분필쟁이 벽에 숨어 결벽적으로 메스를 대었던 습성에서 무장해제를 시도했음도 밝힌다. 진정성의 토로가 적나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은 아무리 솔직하게 옷을 벗어도 삶보다 절박할 수 없다. 미안하다, 울면서 고백해야 할 부분에서는 슬그머니 피하는 게 약점이요 내 스타일이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1 장마철 급류에서다. 물살에 쏠린 나뭇가지 양쪽으로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울긋불긋 붙어 있었다. 딱정벌레나 진딧물 자벌레 같은 노랗고 까만 생물들일 뿐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순간. 딱. 돌부리에 부딪치면서 나뭇가지가 양쪽으로 하나씩 갈라졌다. 강변으로 쏠린 가장이의 벌레들은 꾸물꾸물 수풀로 기어올라 생명을 이어 갔고 강물로 쏠린 가지는 꾸불텅 자맥질 포스로 모두 물속에 빠져 세상을 마감했다. 돌부리를 사이에 두고 생사가 교차되는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사는 게 그랬다. 갯마을의 유년기와 특별시 골목길의 사춘기까지 모두 운명이었다. 2 중학교 동창회에 다녀왔다. 39년 만에 만난 올빼미 출신 옛 동지들이다. 지하철 가까운 식당을 열면 매캐한 숯불 연기 사이로 하얀 이빨들이 옥수수처럼 쏟아졌던가. 단절된 필름도 있었고 더러는 예전의 까까머리가 아슴아슴 겹쳐지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고 벗들은 반백의 버스 기사가 되고, 사장이 되고, 돋보기 한의사나 대기업 명퇴 사원 그리고 일찌감치 하늘나라에서 자리 잡은 벗들도 있었다. 그 수두룩 군상 중의 글 쓰는 사내 하나, 조개처럼 입 다문 것은 소심증 탓이다. 3 수렁이었다. 시국이 그랬지만 사춘기라서 더 특별하기도 했다. 그 콩나물시루에 갇힌 채 가물게 오래 크려고 숨죽이던 시절이다. 세상이 만만치 않았다. 차장 누나들은 통행금지까지 만원버스에서 팥죽이 되었고 또래의 여공들은 공단의 닭장 틀에서 실타래를 뽑았다. 마찬가지였다. 지개 작대기 집어던지고 무작정 상경한 갯마을 성님들 역시 기름밥을 먹으면서 얇은 종이돈을 연신 밑 빠진 독 속에 채우려했다. 또 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얼굴에 덕지덕지 기미투성이도 그랬고 역전의 용사 예비군 아저씨들이 운동장에서 기합 받는 풍경도 우울했다. 경찰관들은 장발족 청년들의 머리를 닥치는 대로 가위질했고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의 허벅지 비늘을 짯짯이 살피며 치마 길이를 재기도 했다. 사춘기는 판잣집과 리어카 사이에서 햇살 쬐며 보냈다. 산 너머 초록색 아파트가 아득한 나라 풍경처럼 황홀하기도 했다. ‘많이 벌면 저런 꿈나라에서 살 수 있을까?’ 설레는 가슴 땅속 깊이 파묻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은 비교적 편안했다. 물건들의 색깔만 황홀했지 가격대가 낮았고 부딪치는 군상들의 몰골이 부담이 없었다. 종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걷는 도중에 이따금 사람 냄새를 맡기 위해 구경 가기도 했다. 어느 날 와우 아파트가 무너져 버렸고 남대문 시장도 화마에 쓸려 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당연히 전태일을 몰랐고. 4 소설은 어차피 허구다. 1970년도 중학생 사진첩을 배경으로 했지만 등장인물의 진위 논란이나 검증은 의미가 없다. 벗들의 얘기를 섞었고 옆 테이블 술꾼들의 스냅을 재빨리 문장화시키기도 했다. 이따금 완성판에조차 메스를 대었던 것은 천상 분필장이 결벽성의 한계였으리라. 이제 초로의 문턱이다. 희망과는 달랐지만 이음새를 엮다 보면 세상은 때때로 살얼음판까지 두루뭉술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다가 수시로 놀란다. 소스라치던 꽃들의 잔치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그렇게 진부한 초록으로 덮여 있다니. 2011년 비 내리는 5월

해루질

태안반도는 썰물 때마다 개펄이 펼쳐있었다. 언덕을 넘어야 바다가 보였으므로 우리 집 마당에서는 얼핏 농촌 풍경으로 떠올려지기도 하던 그 서해이다. 수심이 낮은 탓으로 고기잡이 어선은 보지 못했고 명태나 도미 같은 생선도 드물었다. 검은여 물살에 몸을 담근 채 망둥이 낚시에 빠지거나 개펄에서 능젱이나 농게 정도만 잡았던 것 같다. 그 바다가 사라져버렸다. 유년의 어느 날, 불도저 굉음으로 거대한 바다가 통째로 묻힐 때 ‘대한민국의 땅이 넓어졌다’며 기뻐했던 것 같다. 동시에 우리들의 갯벌이 자손만대 사라져버렸으니 사춘기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오래도록 그 상실의 아픔에 젖었던 게 확실하다. 그 스토리가 『해루질』 성장소설의 바탕이 된다. 가난한 유년의 희망과 절망이 날줄 씨줄로 얽힌 사연이다. 해루질, 오줌싸개, 망둥이 지키기, 지팡이 감추기, 6.25와 그 후유증, 국민교육헌장, 축구 시합, 함께 먹던 밥, 베트남 전쟁, 내 무거운 성적표, 신체검사, 민물장어 잡기 등 그 모든 사연이 감춰질 듯 아스라하다. 개인과 나라 모두에게 신산했던 그 질곡의 역사들, 마지막에 해피엔딩으로 처리한 건 순진한 작가의 심성으로 이해해주시길 당부한다. 열 명 정도의 인물을 동시다발 주인공으로 삼았으니 고뇌했던 설정이다. 등장인물과 사건들은 당연히 허구이다. 귀동냥으로 듣거나 우연히 건진 이야기, 때로는 역사적 자료를 통한 고증도 있긴 하다. 이따금 옛 기억을 되살리며 캐릭터나 특장을 핀셋으로 찍어내긴 했으나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 꾸민 이야기들이니 소소한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사투리 사용은 섬세하게 고민했던 부분이다. 주로 기억력에 의존하여 1960년대 유년의 언어를 복원했으나 너무 적나라하게 썼을 경우 독자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서 때때로 수정과 생략을 고뇌했음도 밝힌다. 또 하나,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불렀는데 때로는 소설 속에서 그 명칭이 불편해서 그냥 초등이란 말을 붙이기도 했으니 양해 바란다. 이 글은 전남 담양의 <글을 낳는 집> 강원도 횡성의 <예버덩> 그리고 다도해 진도의 <시에 그린> 강원도 <아우라지 문학관>에서 20개월 도정의 결산이다. 독자들의 깊은 사랑을 기대하며.

호모 중딩 사피엔스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고. 나는 초로가 되었다. 등이 굽고 머리칼 빠지는 사이에 알파고가 인간의 뇌를 삼켜 버렸다. 아이들은 스마트폰 수렁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지성인들까지 빨간 신호등만 걸려도 클락숀 빵빵 눌러 대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의 아들딸’들과 씨름하면서 35년 교단 세월의 간극을 메우느라 안간힘 쓰는 중이다. 그 어느 날 문득 ‘청소년 시’를 떠올렸고 계절 내내 매달렸던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랬다. 그것은 글판 수십 년의 새로운 감성이었는데 마침내 한 권이 완성될 즈음 생산이 절벽처럼 딱 끊어졌으니 그 또한 조화스러운 사단이다. 깊어가는 가을, 깊은 사랑의 갈무리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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