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무렵 유럽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발명의 사용에 관한 여러 사건들로 떠들썩했다. 인간의 오랜 숙제였던 인간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실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포토그라피의 완성은 문명의 충격을 일으켰으며, 짧은 시간에 인간 세상의 다양 분야에 충격을 미쳤다. 이러한 문화 충격의 도구는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어 갔으며, 전파되는 곳마다 또 다른 변화와 충격을 만들어주었다. 포토그래피의 발명에서 주도권을 확보한 프랑스의 다게레오타입(은판사진)은 이 시대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다게레오타이프라는 새로운 사진술이 세계로 전파되어 가던 1840년대,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은 무장한 병력을 승선시킨 군함이나, 아니면 상품을 실은 상선 등에 스케치 화가 대신에 다게레오타이프 즉 은판사진기라는 새로운 총아를 재빨리 수용해, 이의 사용에 익숙한 사진사를 승선시키거나 또는 무역상품으로 사진기를 탑재한 무역선을 동아시아로 출항시켰다. 병력과 대포는 이 지역의 주변 국가를 식민지, 반식민지, 또는 무력으로 개항을 관철하기 위해서였으며, 카메라는 이러한 식민지 지배자의 영웅적인 활동과 모습과 더 많은 식민지 침략을 위한 정보 수집의 기록을 위한 것이었다.
사진은 그 뿐만 아니라 무력 침략에 의해 교역의 문을 열게 된 교역 상대국이나, 식민지 또는 식민지였던 국가의 도시나 유적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찼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러
한 사진들은 자국민들에게 전달되어 승리에 가득 찬 사진들은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사로잡았다.
이러한 사진을 이용한 지배 야욕의 기록은 동아시의 여러 지역에서 시도되었다. 중국에서 그렇고, 일본에서도 함대에 승선한 다게레오타이프 사진가가 더 주목을 받았다. 패리가
이끈 미국 함대에 승선했던 브라운 주니어는 일본 해안의 풍경과 인물들의 상을 촬영했다. 그리고 러시아 푸차틴 제독이 이끈 함대에도 코시케비치나 모자이스키 등 다게레오타아프를 다룰 줄 아는 사관들이 승선해 일본의 풍경과 인물들을 촬영했다.
그후 서양인들의 관행을 지켜보았던 일본인은 서양제국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를 향해 거침없이 밀려오면서 사진기와 이를 이용해 촬영할 수 있는 사진사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채결을 계기로 강화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을 사진관의 사진침략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36년간 지배했던 역사도 그렇고 악랄한 식민지 지배로 자행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침략이란 명칭이 그렇게 합당
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 침략 36년 시기이기 때문에 침략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진관을 통해 어떻게 침략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글사전에는 침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침략(侵略) 남의 나라를 침노하여 땅을 빼앗음. 침략(侵掠), 침노하여 약탈함. 침략주의(侵略主義), 남의 나라를 침노하여 제나라의 영토를 넓히기로 정책을 삼는 주의.
또 사진관은 일본인이 이 땅에서 자리 잡으면서 사진을 가르쳐주고 수용하면서 침략의 개념이 무엇이었던가를 알게해 준 역사적인 이정표였음도 알려준 중요한 사실임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를 고증하기위해 많은 정보를이 책에 담았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