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과 친구가 되어야겠다. 너무 오래 환멸이라는 놈을 외면하고 살았다. 사실은 그놈이야말로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었는데. 늘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를 곁에 두고도 나는 늘 다른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미 나를 버린 친구들, 소식을 끊어버린 친구,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친구들을.
이제는 환멸과 친구가 되는 수밖에 없겠다. 구겨진 넥타이라도 매고, 봉두난발이 된 머리칼에는 물을 묻혀 빗질이라도 하고, 새로운 친구를 맞아들여야겠다.
안녕, 환멸이여. 어서 와 내 식탁에 앉아서 술을 받으라. 나의 친구여.
아주 어릴 때, 아마 말도 배우기 전에, 난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숙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숙제, 다 풀 수도 못 풀 수도 있다. 한데 제법 재미난 숙제인 줄 알았으나 고장 난 냉장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참 난감하다.
또다시 희망이라니. 손가락 헤아리는 세 살 아이처럼 1에서 12까지 세고 싶다는 것인가. 한 번만,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더 헤아려보자. 세상의 냉장고들을 위하여.
만일 이 세상에 대열이 둘뿐이라면, 피살될 사람들이 늘어선 줄과 그들에게 총을 겨눈 처형자들의 줄뿐이라면 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어느 대열에 서야 할까? 단순화시키면 이 세상은 여전히 그와 같다. 그러니까 이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총구와 표적지 사이의 거리다. 아아, 그러나 그 총구와 표적지 사이에 이 쾌락과 사랑과 이해와 꿈과 그리움과 아름다움과…… 그런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존재한다. 기적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기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기적. 인간관계란 얼마든지 추악하고 치욕스럽고 야비해질 수도 있지만 또한 이런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기적을 만들어낼 줄 모르는 우리들은 모두 잔인한 바보들이거나 야비한 겁쟁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