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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조경란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9년, 대한민국 서울

직업:소설가

기타: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데뷔작
1996년 불란서 안경원

최근작
2024년 5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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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사정

작업을 하는 동안 내 삶은 더욱 단순해졌다. 소설은 간헐적으로 쓰지만 소설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날마다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잘 써야지, 좋은 걸 써야지, 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오롯이 남은 것은 소설을 좋아하는 마음뿐이다. 그게 청년 시절부터 내가 원했던 일이었으니 그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믿고, 믿는 일을 위해 노력하라는 헤세의 문장을 기억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도 그렇다. (……) 이 소설집을 쓰면서 나는 이야기가 서로를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며 살아갈 위안을 준다는 걸 경험했다. 무력하고 쓸쓸한 밤에. 이 책을 읽는 분들께도 그 감정이 가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렇게 여덟번째 연작소설집으로 오랜만에 독자들께 인사를 전한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2022년 7월 조경란

국자 이야기

어떤 장엄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될 때, 나는 나의 일부가 그 나무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분리할 줄 아는 힘, 아마도 나는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저항과 흥분과 체념과 냉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불완전하며 변덕스럽고도 위협적인 세계를 만질 수도 입을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이 연약한 언어가 과연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 나를 표시해줄 수 있는 어떤 점 하나 같은 게 저 길 끝에 정말 있을지.

나의 자줏빛 소파

삼 년 전의 나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 내부의 열망과 외부의 어떤 힘이 일치되는 순간, 작지만 오래 타오를 그런 불꽃 하나 피워낼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생을 사는 동안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것들, 나와 함께할 수 없었던 이름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한 용기도 생긴다. 이 우주에 무의미한 사건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여기까지 걸렸다. 그러니 어서 가자. 길 위에선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벌써 또 다른 폭풍이 다가오고 있으니.

백화점

보는 것의 기쁨, 보는 것의 고통, 보는 것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백화점에 머물면서 감탄하고 저항하고 소외당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매 순간 나는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갈등의 기록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복어

슬픔과 아름다움과 두려움과 죽음. 나는 내가 압도당하는 것에 관해서 쓴다. 지난가을에 시작한 원고를 올봄이 돼서야 마쳤다. 이렇게 소설 한 편을 오래 쓰기는 처음이다. 망설이거나 주춤거리거나 다른 모색을 한 것은 아니다. 쓰는 행위와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떠올리고는 했다. 노트북의 흰 화면과 좁은 방과 그리고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있던 나, 이 셋이 서로의 힘으로 서로에게 의탁하고 있던 긴 시간이었다. 사람이나 사물 혹은 무엇에 대해서든 나는 더 깃들거나 다정해지고 싶지 않다. 내가 명랑해지거나 크게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글을 쓰는 일이 이미 소명이 되어버렸다고 느꼈다면 더 큰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삶이다. 생각하고 읽고 쓸 수 있는. 이 단순한 삶이 얼마나 원대한 꿈인가를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알아차려버렸다. 그런 꿈을 이루기란 얼마나 불가능하며 또한 얼마나 깊은 고독이 수반될 것인가를. 긴 말은 소용없다. 나는 내가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고 어디까지 읽을 수 있으며 어디까지 부딪치며 쓸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교정지를 넘겨놓고 새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감이 정해진 원고도 아니었다. 이 일곱번째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도 대부분 그렇게 씌어졌고 어떤 소설은 몇 달씩 서랍 속에 있다가 발표되었다. 청탁이 밀리고 마감일을 넘겨 원고를 보냈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지금은 천천히 쓰고 오래 수정했다 기회가 오면 발표한다. 어쩌다 조금 나은 소설을 썼다는 기분이 들 때면 이 리듬 때문이라고 여긴다. 「11월 30일」은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본 한 청년의 뒷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단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을 그려보던 중이었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달걀 한 판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 숙인 채 골목을 오르는 그 청년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가 2016년 광화문에서 보낸 11월 30일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되었다. 오래전부터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용서가 아니라 이해를 구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소설은 아무래도 자기 고백적인, 형식이 자유로운 서간체가 어떨까 하다가 「오랜 이별을 생각함」을 썼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어떤 영향은 반드시 옳지는 않아도 미약하게나마 남은 생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을 거라고 여긴다. 「492번을 타고」를 쓸 당시에는 고민이 많았고 거의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은 때였다. 날마다 두세 시간쯤 정처 없이 걸어 다니며 낯선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로 나 자신을 지탱했을지 모른다. 그 시간을 통과한 후,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이 살아가기에 관한 것이 되기를 바랐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마음이 든다. ‘서시’라는 단어를 쓴 이유도 거기에 있겠지. 「봄의 피안」은 사람 사이에 변치 않는 마음, 그 견고함에 관해서 말해보려고 했다. 다른 방향에서 보고 다른 눈으로 보되, 사람이 사람에게 감탄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질문을 했던 기억도 난다. 「저수하(樗樹下)에서」는 제목 때문이었을까, ‘염상섭 포럼’에 다녀온 후 지금 느낌으로는 순식간에 써 내려간 듯하다. 자전적 요소가 개입돼 있지만 어떤 환상이 일상에 틈입함으로써 좀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저수하에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읽고 쓰는 하루하루를 예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표제작이 된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는 아는 분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려준 소소한 뇌물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부정청탁금지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으며 그 후였다면 아마 쓰지 못했을 거란 짐작이 든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많다. “매일 건강과 시”라는 제목은 몇 년 전 스페인의 문학 행사 때 만났던 그곳의 한 노시인한테 들은 이야기에서 빌렸다. 자신에게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과 시, 그 두 가지라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소설을 쓰던 중에 이 여성이 그동안 듣고 한 말로 이루어진 단어들로 결말을 쓰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자 안녕하세요, 기분이 어때요,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같은 일상어들이 무척이나 특별하게 다가오는 정서적 경험을 했다. 「김진희를 몰랐다」에 나오는 다라이에 담긴 벤자민고무나무는 얼마 전에 가 보니 누렇게 말라버렸고 통 안에 색색의 팬지들이 소복이 피어 있었다. 아동 방임 문제를 어떻게 의미 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어떤 분에게 들은 앵무새 이야기가 떠올랐다. 구상 단계에서 얼핏 연결될 수 없을 거라고 느껴졌던 인물과 삽화들이 그렇게 만나 결합되었다. 이 책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책의 표지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듯해 마음이 놓인다. 소설집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끼리’로 하자는 말이 편집부와 오갔을 만큼 모르는 사람들, 몰랐던 사람들끼리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단편들이 모였다. 많은 사건들을 통과하는 동안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횔덜린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떤 경우에도 삶이 먼저고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소설의 출발도 거기에 있으리라 믿고, 오늘은 오늘의 글을 쓰고 내일은 내일의 글을 쓸 뿐이다. 누군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과장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고 조용한 빛을 발산시키는 그런 책을 쓸 때까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인사동 사과나무, 예술의전당 앞 라리, 하이텔 문학관, 호출기, 칠월미술학원, 프리지어, 룰루, 낙산비치호텔, 「고도를 기다리며」. 연재하는 동안 나와 함께했던 것들이다. 책을 내면서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라고 제목을 바꾼다. 원고를 보기 위해 홍천의 한 숙소에서 며칠 머물렀었다. 창 밖으로 잔설이 남은 산이 보였는데 등성이 너머로까지 네 갈래 길이 보였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저 길로 가봐야지, 내일은 꼭 가봐야지 했는데 어느 길로도 한번 가보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고 나서도 가보지 못했던 그 길들이 두고 온 그리운 사람처럼 자주 떠오른다.

조경란의 악어이야기

여행도 시시하고 무엇에도 마음이 떨리거나 흔들리질 않았다. 주로 집에 있었다. 일본말은 한마디 못해도 제이크의 애니메이션 테이프는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악어 제이크'는 어느덧 어떤 한 세계의 신비로 각인되었고 그것은 내가 혼자는 견디기 힘들었던 여러 날들을 지탱해주었다. 봄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되자 여기에 실린 글을 한 편씩 한 편씩 써나가기 시작했다. 내 글만으로는 엄두를 못 냈겠으나 제이크에 기대서 이런 책을 낼 용기를 낸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내 글보다는 한 페이지씩 나란히 실린 제이크를 한 번 더 쳐다봐주었으면 좋겠다. 제이크가 온다면 누구라도 얼른 알아볼 수 있도록. 이 글에 실린 원고 중에 몇 번인가 '이제 다 지난 일이다'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제이크'에 관해 쓰다보니 그립고 돌이킬 수 없고 아직 만나지 못했고 후회가 남는 어떤 것에 관해 주로 쓰게 되었다. 한 가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제이크는 내겐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코끼리를 찾아서

어느땐 발바닥이 쩍 갈라지는 듯한 아픔 때문에 잠을 깨곤 하지만 길을 잃는 것은 곧 길을 알게 된다는, 지푸라기가 많으면 코끼리도 묶을 수 있다는, 어느 날엔간 마른 손바닥에서 불쑥 싹이 돋는 날도 있을 거라는, 벌집의 조직처럼 연약하면서도 질서정연하며 향기롭고 달콤하며 타인에게 이로운 글 한 편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 그러한 희망의 위력으로, 나는 산다.

다 읽고 나면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육 년 만에 새 장편소설을 펴낸다. 글을 쓰지 않는 순간이 글을 쓰는 순간보다 더 필사적이라는 것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내부에 있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 빛이 내 안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젠간 내 밖의 일부도 미약하나마 스스로 빛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식욕보다 더 나를 부추긴 게 사실이다. 어느 날 원고를 쓰다 말고 우두커니 식탁에 앉아 주먹만한 파르마산 치즈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조직이 단단하고 결이 일정한 그 치즈덩어리를 칼을 들고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약간 길쭉하고 동글동글한, 작은 치즈덩어리가 손바닥 안에 남았다. 그것은 사과나 달걀처럼, 누군가의 수줍은 혓바닥처럼 둥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만약에 문학에도 형태라는 게 있다면 지구나 태양, 혹은 달이나 사과처럼 둥글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부의 압력에 가장 강하며 내용물을 잘 보호할 수 있는 건 역시 구(球)의 형태일 테니까. 문학 안에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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