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는 부활절이었다. 무슨 인연에선지 부활절 새벽에 80년 5월 광주 이야기 《광주 아리랑》을 200자 원고지 2,400여 매 분량으로 탈고했다. 나는 불교 신자지만 ‘예수의 부활’이 오월광주 영령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의 꽃으로 뿌려지는 듯하다.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 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년 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제는 부활절이었다. 무슨 인연에선지 부활절 새벽에 80년 5월 광주 이야기 《광주 아리랑》을 200자 원고지 2,400여 매 분량으로 탈고했다. 나는 불교 신자지만 ‘예수의 부활’이 오월광주 영령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의 꽃으로 뿌려지는 듯하다.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 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년 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깊은 산중의 암자를 다니면서 내게는 가랑비가 내리듯 변화가 왔다. 내면의 우물이 깊어지고 속뜰이 향기로워지는 느낌이었다. 타성을 뿌리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반성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미련 없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산중에 집을 지었다. 다시는 사람과 시간에 끌려다니며 살지 말자고 내려온 곳이 지금의 산중 처소이다.
요즘은 하루의 시간을 차근차근 오이 썰 듯 쪼개서 쓴다. 이곳에서 나를 바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느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러운 삶을 좇아 살고 있다. 산중에서는 욕심만 줄이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미안할 정도로 값싸다. 고추 한 모에 100원, 톱밥을 썩힌 퇴비 한 포대에 2000원 정도이다. 다른 생필품 비용에 비해 의외로 전화비가 많이 나와 요즘에는 생산적이지 못한 전화를 끊고 산다. 처음에는 조금 갑갑했지만 요즘에는 불편한 줄 모른다. 도회지라면 발을 동동 구르고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작은 절에서 이런 장면과 마주친 적이 있다. 30대로 보이는 조그만 여자가 절의 경내로 들어와 바위에 앉더니 한참을 흐느꼈다. 그러자 스님이 다가가 이렇게 위로하였다.
"실컷 울고 가세요. 마음이 개운해지고 힘이 솟아납니다."
여자는 한동안 흐느끼고 난 후 거짓말처럼 일어나 자동차 키를 호주머니에서 꺼내들고는 절 밖으로 나가더니 사라졌다. 이를테면 암자란 울고 싶을 때 찾아가서 실컷 울 수 있는 어머니 가슴 같은 곳이기도 한 것이다.
장편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는 오랜 기간 준비했던 소설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그린 『다산의 사랑』(2012)을 집필하면서 강진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K-컬처(Culture)의 원조이자 한류(韓流)의 시초인 강진청자의 역사를 접했던 것이다. … 중국 남송의 선비 태평노인이 저술한 『수중금(袖中錦)』에서 세상에서 최고인 것만을 소개한 ‘천하제일’ 편을 보면 청자는 고려비색, 벼루는 단계의 벼루, 백자는 정요(定窯)의 백자, 낙양의 모란꽃, 건주의 차(茶), 촉의 비단 등을 꼽고 있는바 강진 비색청자가 K-컬처의 원조 내지는 한류의 시초란 말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장편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는 오랜 기간 준비했던 소설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그린 『다산의 사랑』(2012)을 집필하면서 강진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K-컬처(Culture)의 원조이자 한류(韓流)의 시초인 강진청자의 역사를 접했던 것이다. … 중국 남송의 선비 태평노인이 저술한 『수중금(袖中錦)』에서 세상에서 최고인 것만을 소개한 ‘천하제일’ 편을 보면 청자는 고려비색, 벼루는 단계의 벼루, 백자는 정요(定窯)의 백자, 낙양의 모란꽃, 건주의 차(茶), 촉의 비단 등을 꼽고 있는바 강진 비색청자가 K-컬처의 원조 내지는 한류의 시초란 말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의 일대기이다. 그렇다고 나철 선생만을 그리고 있는 전기소설은 아니다. 나철 선생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까지 살피고 다룬 소설이다. ‘나철의 시간’을 씨줄로 삼고, 우리 역사의 샘이자 뿌리인 ‘단군의 역사’를 날줄로 삼아 썼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소설 제목을『단군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는 나철 선생이야말로 단군 사상을 거듭 빛나게 한 실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이다. 지금도 신화라고 아는 사람이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아직도 식민사학의 수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변 사학자들이 신화라고 주장하는 논리에 우리 가운데 일부가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 원나라는 고려를 침입하여 가가호호 믿고 있던 신교(神敎 ; 단군교)를 믿지 못하게 했고, 일본은 일제강점기 전후로 단군조선을 신화라고 주장하며 부정했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 시작이자 민족혼의 바탕이 바로 단군조선이었으므로 교묘하게 왜곡하고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1982년에『고조선』을 발간한 러시아 사학자 U. M 푸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만큼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보성에서 태어난 나철 선생의 연대기적 삶은 크게 둘로 나뉜다. 전기는 선생이 고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전후로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전經田 나인영羅寅永이라 불렸던 시기이고, 후기는 7백년 만에 단군교를 중광(重光 ; 부활)하여 성자의 길을 걸으면서 단군 사상의 실천자로 산 홍암 나철이라 불렸던 시기이다. 그러나 고향 보성을 떠나 살았던 전후기의 모든 시간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을사년의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해 주살단誅殺團을 이끌었던 나인영의 시기나,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면서 독립운동의 대부가 되었던 시기나 모두 광복을 위해 희생했던 이타적인 삶이었음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인가는 물론 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우리가 나철 선생을 독립운동의 대부라고 부르는 까닭은 김교헌, 윤세복, 이동녕, 이회영, 서일,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주시경, 신규식, 정인보 선생 등 항일 투사와 지식인들 대부분이 대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단군조선을 우리의 역사 시작으로 보았음은 물론 단군의 피가 흐르는 한겨레라고 생각하여 지역과 계층, 나이를 초월해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인보 선생이 작시한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라는 개천절 노래가 원래는 대종교 기념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종교 2대 교주가 된 김교헌의 제자인 최남선은 나철이 조천(朝天 ; 순교)했을 때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 육신제肉身祭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나철의 순교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 전선이 비로소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무슨 인연인지 보성군 홈페이지에 올해 첫 주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국치일인 8월 29일에 최종회를 마감했다. 치욕적인 한일합병을 잊지 말자고 만든 국치일에 최종회 원고를 마감했다는 생각으로 머리끝이 쭈뼛했다. 문득 신채호 선생이 남긴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죽비와 같은 말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조천 100주년이 되는 홍암 나철 선생의 기념관에, 올해의 개천절에 바치고 싶다. 그리하여 나철 선생의 기념관이 보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제2의 독립기념관이 됐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단기 4349년 9월
정찬주 합장
작가는 잠자는 역사를 깨우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오늘 우리들의 일이듯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 끊어진 과거를 현재에 이어서 비로소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 그것을 해내야만 역사소설은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국내의 어느 사학자도 주장한 바 없지만 나는 백제 성왕상인 구세관음상과 보물 중에 보물인 금동대향로가 한 쌍이 되어 부여 능산리 능사 법당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언젠가 능산리에 능사가 복원된다면 마땅히 구세관음상과 금동대향로는 한 자리에 봉안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유물은 예전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야만 역사를 알고 싶어 찾는 이들에게 입을 열어 자신의 지난 시간을 얘기해주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작가는 잠자는 역사를 깨우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오늘 우리들의 일이듯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 끊어진 과거를 현재에 이어서 비로소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 그것을 해내야만 역사소설은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국내의 어느 사학자도 주장한 바 없지만 나는 백제 성왕상인 구세관음상과 보물 중에 보물인 금동대향로가 한 쌍이 되어 부여 능산리 능사 법당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언젠가 능산리에 능사가 복원된다면 마땅히 구세관음상과 금동대향로는 한 자리에 봉안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유물은 예전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야만 역사를 알고 싶어 찾는 이들에게 입을 열어 자신의 지난 시간을 얘기해주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여행이란 반환점이 정해진 마라톤처럼 반드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되돌아올 길을 왜 집을 떠나 고생하느냐고 묻는다. 그렇지만 여행에서의 고생이란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통찰케 하는 견문이 있고, 작아져 가는 정신의 키를 키우고 닫힌 가슴을 활짝 열게 하는 가르침의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과 견문, 수행과 방랑, 그리고 탐사가 어우러지는 종합행위를 여행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떨까.
이번에 발간한 책 <돈황 가는 길>도 내 나름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형상화시킨 산문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돈황을 좀 더 알고 싶어한다면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사전에 살펴본 후 시간을 충분히 내어 돈황의 석굴과 사막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성철스님을 더올릴 때마다 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 물은 물'을 먼저 생각합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속에 이 세상의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조금씩 자신의 그릇대로 다르게 바라보며 살지요. 진리란 이렇듯 평범하고, 행복이라는 것도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생기는 것이랍니다.
불교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하는 자기를 찾는 가르침이다. 또한 선은 자기를 찾는 데 가장 극적이고 빠른 길이다. 세상이 천변만화하여도 언제나 중심은 일체유심조의 '나'이기에 참으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작가 서문_'여러분이 바로 조사이자 부처님입니다'에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명궁수 김억추 장수
영화 <명량>이 천만 이상의 관객이 관람하여 국민영화로 등극한 일이 있다. 나는 당시 이낙연 지사의 초대로 <명량> 감독과 목포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나 역시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을 발간한 바 있으므로 이 지사께서 어떤 공통분모를 느끼고 초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는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말을 아꼈지만 영화 <명량>에 대한 내 나름의 판단은 분명히 있었다.
영화 <명량>과 내 소설의 차이점 중에는 이순신의 당파전술(撞破戰術)에 대한 해석부터 완전히 달랐다. 당파전술이 전선끼리 부딪치는 것도 되겠지만, 나는 화포(火砲) 사격으로 적선을 분멸(焚滅)시키는 것을 당파전술로 보았음이다. 왜냐하면 전선끼리 부딪치는 것은 바다 위에서 쌍방이 피해를 입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전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잘못인 강단사학자들이나 영화 <명량>의 오류는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수의 위상을 폄하하고 왜곡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김억추를 평가 절하하는 듯한 《난중일기》의 두어 구절 때문에 김억추 장수를 고민 없이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료와 관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나는 《선조실록》 《백사집》 《난중일기》 《연려실기술》 《현무공실기》 등을 참고한 바 김억추 장수를 새롭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설 제목을 《못다 부른 명량의 노래》라고 정했다.
나는 김억추 장수의 위상을 한마디로 평가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수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눈부신 전공을 세우고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용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명으로 보낸 해적출신 왜군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화살 1발로 죽임으로써 전선 13 대 133이라는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전세를 뒤집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억추 장수는 《난중일기》의 다음과 같은 두 구절 때문에 억울하게도 용장으로서 빛을 잃는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8일, 명량해전 전투 전에 나오는 구절이 첫 번째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萬戶)에나 적합할까 대장감이 못 되는 사람인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 구절은 이순신이 김억추보다는 김응남을 비난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순신을 사사건건 비난하고 원균을 옹호했던 좌의정 김응남이 못마땅하니까 김억추까지 싸잡아 비난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 결전의 날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 구절 역시도 김억추는 전선 후미에서 질서를 잡는 후위장 역할을 하느라고 물러나 있었을 뿐이었고,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너무 앞서지 말라고 이순신이 걱정했을 정도로 왜선과 맞붙어서 싸웠던 것이다. 김억추 장수는 충(忠)과 효(孝)를 다했던 장수이다. 나는 김억추 장수가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장수 가운데 한 분이었다고 확신한다. 김억추 장수를 칭송하는 율곡 이이와 김명원과 이덕형, 유영경의 시를 보면 그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 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억울한 인물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것도 소설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충절을 다했던 보성선비들
꼭두새벽이다. 늦가을 비에 잠을 깼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삭풍이 불어올 것이다. 낙엽이 마저 지고 나무들은 홀가분하게 나목으로 변신할 터. 연통 청소를 미리 해둔 것이 다행이다. 장작을 몇 개 넣고 불을 붙였는데, 금세 온기가 전해온다. 비로소 의자에 앉는다. 문득 22년 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때가 떠오른다. 그때가 내 나이 마흔아홉 살 때였다.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낙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스승 삼아 남은 여생을 작가로서 좀 더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낙향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지역에 역사적인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사는 산중마을에 조광조가 사사당한 뒤 묻혔던 초분지가 있고,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장계를 쓴 열선루가 있었다. ‘눈앞에 길이 있다’라는 금언이 있듯 내가 써야 할 소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조광조와 화순사림 이야기인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3권)를 2년 만에 발간했다. 그리고 남서해안을 10여 년 답사한 뒤 《이순신의 7년》(전7권)을 집필했다. 자연스럽게 지역의 인물과 역사는 계속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산의 사랑》은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강진 제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결실을 맺은 작품이었다.
이번에 출간하는 《보성강의 노래》는 보성선비 죽천(竹川) 박광전과 삼도(三島) 임계영 의병장의 충절 이야기다.
나는 왜 충절의 역사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일까. 답은 명명백백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간에 하늘이 보고 땅이 알고 있다는 심정이다. 《이순신의 7년》에서 발현된 인연인데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_2022년 11월, 이불재에서
맑은 복이 하얀 불두화처럼 뭉게뭉게 피어나기를
누구나 다 현실존재로서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터.
그런데 때로는 그 일상이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부처님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묵묵히 비추어 보면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갖지 않을까 싶다.
<산은 산 물은 물>을 쓴 나의 바람이 있다면 성철 스님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자리, 즉 불성(佛性)을 만나도록 뗏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눈을 뜨고 보면 자신의 마음자리가 곧 성철 스님이자 부처이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를 껴안고 잠을 자고 있으며, 아침마다 함께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자신의 부처를 발견하지 못하고 밖에서만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성철 스님을 소설화시킨 속뜻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이다. 성철 스님을 통하여 본래 구현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만남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질 때 자신만의 남대문으로 쑥 들어가 진정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리라.
<산은 산 물은 물>을 쓴 나의 바람이 있다면 성철 스님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자리, 즉 불성(佛性)을 만나도록 뗏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눈을 뜨고 보면 자신의 마음자리가 곧 성철 스님이자 부처이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를 껴안고 잠을 자고 있으며, 아침마다 함께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자신의 부처를 발견하지 못하고 밖에서만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성철 스님을 소설화시킨 속뜻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이다. 성철 스님을 통하여 본래 구현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만남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질 때 자신만의 남대문으로 쑥 들어가 진정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리라.
반야심경 에세이
이삼일 동안 읽어 왔던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 원고를 오늘 늦은 오후 무렵에야 모두 덮었다. 칠팔 년 전 통도사 사보에 연재했던 ‘나만의 반야심경 행복’과 십여 년 전 불교 언론에 연재했던 ‘생활 속의 불교 이야기’란 원고를 마치 일기장을 꺼내보듯 쉬엄쉬엄 음미하며 읽었던 것이다.
원고가 일기장 같은 느낌이 든 이유는 <반야심경>을 학문적으로 해설한 것이 아니라 <반야심경>의 문장이나 단어가 내 현실적인 삶 속에서, 혹은 오래 된 기억 속에서 자유분방한 시어詩語처럼 곳곳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반야심경>의 해설서가 아니라 <반야심경>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1부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은 26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든 원고를 시詩처럼 행을 나눈 것은 나와 독자 상호 간에 사유와 감성을 교감하기 위해서 그랬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경험한 <반야심경>의 오의奧義나 영감을 독자에게 감성적으로 전해주고자 일부러 행을 나누었다.
2부 ‘행복한 마음새김 이야기’는 15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졌는데, 1부의 바탕이 되는 내 경험이나 지식을 징검다리 삼아 쓴 고백적인 산문들이다. 때문에 2부의 일부 내용은 1부에서 시처럼 함축적으로 나탈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1부와 2부가 형식은 다른 것 같지만 내용 면에서는 일맥상통하고 있으므로 모두 다 읽고 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 선명해지리라고 믿는다.
아무쪼록 이 책 <성철스님과 모과동자>를 읽는 동안 바른 길을 걸으신 성철스님을 통해서 여러분이 지켜야 할 순수함과 따뜻함을 더욱 드러내고 끝내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스님은 누구와 하는 약속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강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스님께서 자신에게 한 약속은 진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마음속에 도장처럼 하나씩 새겨두고 실천해 나간다면 글쓴이로서는 더없는 보람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