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국내저자 > 번역

이름:원재훈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1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4년 4월 <청소년을 위한 진로 인문학>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문학은 탄생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의 이야기도 결국은 쓰는 이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타인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을 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내가 만난 시인과 소설가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하곤 했다. 어, 이거 내 이야긴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간혹 그러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건 매우 두려우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하고 짐작도 못한 이야기가 시나 소설이 되어 녹아 있을 때, 꽃이 되어 활짝 피어 있을 때, 두렵고도 즐거운 것이다. 작가들은 각양각색으로 고통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안다. 그 고통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내 인생의 밥상

이 이야기책은 추억이기도 합니다. 맛은 추억 속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냉장, 냉동과는 다른 저장소가 인간의 가슴에는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삶의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나뭇잎이 되기도 하며, 가끔씩은 깨달음의 천둥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가슴속에서 울림이 가장 큰 추억이기도 합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치열한 삶, 그래서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들이 생의 끝에서 남긴 한마디가, 바로 살아 있는 우리가 떠나야 할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기억하는 한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딸기

까치 한 마리가 창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까치 한 마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왜 저렇게 하늘이 텅 비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일은 슬픈 일이다. 그럴 때마다 고통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주었다. 다정한 연인같이... 기쁜 일이다. 오래된 친구들에게서 편지나 몇 통 받았으면 좋겠다.

망치

오래 전에 원고를 불태운 적이 있었다. 수년간 쓴 200자 원고지를 무덤처럼 쌓아놓고 소주를 마시면서 불을 질렀다. (…)잘 가라. 너는 나에게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빈속에 들어간 막소주로 더워진 내 마음이 중얼거리면서 타버린 원고지를 발로 밟았다. 그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허리를 굽혀 살펴보니, 그것은 내가 쓴 문장이었다. 명사와 동사, 부사와 형용사, 종결어미와 마침표와 쉼표가 나무뿌리처럼 뒤엉켜 있었다. 검게 타버린 원고지 위로 글자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은백색으로 반짝이던 그것은 막연히 이 세상을 떠돌던 이야기들의 뼈였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는 벽제 화장터에서 이 뼈를 다시 보았다. 살덩어리가 사라지고 뼈만 드러난 그 터가 젊은 시절 내가 원고지를 불태웠던 하숙집 앞마당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몸을 화장한 허연 자리에 인체의 골격과 함께 쇠막대기가 일곱 개 나왔다. 다리뼈 근처에 쇠막대가 타지도 않고 있었다. 아아, 신음하면서 나는 하늘을 보았다. 한 두 방울 겨울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불타버린 원고지는 바람이 불어 실어 갔는데,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온 쇠막대는 무거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뜨거워서 만질 수도 밟을 수도 없었다. 비로소 아버지의 부재가 서러웠다. 나는 그것을 말굽에 박아 넣은 편자로 보았다. 아버지 몸에 편자가 있었네요. 사시는 동안 참 무거운 것을 몸속에 지니고도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노새처럼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평생 노새처럼 저런 편자를 달고 사셨구나 싶었다. (…)저격범의 흉탄처럼 날아온 아버지의 죽음을 심장에 박고, 이제 인생 오십을 넘긴 내가…, 새벽 언덕에 올라 갈 길을 본다. 아직 멀고도 멀었구나. 겨울 철새들이 날아가는 북쪽으로 별을 던진다. 별이 떨어지자, 삶은 호랑이처럼 다가와 고양이처럼 사라진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이 소설을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문자와 문학이라는 쇠막대였다. 산산조각 난 슬픔과 기쁨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고, 비단 문학이 아니더라도 몸에 무거운 쇠막대를 지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시대,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다가, 바람이 등을 밀어 다시 한 번 일어나 갈 길을 살핀다. - 책머리에

모닝커피

사랑, 그것은 인간이라는 짐승에게 영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을 박아 넣는 천상의 행동이다. 그것이 가장 완전한 모습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각고의 노력을 하면 경지에 이르는 이성보다는 서너 차원 높은 단계의 행위이다. 쉽게 말해서 아무나 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향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달려간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왜 비애감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몸에는 어렸을 때 짐승에게 물린 상처자국이 있다. 지금도 이 상처를 보면 선명하게 그 ‘순간’이 떠오른다. 피가 흘러내렸고 많이 아팠다. 화가 난 아버지는 그 짐승을 그 자리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었다. 짐승의 비명소리, 튀어 오르는 핏방울들, 내 몸에 계속 흐르는 피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갑갑한 공기. 아우성. 모든 것이 떠오른다. 이 작은 상처를 보면. 소설이란 이런 상처를 쓰는 행위가 아닌가? 상처가 없다면 쓸 것도 없을 것 같다. 살아온 시간의 매 순간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면서 잊고, 기억하고 하는 순간순간들이 퍼즐의 조각처럼 모여서 한 사람의 삶의 무늬를 이룬다. 이 소설은 그런 사람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다와 커피

지극한 정성으로 커피를 만들면 커피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를 먹는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좋은 커피를 만나는 것도 요즘 같은 인스턴트 시대에는 만만치 않다. '좋은 커피'처럼 '그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저 타성에 젖어 만나고 헤어지고 반복한다. 인스턴트처럼. 어느 날, 동쪽의 아주 먼 바다에 있는 화산섬을 여행하면서 '바다로 난 터널'을 보았다. 그 터널의 끝이 바다인 것 같은 착각을 했다. 터널은 아슬아슬하게 해변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 터널을 지나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터널은 인생이고, 바다는 사랑이었다. 이 소설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가끔, 나는 손바닥에 글자들을 쓴다. 왼쪽 손바닥에 오른쪽 검지로 뭔가를 쓰고 그것을 꼭 쥔다. 그리고 눈을 감고 기원한다. 방금 쓴 글자가 현실이 되기를. 예를 들면 위안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쓰고, 용기라고 쓴다. 그러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고 믿는다. 비록 시간은 조금 걸릴지라도. 어려서부터 습관이 된 이 버릇은 점점 성장하면서 원고지로, 모니터로 옮겨간다. 내가 손바닥에 뭘 쓰고 있으면 도대체 뭘 그렇게 쓰냐고 딸이 묻곤 한다. 대답 대신에 그냥 웃는다. 글의 근원은 손바닥에 쓸 수 있는 간단한 한글과 한자로 쓴 단어들이었다. 道, 禪, 꿈, 별, 넋, 섬, 음악 등등, 이토록 간단한 단어들이 거대한 작품의 원형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위대한 작품은 손바닥에 쓴 단순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책 제목이 되기도 하고. 이 책은 그동안 긴 소설을 쓸 여유가 없었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짧고 소박한 소설로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소설은 제법 긴 분량의 작품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손바닥 소설로도 일단은 만족한다. 이제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 폭력적인 손바닥엔 친절과 겸손을, 추행의 손바닥엔 경건과 순결을, 핵폭탄의 손바닥엔 사랑과 평화를, 뭐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벽과 담’보다는 ‘다리와 길’을 원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절망적이고 비참한 사회현상들인 폭식, 폭소, 폭력의 시대를 버티고 견디는 내 삶의 방식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때가 되면 비로소 조금 쓸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이야기라고, 지금까지 준비를 했고, 이제 그 시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제법 많은 책을 냈다. 비록 쓸모없는 책들이지만, 그것들은 쓸모 있는 한 페이지를 위한 거름이자 밑천이리라. 또한 모닥불을 지피기 위한 마른 장작이다. 올 겨울, 이 책을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를 바란다. 2018년 입동 즈음 - 후기

소주 한 잔

지금은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그런 포만감 뒤에 정신의 빈곤함이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눈에 걸리듯 곳곳에 숱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성형과 다이어트 산업이 불야성을 이룬다. 영혼이 배고픈 시대다. 삶에서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게 영혼과 육체의 관계다. 영혼이 배고프면 육체 역시 견딜 수 없고, 육체가 굶주리면 영혼 또한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배고픈 영혼에 병든 육체가 따르고, 배고픈 육체에 병든 영혼이 따르는 법이다. 자살은 영혼의 굶주림 앞에서 사람이 선택하는 여러 가지 반응 중 하나다. 그러나 영혼의 굶주림에 비해 육체의 굶주림은 훨씬 생생하다. 물론 먹을 것이 풍요롭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혼자만 잘 살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 전우익 선생은 말했다. 그렇더라도 아름다운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꽃피고, 쌀독이 찬 후에야 예의를 아는 것이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인 것이다. 도대체 먹지 않고 사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오늘도 나는 먹는다. 그리고 배설한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이 행위를 통해 나는 목숨을 유지한다. 사람은 음식과 가장 완벽한 사랑을 나눈다. 음식은 말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람에게 준다. 오늘도 우리는 자연의 위대한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고, 열매가 맺히고, 사람이 그것을 먹는 것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 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근심스럽기만 하다. 책의 제목을 소월의 시에서 빌려온 것은 소월이라는 시인은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다간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이 우리에게는 노래가 되었듯이, 나의 글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고맙겠다. / '서문' 중에서

연애 감정

푸른 연금술사의 사랑 낙엽이 불에 잘 타는 이유는 물기가 메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신록과 녹음의 시절이 지나 이젠 나도 건조해져서 어디서건 떨어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마음은 예민한 감정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니 달팽이가 지나간 촉촉한 자리 같기도 하다. 땀과 눈물의 세월 탓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유를 확장해 나가니 밤하늘에 별이 빛나거나 파도가 바위에 포말 치는 이유도 다 하늘의 어둠과 바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구름바지를 입은 시인의 말처럼, 그 누구라도 청춘의 상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바치고 싶었다. 비단 중년이라는 생물학적 나이 때문이 아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연애 감정을 잘 간직하고 산다면 인생이 덜 비참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쓰고 싶었던 연애 감정의 속살이다. 피부와 달리 속살은 만지면 아프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피부가 벗겨진 살처럼 추하고 더럽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때 품었던 감정은 더 어려운 인생을 살면서 용기를 주는 순수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청춘의 피부 위에 우리는 미당의 푸른 꽃과 붉은 꽃을 문지르면서 살아온 것이다.

오늘만은

새벽 동이 틀 무렵 숲 속에서 나비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화려한 날개를 접고 아침 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나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보다 저절로 탄성을 터트렸습니다. 이슬이 날개에 방울져 맺혀 있는 모양이 세상에 저런 보석이 있나 싶더군요. 날개는 물론이고, 날개에 돋은 솜털에도, 눈에도 더듬이에도 다리에도 온통 이슬이었습니다. 밤새 저 자리에 앉아 온전히 이슬을 받아내고 있는 모습에 혼이 빠져 있는데, 축축한 풀밭에 엉덩이가 다 젖었습니다. 그렇게 아침볕에 이슬이 다 증발하자, 나비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득한 가을 하늘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 실린 글들이 저 나비의 이슬방울 같았으면 하는 심경입니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마음에 맺힌 것들, 그것들을 담담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살다보면 나비처럼 이슬을 말려주는 햇볕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내 곁의 사람들이 그런 햇볕인지도 모르지요. 볕이 없다면 나비는 날개가 젖어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도 저 나비의 날개와 다름없지요. 누구나 이슬 같은 감정이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그걸 품고 털고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뭐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도 그저 착하고 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울한 요즘, 잠시 숲속에서 보았던 나비, 이슬, 그리고 햇볕. 이런 마음을 당신에게 선물합니다. 때가 되면, 철이 되면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갑니다. 상처는 아물고, 아픈 기억이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친구야 같이 가자, 힘들면 내 등에 업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시집을 엮으면서 읽고 있는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시인의 시는 시인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붕어빵이었다. 혹시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시를 읽고 느끼는 분위기 자체가 시인이라고.

친구야 같이 가자, 힘들면 내 등에 업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시집을 엮으면서 읽고 있는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시인의 시는 시인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붕어빵이었다. 혹시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시를 읽고 느끼는 분위기 자체가 시인이라고.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