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연초부터 두 달 동안 안성도서관에서 고은 시인의 시 전집을 읽었다. 그때 발견한 여러 편의 시 중에 하나가 5대 가족이었다. 숨겨진 보물창고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는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내 마음은 벌써 티베트 고원 바람 부는 벌판에 가 있었다. 80년대 말 고은 시인의 시에 판화 작업을 두어 점 하였지만 발표되지 않았는데, 그때의 인연이 작용한 것일까? 지난번 동시집에 이어 이번에는 그림책으로 만나게 되어 설레고 기뻤다.
취재차 방문한 티베트의 대자연은 새벽처럼 서서히 다가온 것이 아니라 마치 몇만 년 동안 대지 속에 파묻혀 있던 거인이 쿵 하고 벌떡 일어나듯 어느새 내 눈앞에 닥쳐왔다.
나무 한 포기 없이 메마르고 건조한 산은 만지면 부스러질 듯하고 거대한 공룡의 늙은 껍질처럼 드러난 알몸의 산등성이에는 야크와 양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근방에 텐진과 5대 가족이 유목의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지구상에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소박하게 살아가는 유목 생활은 관광객의 눈에 비치듯이 낭만적이거나 자유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숨쉬기도 어려운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일 것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겨우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어려운 삶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여섯 살배기 텐진의 눈에 비친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새끼양의 탄생 앞에서 생명의 파동을 느끼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와 소통하고 대자연의 거룩함에 고개 숙이며 다음 날은 다른 풀밭을 찾아가는 유목의 풍경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자산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야생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만나서 독자의 마음속에 환상적이고 놀라운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이의 마음속 깊이 저장된 상상의 에너지는 험난한 인생의 길을 헤쳐나가는데 작은 별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십년 전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의 한 권으로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을 그린 뒤로 그 책의 마지막 장면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왔습니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그 바람의 일부를 이룬 오늘, 《봄이의 여행》을 발표하면서 이 책의 마지막 장면 또한 또렷한 현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벌써 30년이라니!
출간 30주년을 맞은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보니 기쁘고 대견합니다. 출간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이렇게 잘 성장하여 축하의 시간을 갖게 되다니….
그 사이 솔이의 모델인 딸아이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멋진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던 젊은 아빠는 손자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할배가 되었습니다.
사람도 풍경도 그 시절의 풍속도 모두 시간 속으로 흘러갑니다. 그 시절 명절마다 벌어지는 행렬을 보며, 그 행렬을 따라가면 무언가 흥겨운 일이 기다릴 것 같은 생각이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추석의 본질은 다섯 살 솔이가 오백 살 먹은 고향 마을 고목나무와 인사하는 것이고, 할머니를 만나서 반갑게 껴안는 것이고, 친척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싸 주신 선물 보따리를 풀어 보며 사랑의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이야말로 추석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의 명절 풍경은 이미 잃어버렸거나 잊히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런 소중한 것들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그림책을 만들었습니다.
오래전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힘써 주신 고 신경숙 선생을 그리워하며, 길벗어린이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