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평론집을 묶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원고 청탁이 있으면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고, 글들이 모였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1부의 글들에는 문학을 향한 내 처음 마음자리가 있는 것 같다. 김윤식, 서정인, 윤흥길, 김종철, 황석영. 이름들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생각과 언어가 내게는 문학이었다. 필립 로스를 읽으며, 내가 문학에서 찾고 있던 게 삶의 구체성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현실의 삶에서는 그것들이 만져지지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
2023년 봄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집안의 막내인 초등학생 양양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열심히 찍는다. 아이는 그렇게 찍은 사진을 곤경에 빠진 삼촌에게 건네며 말한다. “삼촌은 삼촌의 뒷모습을 못 보잖아요. 그래서 내가 도와주려고요.” 우리는 아이의 맑고 천진한 마음을 통해 예사롭게 지나치던 진실과 맞닥뜨린다. 영화가 감동적으로 환기하는 ‘우리의 뒷모습’은 우리의 앎이 온전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대한 지시와 은유로도 은근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一) 이(一)’라는 영화의 원제에 대한 생각으로도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나눌 수 없는 ‘하나(一)’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하나와 하나가 모인 ‘둘(二)’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살아가는 이유의 더 끈덕지고 소중한 차원이 있는 듯하다. 사회나 관계, 연대 등의 큰 언어로 말해버리고 말기에는 그 ‘둘’의 이야기는 너무 사소하고 때로 너무 번잡하기도 하다. 자주 문학이나 영화의 이야기에 몸을 기울이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당위의 목소리로 할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만원버스 안에서 일어나는 ‘무게’의 놀라운 전환도 ‘밀어붙이는 무게’의 이상한 당혹을 제대로 겪고 나서야 오지 않던가. 산문집 제목을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로 붙인 소이다.
이번 산문집에 묶인 글들도 주로는 신문에 칼럼 형식으로 발표된 것들이다. 간혹 글의 온도가 상승했다면, 지면이 주는 공적인 부담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 부담이 꼭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싶은 게, ‘서로의 등’처럼 평소라면 잘 가닿지 않는 곳까지 내 생각과 느낌을 확장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세편의 에세이를 함께 수록했는데, 세 감독의 영화는 내게는 언제든 따라가보고 싶은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소설읽기는 내게 실생활의 어떤 결여를 보상하는 정신적 허영의 계기였던 것 같다. 그 허영이 종내 소서에 대한 글쓰기에까지 나를 부추겼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렇긴 해도 좋은 소설과 문학은 그런 허영에 대한 반성의 계기 또한 언제나 한주먹씩 되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