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산천이 곧 책이고 길(道)이고,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사물이 나의 스승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는 니체의 말이나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라고 노래한 서정주 시인의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때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보다 이 땅에 대한 열정으로 진정한 '연애', 즉 사랑이 시작되었고, 그 사랑 때문에 이 나라 산천을 지치지 않고 떠돌 수 있엇다. 하지만 나라 곳곳을 떠돌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엔 시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들지 않고 사화산처럼 남아 있어 가끔씩 정신을 들쑤시고 일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300~400편의 시 중 한 편을 골라 읊조리기도 했다.
산길이나 다른 길과는 달리 강은 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예를 든다면 부여 부근 '지천'의 하류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금방 건널 수 있는 길은 두 시간이 넘게 돌아가기도 했었다.
하릴없이 "돌아가는 것,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면서 에돌았던 그 길이 꿈속처럼 아슴푸레 떠오르지만, 힘들었던 만큼 즐거움 또한 많았던 것이 금강답사였다. 옥천군 이원면의 적등진 나루 근처 빈집의 화장실에 빨간 페인트 글씨로 씌어져 있던 "바로 여기가 쉬"라는 글이나, 공주 공산성 올라가는 길,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3대가 망하리라"라고 씌어 있던 안내판은 걷기에 지친 우리들에게 잠시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한 수많은 산행을 통해서 체득한 것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산에 오를 수 없고 그 산행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 역시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올라야 할 산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고 내 발길을 기다리는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서문 중에서)
그러한 수많은 산행을 통해서 체득한 것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산에 오를 수 없고 그 산행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 역시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올라야 할 산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고 내 발길을 기다리는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서문 중에서)
우리 국토를 본격적으로 주제로 잡아 답사를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길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답사 중에 찾아갈 현장이 아스라이 떠올라 설레는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머리맡에 놓아 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을 펼치고 답사해야 할 곳들을 들여다보면 잠은 저만치로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막상 가서보면 그처럼 번성했던 고을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반면에 예전에는 불모의 땅이라 여겨지던 곳들이 빌딩과 아파트 숲이 들어서며 땅값이 폭등하여 황금의 땅으로 변모해 있기도 하였다.
변하고 또 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 특별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애잔한 상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곳들이 바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군현(郡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1914년 이후 사라진 군과 현의 쇠락한 모습이었다.
우리 국토를 본격적으로 주제로 잡아 답사를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길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답사 중에 찾아갈 현장이 아스라이 떠올라 설레는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머리맡에 놓아 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을 펼치고 답사해야 할 곳들을 들여다보면 잠은 저만치로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막상 가서보면 그처럼 번성했던 고을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반면에 예전에는 불모의 땅이라 여겨지던 곳들이 빌딩과 아파트 숲이 들어서며 땅값이 폭등하여 황금의 땅으로 변모해 있기도 하였다.
변하고 또 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 특별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애잔한 상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곳들이 바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군현(郡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1914년 이후 사라진 군과 현의 쇠락한 모습이었다.
우리 국토를 본격적으로 주제로 잡아 답사를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길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답사 중에 찾아갈 현장이 아스라이 떠올라 설레는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머리맡에 놓아 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을 펼치고 답사해야 할 곳들을 들여다보면 잠은 저만치로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막상 가서보면 그처럼 번성했던 고을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반면에 예전에는 불모의 땅이라 여겨지던 곳들이 빌딩과 아파트 숲이 들어서며 땅값이 폭등하여 황금의 땅으로 변모해 있기도 하였다.
변하고 또 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 특별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애잔한 상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곳들이 바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군현(郡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1914년 이후 사라진 군과 현의 쇠락한 모습이었다.
1974년에야 동학(東學)을 알았다. 김지하 시인의 시집 『황토』에서 ‘녹두꽃’을 읽으며 1894년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커다란 사건 ‘동학란’이란 그 아픈 역사를 처음으로 알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주도에서 신제주 건설의 역군(육체노동)으로 일하고 돌아와 큰 아픔(간첩 혐의를 받아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을 겪었던 그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이곳저곳을 걷고 또 걷다가 1980년대 중반 포장이 되기 전이라 먼지만 풀풀 날리는 동학의 현장 답사를 하였다. 그때 동학이 “난(亂)”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 본격적으로 동학을 공부해 보려고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한 경주의 용담정을 답사하고 돌아오던 그때였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지만 오리무중같이 보이지 않았던 글에 실마리가 보였다. 동학을 주제로 『그 산들을 가다』라는 책을 내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나의 글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
2020년 12월 초하루
온전한 땅 전주에서 - 들어가는 말
사람이 다니는 길은 여러 가지였고 그 길마다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옛 길을 걷는 마음은 처연하다 못해 서러울 때가 많다. 지난 2004년 4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 3주에 걸쳐 12일 동안 삼남대로를 걸었으니, 벌써 3년도 더 된 일이다. 하지만 그 서러움과 안쓰러움이 지금껏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나의 발길이 지금껏 이 땅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몇 시간이면 주파하는 빠름을 선택하지 않고 열나흘 동안이라는 느림을 선택하는 순간,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아 보이던 수많은 사물들이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 잊혀진 줄 알았던 역사와 문화가, 이 땅의 자연환경과 소멸되었던 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경이의 순간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추통춘이(구동준이)'란 말이 있다. 그 말은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놔두기로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이라는 말이나 '차이가 있는 것은 그대로 놔두자'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그윽하면서도 명료하지 못한 슬픔이라고 쓴다.
슬픔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내가 줄곧 말하지만 정작 슬픔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가 될 것이다. 진정 언제쯤이면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 제목처럼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쓸 날이 올 것인가? 슬픔은 매일 저렇게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데, 슬픔의 기억은 언제까지 눈물을 자아낼 것인가?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뛰어난 천재로 평가했던 정여립, 서인 측의 송익필, 알성 급제를 했던 이발, 그리고 정철, 그들은 당파나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공존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러한 시대 상황이 피의 역사인 기축옥사를 불러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축옥사는 16세기 조선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자료를 수집하고 원고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드러나지 않던 정여립과 기축옥사의 실체가 어느 순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서인측이 정여립을 일컬어 "넓게 보고 잘 기억하여 경전을 관철하였으며, 논의는 격렬하여 거센 바람이 이는 듯하다"라고 했던 것이나, 당시 전주부윤이자 당파가 달랐던 남언경이 "정공은 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 이 시대의 주자와 같다"고 했던 말을 접하면서 정여립과 기축옥사의 현장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갈 수 있었다.
..몇 년 동안의 산고 끝에 한 권으로 내놓는 이 책이 얼마나 그 역사의 진실 자체에 근접했는지, 그리고 기축옥사나 대동사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 얼마만큼의 몫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내 나름대로 이 400년 전의 진실의 실체 한 조각만이라도 쥐어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답사 때에도,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도 동래 정씨 족보에서조차 지워진 채 400여 년 동안 구천을 떠돌고 있는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내 곁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우리 현대인은 놀 줄을 모른다. 노는 방법을 모르다보니 밥 배불리 먹고 술 마시고 2차를 가서 '돈 받고'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돈 주고' 노래를 부른다. 그나마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곡에서부터 가요 또는 팝송까지 그래도 몇 곡씩은 할 줄 알았는데 노래방 세대가 되다보니 노랫말이 화면에 뜨지 않으면 노래 한 곡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악쓰고 춤추는 사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