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월, 기억의 빈자리
80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와 주먹밥을 지어, 트럭에 탄 아저씨와 형들에게 주는 모습을 보았다. 물을 마시고 나를 보고 웃었던 것 같은데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되었으나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파편이다. 0월, 우리는 창문을 이불로 가렸다. 소리가 나갈까, 여린 숨소리도 아꼈다. 소문으로 거리가 뒤숭숭해지자 우리 가족은 나주로 피난을 갔다. 엑소더스, 불안한 탈출이었다. 나는 총에 맞아 벌집이 된 자동차를 보았다. 선명한 총알 자국이 기억에 남았다. 다시 광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락방에서 혼자 놀았다. 밖은 두려운 공간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농성동 성당에서 광주 5·18 비디오를 보고 울었다.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상어 떼에게 청새치를 빼앗긴 노인이 외친 말을 기억한다. ‘인간을 파멸시킬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광주는 패배하지 않았다. 불의한 신군부에 물러서지 않았던 광주의 정신은 올곧은 정신으로 우뚝 서 있다. 광주는 깃발이다.
이 시집을 통해 나는 패배하지 않은 정신을 말하고 싶었다. 5·18기념재단에서 간행한 <그해 11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에 나온 희생자 증언을 시를 엮었다. 최대한 사실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미숙하고 미욱한 부분은 널리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이 시집의 내용은 2014년에 열린 ‘그해, 오월전’의 내용을 참고하였으며 담당자와 연락을 통해 에서 간행한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1, 2권, 한얼미디어, 2005) 책에 나온 당시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분들의 활동과 증언집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5·18 희생자분께 다시 한번 고개 숙인다. 0에 총소리, 구멍 난 가슴, 울음, 공동체, 망월, 광주, 역사, 진실, 희망을 담고 싶었다.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도는 강강술래이기도 하고 환한 보름달이기도 하고 혼을 그리는 풍등이기도 하다. 0월은 비참의 밑바닥과 분노와 애탐과 슬픔을 넘어 희망과 통일과 평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자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다. 이 시를 0월의 영전에 바친다.
소설을 쓰는 과정이 사실은 직지였다. 소설을 쓰면서 문자에 좀 더 민감해졌고 우리 선조들의 도전 정신과 한글에 대한 사랑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과정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여름 한 철을 직지에 매달렸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나에게 온 사랑을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인장을 찍듯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몰려왔다. 모처럼 느껴보는 희열감이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녘에 날아오르듯 마침내 완성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완성도 결국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았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손가락 지문으로 글자판을 두드리며 퍼즐을 풀어가는 일은 무지한 나를 깨워 진실에 다가서는 일이었다. 과거의 조각들을 찾아 미래를 밝히는 일에 나는 미력한 힘이라도 얹고 싶었다. 퍼즐을 풀면서 여러 개의 계절이 지났다. 나는 수차례 길을 잃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곤 했다. 『퍼즐』을 묶어 푸른사상사에 보내면서도 나는 아직 4·3에 머물러 있다. 창밖에는 들국화가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