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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권미영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

최근작
2023년 3월 <온유와 잔혹의 마블링>

목화밭, 말 거는 별

신선처럼 황홀히 고아처럼 슬프게 글을 썼다 물도 잘 솟고 해도 잘 내리쬐는 산골동네의 지붕이 단단하고 벽이 두툼한 집이었다. 창망한 하늘에 할매모습 같은 흰구름과 장대비, 까불까불 팔랑이는 눈, 시커먼 밤허공 구경을 모두 할 수 있어야 했고 떡갈나무 두어 그루 있어 가을이면 툭, 떨어지고는 버스럭버스럭, 바닥에 구르며 떠나가는 잎사귀, 그 마지막 한 잎까지 배웅할 마당도 필요했다. 제 알아서 자라고 열리는 푸성귀, 과실을 거둬먹는 일만으로도 안에 보다는 밖에 더 오래 있었다. 방안에서야 숨 멎는 날 상상하기 같은 거 외에는 별 할 게 없었다. 그 집에서 삼백 년을 살 계획이었다. 어떤 사내에게도 살갗을 드러낸 적 없이 고요히 있다가 스물 서넛 무렵에 5월 보리같이 청순한 총각을 만나 되도록 많은 아이, 7남매를 넘어 낳았다. 사랑은 숲의 나무처럼 당연해서 그 속에 파묻혀 머물면서 그 말은 일생동안 입 밖에 한 번 내어보지 않았다. 자식들이 제 자식과, 그 자식이 또 제 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지붕 단단하고 벽 두툼한 내 산골집. 그 집에 삼백 년이 다가오고는 장맛비 쓸어가듯 지나갔다. 그리고 또 새로이 삼백 년이 시작되고… 몇 삼백 년이 더 가고가야 나는 존재를 멈추려나. 멈추기나 할까? 예전에 예전에 그 오래 전의 내 모습은 이제 내 기억에는 없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나는 그래서 ‘나’라는 명칭으로만 나를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붕이 단단하고 벽이 두툼한 나의 산골집만은 잊지 않음으로써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과 그들의 삶을 아주 찬찬히, 늘 지켜본다. 순결한 남녀들, 말이 필요치 않은 충분한 사랑, 터전에의 애착, 주렁주렁 이어지는 탄생…. 실체로 살았던 내가 한평생 숭앙했던 것들이다. 나와 동일한 마음풍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후손들을 보면서 나는 존재에의 싫증, 존재의 멀미를 삭힌다. 그리고, 이태째 세상을 들쑤시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에서도 춘삼월에 부산까지 왕림해 <목화밭, 말 거는 별> 출간의 첫 장을 열어주신 곽혜란 선생, 삼복 무더위에도 의연하고 부지런히, 그리고 예리하게 편집을 맡아주신 김지희 팀장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온유와 잔혹의 마블링

2023년 봄 통신 해변대로를 가운데 두고 이편은 바다와 허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저편은 번창한 도시이다. 이편 사람들은 저편 사람들의 모든 의미를 초월하고, 저편은 이편의 신비를 죄다 불신한다. 저편은 단숨에 소멸할 수도 있으나 영광을, 이편은 지리멸렬하나 장구한 전설을 소중히 여긴다. 이편은 어처구니없이 때늦은 순수를 발산하는 백발의 아이, 저편은 물을 뿜어 올리지 못해 싯누렇게 시들마른 상록수. 이편은 노인, 별것 아닌 사건과 이야기들로 가득 찼고 저편은 젊은이들, 수두룩하고 시끄럽지만 공허하다. 이편의 노인은 노상 벙긋거리며 뭔가를 동경하는 눈빛을 번쩍인다. 저편의 젊은이에게 긍정이란 미지의 낱말이고 현실은 거부의 객체이다. 노인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지만 단연코 우아하다. 젊은이는 휘파람 불 듯 욕설을 내뱉고 당연 천잡하다. 길이로 보자면 이편은 장대, 저편은 아이스케키의 막대기에 불과하다. 즉 노인의 시간은 길고 젊은이의 시간은 새벽의 일출 찰나만큼이나 짧다. 양쪽은 ‘영영 평행’으로, 다시 말해 ‘항상 나란히’인 채 오래전부터 지금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여러 날의 매일을 지날 것이다. 어쩌면 이편의 세월이 무궁무진할 것도 같은 아둔한 환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저편은 이편에 다다른다. 이편에 오면 저편에서 행사한 것이 착오와 무례와 비정함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그 각성이 수치심으로 둔갑할 때의 당혹감은 충격적이다. 한참을 당황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편, 바다와 허공이 대부분인 곳에서는 공유와 환대의 OTP토큰이 된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노인이 반드시 장착해야하는 필수아이템인 것이다. 노인은 이 수치심을 원동력으로 꽤나 긴 여정을 하고 바다와 허공에 섞여들면서 여정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홍로사과색 붉은 입술과 겨울밤의 숲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져본 적 있었음을 증명해주던 친구들이 여름날의 능소화라든가 가을 마로니에 잎사귀와 함께 투둑툭, 떠날 때마다 마음은 자꾸 헐렁해져서 마침내 텅 비어 그리움도 없어진다. 노인을 사로잡는 건 오직 기다림이다. 천천히 기울던 몸은 더 이상은 휘어지지 않고 바다와 허공에 걸쳐있다. 바다와 허공에 절반의 몸뚱이를 맡기고부터는 바다와 허공, 그 자체가 되고픈 동경이 간절하다. 꿀을 맛본 듯, 촛농이 닿은 듯 분명하게 드러내던 감성이 사라진다는 것, 검버섯과 주름투성이로 젖은 채 구겨진 신문지 같은 얼굴. 쇠약하고 굼뜬 팔다리…. 이 모든 게 노인에게는 너무도 다행이다, 축복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슨 미친 소리냐며 날뛰는 저편의 젊은이여. 진정하게나. 그리고 차분히 생각해보게) 모든 역동하는 생명은 반드시 멈추는 시점이 온다. 사멸은 타고난 운명이다. 사멸의 시점에도 여전히 홍로사과색 붉은 입술에 숱 많은 검은 머리 그대로라면 그 용모와 에너지가 아까워서 어떻게 사멸할 수 있겠는가, 억울하게 절명하는 사형수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숨이 멎는 순간까지 죽기 싫다고, 죽을 수 없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겠지. 이편이고 저편이었던 우리의 존엄은 우리 죽음이 위엄을 갖추었을 때 완성되는 거 아닌가. 저래서야 숭고한 사멸이 되겠는가. 우리의 소멸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비로소 때에 이르러 정성을 다해 받잡고 기꺼이 소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허공에 저편의 기억을 부드럽게 희석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노인은 그토록 소원하던 소멸을 맞이한다. 바다가 되고 허공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의 소망에 따라 붙는 그 지독한 불확실성과는 달리 노인의 여정에서 이 간곡했던 소원은 너무나도 엄정하게 반드시 이루어진다. 소멸의 기쁨을 기다리는 것을 인내로 여기지 않고 즐길 수 있다면 노인은 인류 중에 가장 행복한 부류이다. 이편도 저편도 지금은 봄. 모진 추위도 찌는 무더위도 없이 취할 듯 살랑대는 바람에, 볕은 친절하고 꽃과 구름이 한껏 사치스러운 이 좋은 계절에 저편의 젊은이에게 이편의 노인이 안부를 전하는 바이다. 아울러 이 광활한 절대의 진리를 잊지 않기 바란다. 젊은이에게 노인이 가장 친애하는 원수인 까닭은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이기 때문….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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