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종교/역학

이름:변승우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최근작
2024년 8월 <로마서 7장 14-25절의 현재시제와 삽입구에 대한 사이다 설명!>

이 저자의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무브범
2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newc...
6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근자씨
7번째
마니아

12

(특별기획) 다문화TV 초대석-인터뷰 전문

지난해부터 다문화TV에서 매주 주일 저녁 7시에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방송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시청하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문화TV 대표님이 분당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에 이어 담임목사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본방송은 2023년 3월 12일 오후 4시에 있었고, 3월 16일 오후 1시 30분과 17일 오후 3시 30분에 두 번 재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보여주고, 특히 담임목사님에 대한 거짓 소문과 오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입니다. 방송만 하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교회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소책자로 만들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큰글씨 어른용]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

『거룩한 경고』라는 책에서 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대부분 진정한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진정한 거듭남이 없는데도 거듭났다고 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여전히 죄악과 이 세상의 탐욕 가운데 살면서 스스로 거듭난 상태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거짓 설교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엄청난 비극이요, 위험이다.” 저는 이 설교를 타교회에 가서 처음 설교했을 때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아주 작았고, 규모가 있는 노회장님 교회에 가서 이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엄청 충격을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노회장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 목사님이 한 번 설교로 우리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성도들이 변 목사님에게 푹 빠졌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옳습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한 진리니까요. 그렇더라도 그렇게 설교하면 교회에 누가 오겠습니까? 누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때 저는 목사가 진리냐 아니냐? 그리고 성도들의 영혼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머릿수를 더 생각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목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솔직히 이것이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을 보는 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소책자의 원고를 탈고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라는 본서의 원고를 서둘러 탈고한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교회 안의 명목상의 신자들을 깨우고 구원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 시대는 세상에서 전도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전도해야 할 정도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을 적절히 사용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작은 책을 통해 교회 안에서 다수가 되어버린 명목상의 신자들이 깨어나게 하소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개신교의 아킬레스건이 된 칭의의 교리

개신교의 미래와 영혼들을 위하여 쓴 책! 저는 항상 당대가 아니라 50년 100년 아니 수백 년 후의 기독교를 생각하며 설교하고 책을 씁니다. 저는 히스기야 왕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여러분 모두 김형석 교수님을 아시지요! 그분은 1920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하버드대학교의 연구교수를 역임한 100세가 넘는 노교수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책을 쓰셨는데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이 제목이 얼마나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는지 모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라고 쓰여 있고,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정신적으로 사회 상위권을 차지했다. …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중위권 정도로 떨어진 느낌이다. … 앞으로 100년 동안 지금과 같은 현상이 계속된다면 … 기독교인의 사회적 위상이 하위권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는 교회 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사회 지성인들은 교회를 외면한 지 오래다. … 우리도 그들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슬프게도, 노교수가 목회자나 신학자들보다 더 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지구를 생각하면 고민이 됩니다. -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이슬람교의 공격적인 포교와 확산! - 가증스러운 동성애의 창궐! - 그와 함께 깊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비정상적인 적대감! - 아시아 나라들에 만연되어 있는 우상숭배! - 환경이 좋고 잘사는 나라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짐승 같은 무관심! 그러나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기독교입니다! - 종교다원주의에 물들어 이교가 되어버린 가톨릭! -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오래전 교회의 공동묘지가 된 유럽! - 동성애자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교단이 늘고 있는 배교 중인 미국! - 전에 부흥의 불이 활활 타올랐지만 재가 된 중국 가정교회! - 맨하탄의 고층 빌딩만큼이나 세계적인 큰 교회들이 모여 있지만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불신자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한국 교회!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를 보아도 절망뿐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현재 위기입니다. 아니 전 세계 기독교가 위기입니다. 기독교 전체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너무 어둡습니다. ‘과연 기독교는 회복될 수 있을까요?’ ‘다시 부흥할 수 있을까요?’ ‘어두운 기독교의 미래를 밝게 할 방법이 있을까요?’ 김형석 교수님은 사랑의 실천이 방법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진짜 답은 진리의 회복입니다! 진리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진리 회복이 없으면 다수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개신교 안에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진리를 이 책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주여, 기독교의 밝은 미래와 뭇 영혼들을 위하여 이 책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허무는 마귀의 교리, 은사중지론!

은사중지론의 근거지인 달라스 신학대학의 구약학 조교수를 지낸 잭 디어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새로 믿게 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한 권을 주고 방 안에 가둔 다음, 성경이 치유와 기적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연구하라고 말한다면, 그는 결코 은사중지론자가 되어서 그 방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은사중지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은사중지론을 신봉하는 한 선교사가 선교를 하다가 박해가 일어나서 급히 피했습니다. 훗날 문이 열려 선교지로 되돌아간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의 은사와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성경을 읽었던 원주민들이, 성경에서 방언과 예언과 기적에 관하여 읽고 구하여 성경 그대로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래전 책에서 읽은 실화입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 잘 압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방언을 부정하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나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은 까닭에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사모하고 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마귀가 전 교단의 눈을 가리었다”고 한탄했습니다. 실제로 은사중지론이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고 다수가 그 영향 아래 있습니다. 은사중지론은 비성경적인 교리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윌리엄 데알테가가 쓴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이라는 책에 보면 “기적 종료주의 와 유럽 기독교의 붕괴”라는 장이 나옵니다. 그 첫머리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요즘에서야 그 진상이 밝혀지고 있지만, 기적종료주의 교리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북유럽 신교의 쇠퇴와 몰락이었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은 개혁주의 교회가 복음에 충실함은 유지하려 했으나, (치유와 같은) 기적이나 영적 체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적이나 영적 체험은 성서적 영성에 본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번성했던 유럽이 교회의 공동묘지가 된 것은 은사중지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폐해를 생각할 때 은사중지론은 비성경적인 것을 넘어서서 악마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은사중지론이 비성경적인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함으로써 그것을 교회 안에서 뿌리 뽑고자 합니다.

나는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있는가?

저는 최근 몇 년간 주로 뛰어난 주석과 강해집을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 존 웨슬리나 로이드 존즈를 통해 배운 산상수훈에 나타나 있는 구원론이, 단지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자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산상수훈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약 한 달간 독서에 집중하며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많은 학자가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상수훈은 단지 가장 뛰어난 설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 복음과 진리들의 핵심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설교입니다. 오늘부터 저는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교인 산상수훈을 설교해나갈 것입니다. 1. 저는 산상수훈 본래의 의미에 가장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2. 저는 산상수훈에 드러난 구원론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3. 저는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 산상수훈의 의미를 제대로 설교하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고 깊은 회개를 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처럼 대강 자기를 살피고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저는 최근 몇 년간 주로 뛰어난 주석과 강해집을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 존 웨슬리나 로이드 존즈를 통해 배운 산상수훈에 나타나 있는 구원론이, 단지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자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산상수훈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약 한 달간 독서에 집중하며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많은 학자가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상수훈은 단지 가장 뛰어난 설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 복음과 진리들의 핵심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설교입니다. 오늘부터 저는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교인 산상수훈을 설교해나갈 것입니다. 1. 저는 산상수훈 본래의 의미에 가장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2. 저는 산상수훈에 드러난 구원론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3. 저는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 산상수훈의 의미를 제대로 설교하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고 깊은 회개를 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처럼 대강 자기를 살피고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지난주 추석도 다가오고 해서 초등학교 때 저를 전도하신 목사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보니 유명한 가수였던 윤항기 목사님이 만든 찬양신학교가 눈에 띄더라고요. 여러분, 그분이 부른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 다 아시죠? 그 노래에 나오는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가사처럼 그리스도인은 정말로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2) 존 웨슬리는 “얼굴을 찌푸린 경건은 악마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또 로이드 존스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참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루퍼스 모슬리에게 예수님도 웃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로 하여금 웃으며 생활하게 합니다.” 하천풍언 박사는 중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상인처럼 걸어다닐 수 있다. 왜냐하면 기쁨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밤에도 기쁨, 낮에도 기쁨, 기도 중에도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오랜 기간 동안 연구 조사한 끝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여섯 배나 더 행복하다.”는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실제로 행복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의 농도가 여섯 배나 더 강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가 진짜라는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속에 있는 행복이 얼굴에 드러나야 하고 그것이 세상을 향하여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도 그러합니까?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딤 3:1-4) 그러면서 슬쩍 이 불신자들 틈에 명목상의 신자들을 끼워 넣었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 3:4-5) 왜냐하면 그들 역시 교회에 다니지만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또한, 존 라일은 “행복”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신앙의 주요한 시험은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가?’입니다. … 행복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음은 하나님의 눈에는 절대로 옳게 보일 수 없습니다. 내적인 평화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안전한 상태에 있을 리 없습니다… 행복에의 길과 구원에의 길은 같은 것입니다.” 행복은 참된 시금석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마음에 지옥이 있는 자는 지옥에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만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우리도 기쁨을 얻습니다. 때문에 행복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행복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보통 저는 책을 쓸 때 계시적으로 씁니다. 제가 어떤 책을 쓰겠다고 해서 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홀연히 어떤 주제에 대해서 깨달아지고 그 깨달음이 서론, 1장, 2장, 3장, 결론 등 형태를 갖추게 되고, 그것을 책으로 내라는 감동이 오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지혜와 그동안 읽었던 독서 자료들을 활용하여 책을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저는 성령님으로부터 어떤 깨달음이나 요약된 형태의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 자신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우리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서로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므로, 새 계명에 대해서 설교하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는 뚜렷한 영적 자각을 느꼈을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영으로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새 계명에 대한 구절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음이 왔고 이 책의 메시지가 제 안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새 계명에 대한 책을 쓰라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본서입니다. 왜 성령님께서 저를 그토록 강권하셨을까요? 그것은 새 계명을 지키는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절박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주님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하고 은혜로운 초청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여러분은 이 설교를 통해 처음으로 영과 혼에 대한 속시원하고 후련한 설명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또한, 덤으로 거듭남과 성화에 대한 더욱 성경적인 가르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게 영과 혼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깨달음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는 단지 영과 혼에 대한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변적인 설교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실제로 큰 도움이 되는 매우 실용적인 설교입니다.

믿음으로 자백하라!

유명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요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전에 유언을 했습니다. 그가 한 유언은 묘비에 새겨졌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용서받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더구나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여기서 ‘사망’은 단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라 불리는 지옥형벌을 의미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놀랍게도 이것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에게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마 7:21, 고전 6:9-10, 갈 5:19-21). 그러므로 신불신을 막론하고 가장 기쁜 소식은 죄 사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불신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백을 통해서 용서를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이단사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을 때 과거 현재 미래 죄가 다 사해졌는데, 왜 자꾸 회개기도를 하느냐?”고 하면서 자백을 반대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원관이 변질되다보니 목사들 중에도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는 순간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는다는 주장은 비진리입니다. 그것은 본문과 절대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백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무엇으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성령세례는요? 역시 믿음으로! 치유는요? 믿음으로! 축사는요? 믿음으로! 기도응답은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처럼 모두 믿음으로 됩니다. 그런데 자백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백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지만 믿지 않아 구원을 못 받고, 치유 기도를 받았지만 의심 때문에 치유받지 못하는 것처럼, 자백하고도 죄 사함이 믿어지지 않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찰스 프라이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교리적인 사실로는 쉽게 믿으나, 실제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믿으나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해서는 극도로 믿기 힘들어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여행, 설교, 상담 등을 해오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으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큼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았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의식의 공격을 받았으며, 때로는 같은 죄에 대해 거듭거듭 자백을 하고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한 여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성이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는 30여 년 전인 십대 후반에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죄책감은 필시 더 심했던 것 같았습니다. 30년 동안 그녀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거의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30년 전에 지은 그 죄에 대해 자백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자기가 무자격자라는 느낌 때문에 어떤 책임도 맡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고,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도 있었지만, 죄책감 때문에 그 일을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그 죄 때문에 자기가 좋은 아내와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병이 들었는데 의사는 치료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에 병의 원인은 분명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라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녀와 동일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적으로는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녀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죄책감은 필시 더 심했던 것 같았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십자가 우편 강도, 핍박자였던 바울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것은 믿기 전에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고 난 후 큰 죄를 지은 경우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심어준 비정상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기 전에 지은 죄나 믿은 후에 지은 죄나 죄는 죄일 뿐이고 모두 예수님의 피 공로로 사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원수였을 때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면 자녀들의 죄는 더욱 용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잘못된 인식을 버리고 자유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이비드 씨맨즈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모든 용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용서”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으로 자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의 말씀 바로 알기!

저는 최근에 티 엘 오스본이 쓴 『능력으로 역사하는 메시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서두에 나오는 간증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이 경험들을 통해 티 엘 오스본의 사역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책의 몇 장 뒤에 보면 그의 사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로 인도에 갔을 때 … 우리는 아직 우리의 가르침을 확증할 기적의 비결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갈망했다. 그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셨고, 성경은 내게 살아 있는 책이 되었다. … 주님께서 내게 나타나신 후, 우리 삶의 초점이 새로워졌고, 우리의 다음 해외 선교지는 카리브 해의 섬나라 자메이카가 되었다. 우리는 13주 동안 거기서 사역했다. 귀가 들리지 않거나 말을 못하던 125명이 치료되었고, 완전히 눈이 멀었던 9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보게 되었으며, 다리를 절거나 걷지 못했던 수백 명이 회복되었고, 가장 뜻깊은 것으로서 약 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기적이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 자메이카의 믿음의 모험 이후, 우리는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는데, 서구 기독교 세계만이 아니라, 수십 개의 비기독교 국가들에서 복음을 전해오면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똑같은 기적적 결과들을 체험했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목격한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회상할때,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말하고 싶어진다.” 여러분, 당장 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싶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라고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읽은 그 책의 내용은 진짜 성경을 잘 알거나 균형을 충분히 잡고 있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이 그분을 그렇게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쓰신 것을 볼 때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책은 저에게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서 진리를 길어 올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여러분과 나눌 것입니다. 얼마 전, 집요할 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반기독교적인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제 발언 때문에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성도님들이 보여준 성숙하고 아름다운 반응을 보면서, 저는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제대로 목회를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기도했고 주님의 깊은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기도하는데 평소와는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출발하기 전 기도할 때도 같은 기도를 다시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하면서 저는 믿음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설교로 작성하여 성도들과 나누고 그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하게 된 것이 이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시고 완전히 소화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

저자서문 중에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계 1:8). 하나님이 근원입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16).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고 사랑의 동기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도, 구원도, 믿음도 다 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신학의 정수』라는 책에서 윌리엄 에임스는 이 구절에 관해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이신칭의는 어떤 식으로든지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랑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신앙의 진정한 대상에 의존한다. 신앙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갈 5:6). 이는 신앙의 전체적 효력이 원인으로서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앙이 사랑을 고무시킴으로 그 능력을 발현하고 행사하기 때문이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이와 (겉으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충돌하지 않는 다른 국면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리차드 백스터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과 사랑이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롭다 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랑은 열매로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온 영혼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합당치 못하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도 분명 맞는 말이지요! 김동수 교수님은 이에서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라는 요한일서 3장 11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술하고 있는 메시지(복음)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원래부터 들었던 원조 복음임을 다시 한번 천명함으로 새 단락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원조 복음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15:12, 17).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대한 것이라고 표현되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한 그리스도인 윤리라고 표현된 것이 이채롭다. 그것은 지금 대적자가 주장하는 복음이 윤리 없는 득도라고 할 때, 이에 대항하는 것으로써 복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하스(Haas)가 지적했듯이 이 명령(요일 3:11)은 복음 ‘메시지’(앙겔리아)의 일부분을 형성합니다. 스테핀 스말리도 이것에 동의했고, 이 구절에 대해 “독자들이 이미 ‘처음부터’ 사랑의 계명에 대해 들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요한은 아마도 우선 기독교 복음 선포의 처음 시작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독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였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5고 썼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어떤 면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따라서 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2019년 새해가 되기 전 ‘곧 새해인데 하던 설교를 계속 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 새해 첫 주이니만큼 뭔가 새로운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에게 말씀을 주시옵소서.’라고 속으로 잠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 보니 처형이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함께 새벽 2시까지 얘기했는데, 주로 우리 교회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도중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전날 한 말들이 계속 맴돌더니 설교가 구상되었습니다. 저는 영으로 이것이 새해 첫 주에 나누라고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촛불하면 진력이 나시지요? 나라를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인 촛불집회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초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1 때 저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의 마음에 일어난 불같은 소원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나지도 않고 평범에도 못 미쳤기 때문에 늘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가 미치도록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께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저는 넓은 광야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너를 만나러 오실 것이다.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하라!’ 저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제 손에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양초가 들려 있었습니다. 저는 양초에 불을 붙여 두 손으로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변했습니다. 제가 꿈에 본 하늘은 평소에 보는 하늘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였는데 온 하늘의 색깔이 변했습니다. 저는 ‘왜 갑자기 하늘 색깔이 변했지?’ 하고 이유를 찾았습니다.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온 하늘에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보석 하나의 크기가 태산만 했습니다. 그렇게 큰 보석들이 온 하늘에 빼곡하게 박혔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산만 한 보석들이 물감의 분자들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색깔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색깔이 변한 것입니다. 그 후 갑자기 이 보석들과 크기는 같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보석들이 줄줄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보석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모자이크 식으로 네 가지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제일 왼쪽에 거대한 십자가가 새겨졌습니다. 그 옆으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그 옆에는 면류관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큰 별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마구 뛰면서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주님이 제게 꿈에 대한 해석을 주셨는데, 그것은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에 초가 등장합니다. 저는 초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밥 존스 목사님이 제 꿈 얘기를 듣고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에게 초가 주어졌는데,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 초는 교회를 뜻합니다. … 목사님의 경우에는 초가 주어진 것입니다. … 그 촛대는 교회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님 손에 촛대가 주어진 것은 주님께서 목사님에게 거대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촛대는 ‘새로운 촛대’(기존의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교회와 다르다는 의미, 즉 성경적이라는 의미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은 완전히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촛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저의 부르심입니다. 저의 소명은 이 시대에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초대 교회 같은 지극히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사랑하는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자체가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는 물론 타교회 목회자와 성도님들도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하는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교회에 뿌리를 내려라!

예수님은 그 시대의 성전을 가리켜 장사치의 소굴, 심지어는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세 가지 이유로 장사치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첫째, 목회자가 탐욕에 사로잡혀 헌금을 병적으로 강조하므로, 둘째, 목회자가 교회성장주의에 빠져 목회성공만을 꿈꾸므로, 셋째, 좋은 목회자지만 교리에 속아 성도들이 모두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여 진짜 목표를 잃고 교회성장이나 추구하므로…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런 목회자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또, 교계의 높은 자리도 온통 교회만 크고 동기가 바르지 않은 부적격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달랐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목회성공이 아니라 영혼구원이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19, 22) 또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궁극적인 구원이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 27) 또, 그는 성도들에게 간곡히 이렇게 권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처럼 바울이 목표한 영혼구원은 단지 결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과 너무 다르지요! 지난 7월 16일,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수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구원이 아니라 단지 목회성공을 위해 목회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하며 “저는 자신의 구원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목회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에 의외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공감하고 관심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와서 말씀을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그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준비하던 설교의 내용이 전부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그 내용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묵상하고 구체화시켰는데,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이 흔들리면 기독교가 무너진다!

저자 서문 언젠가 멀리 울산에서 지진이 났는데, 서울의 새 성전이 두 번이나 소리를 내며 건물 전체가 휘청거렸습니다. 순간 엄청 무섭더라고요. 지진이 발생하면 땅이 흔들립니다. 즉 기초가 흔들려서 건물에 금이 가고 무너집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되는 교회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먼저, 교회의 기초는 정확한 신앙고백입니다(마 16:16-18). 또, 교회의 기초는 바울서신입니다(고전 3:10). 그리고, 교회의 기초는 신약성경입니다(엡 2:20). 한마디로, 절대 흔들려선 안 되는 교회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립니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집니다. 일례로, 성경에 외경 7권을 추가한 가톨릭은 오래전에 무너졌습니다. 또 자유주의 신학으로 성경을 난도질한 유럽 교회도 잔해만 남았습니다. 미국 교회는 반파되었고 한국 교회 역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은 경주나 포항 수준의 영적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략) 여러분 가톨릭이 기독교일까요? 아닙니다. 가톨릭은 이단을 넘어서서 완전히 이방종교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도 WCC를 통해 점점 가톨릭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가톨릭처럼, 개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이방종교화되었고, 개신교는 가톨릭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붕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 더 심각한 것은, 이 같은 영적 지진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한국 교회가 더 흔들리고 더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 교회에 존 스토트가 에베소서 2장 20절을 강해하면서 한 충고보다 더 필요한 충고는 없습니다. “어떠한 건축물에 있어서나 견고하고 안정된 기초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 성경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문서들이다. …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고 또한 현재 신약성경에 보존되어 있는 근본적인 진리들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는가에 따라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 아쉬운 것은, 『정경의 권위』가 보수주의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하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정경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를 성경으로 입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통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효과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해 동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도 설득할 수 있는 답을 알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을 위해서도 답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 되고, 종교다원주의를 비롯한 여러 비성경적인 주장들이 대세를 이루다 보니, 정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확신이 없었고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확실한 근거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으면 순순히 믿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심각해졌고, 간절히 확실한 답을 알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답은 요원했습니다. …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제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것에 대한 답으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선명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흥분이 되고 또 감사하던지요! 이것은 저뿐 아니라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꼭 필요한 답입니다. 그래서 그때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의 세 가지 인도!

... 이상 자세히 설명해드린 것처럼, 진짜 정확하고 중요하고 깊은 계시들은 주로 지혜의 말씀을 통해서 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쓴 바울서신을 입신 간증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이나,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또, 오늘날도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같은 유형의 계시들이 임합니다. 이것들도 환상이나 예언, 천사의 말이나 입신 간증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지혜의 말씀을 통해서 최고의 계시들이 오는 거구나. 지혜가 주 통로구나. 그래서 은사 목록에 지혜의 말씀을 제일 앞에 둔 것이구나! 그러므로 신비한 간증이 아니라 복음과 진리에 대한 설교를 더 사모하고, 더 귀히 여기고,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이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입신을 했나 안 했나? 예수님을 만났나 못 만났나? 천사가 방문했나 안 했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주셨느냐와 성경을 잣대로 철저히 분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들은 지혜의 말씀으로 받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기준으로 철저히 분별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신 간증보다 훨씬 더 깊고 정확하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열린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끝까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스카이보다 크신 하나님

저자 서문 이 책은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책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했으나 기대한 성적이 나오지 않아 상처받고 절망에 빠진 수많은 수험생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책입니다. 저도 전에 딸에게 해보았지만 수험생들에게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수험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더 높은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짜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그들의 심비에 새겨줄 것입니다. 그들을 진짜 성공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단순히 성경 해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지적 메시지 즉 로고스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계시적인 메시지(레마, 혹은 예언적인 설교)를 가리킵니다. 그 증거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단순히 성경을 풀이하여 설교하지 않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전한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20)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8:14)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미 4:4) 여러분 이것이 바로“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입의 말씀은 계시적인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성경 지식이 아니고 성경에 근거하였으나 계시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지식과 정보를 모으고, 강해 설교 기술과 방법을 배우고, 배꼽 잡게 웃게 할 수 있는 유머를 수집하여 지적인 혹은 만담과 같은 설교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자가 누구인고?”(렘 9:12)라고 예레미야가 탄식한 대로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광포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어도 들어도 기갈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기갈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흥회를 찾기도 하지만 실컷 웃고 들을 때에는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설교가 끝나면 남는 게 없어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질까요? 1.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2:27) 사람의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기름부음(성령)의 가르침이 있습니다(고전 2:13). 기름부음으로부터 배울 때 그것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2. 성령이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우리는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3. 하늘로부터 말씀이 임하는 것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9)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주 그에게 임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시작합니다(요 3:34). 이것이 곧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책에 기름부음이 저에게 가르쳐 준 것과,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게 부어 주신 말씀들을 기록하였습니다. ... “여호와의 입의 말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교리적이고 지적인 설교는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자가 아니면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들을 귀는 겸손한 마음과 순종할 의지가 있을 때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기 전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겸손하게 하십시오(마 11:25).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하기보다 진리를 바로 알고 순종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십시오(요 7:17). 그러면 이 책을 통해 성령께서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분명한 말씀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2004년 7월 울산 사랑하는교회에서

월드컵보다 더 중요한 경기

지난주에 수양관에 갔을 때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굉장히 나이 드신 모습이었고 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신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끌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 마음에 한이 되어 있습니다. 15년 동안 20명을 데리고 목회하는 희망이 없는 아들, 10년이 지나도 50명이 넘는다는 보장이 없는 목회에 바닥을 기고 있는 아들, 아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지만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들, 그런 아들의 모습만 보다가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자가용 타고 다니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봉고차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니는 것만 보셨습니다. 사택에서 사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 뒤편에 칸막이를 치고 사는 것만 보았습니다. 교회를 건축한 것도 보지 못하고 임대교회를 하는 것만 15년 이상을 지켜보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꿈속에서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신 어머니, 이것이 현실인지 알았는데 꿈이네요. 그러나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이 말이 어머니에 대한 이 아들의 진심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감각이 살아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 그 후 성령께서 저에게 귀중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왜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효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너는 너의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느냐?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아쉬워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실제로 저는 정감 넘치는 시골 경치를 볼 때, 음식점에서 맛난 음식을 먹을 때,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때, 안락한 집에 돌아왔을 때, 또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갔을 때, 그 외에도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한숨 쉬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질릴 정도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더라도 효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 하늘에서는 세상적인 성공에는 관심이 없고 영적인 변화와 진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면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고 죄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하늘에 상급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드리고 효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

『거룩한 경고』라는 책에서 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대부분 진정한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진정한 거듭남이 없는데도 거듭났다고 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여전히 죄악과 이 세상의 탐욕 가운데 살면서 스스로 거듭난 상태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거짓 설교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엄청난 비극이요, 위험이다.” 저는 이 설교를 타교회에 가서 처음 설교했을 때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아주 작았고, 규모가 있는 노회장님 교회에 가서 이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엄청 충격을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노회장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 목사님이 한 번 설교로 우리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성도들이 변 목사님에게 푹 빠졌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옳습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한 진리니까요. 그렇더라도 그렇게 설교하면 교회에 누가 오겠습니까? 누가 남아나겠습니까?” ? 그때 저는 목사가 진리냐 아니냐? 그리고 성도들의 영혼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머릿수를 더 생각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목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솔직히 이것이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을 보는 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소책자의 원고를 탈고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라는 본서의 원고를 서둘러 탈고한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교회 안의 명목상의 신자들을 깨우고 구원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 시대는 세상에서 전도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전도해야 할 정도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을 적절히 사용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작은 책을 통해 교회 안에서 다수가 되어버린 명목상의 신자들이 깨어나게 하소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