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직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급히 추가했습니다. 2016년 10월 2일, 정부와 반군(FARC) 사이의 평화협정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습니다. 반세기 넘는 내전을 끝내게 되리라 믿은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저도 그랬습니다. 다시 내전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됐습니다.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 눈으로 분위기를 보고 싶었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보고타를 돌아봤습니다. 평화협상 과정과 협정 내용을 조금 길게 썼는데, 일정에는 좀 안 어울리는 느낌도 있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깨달은 것이 이번 여행의 소득 가운데 하나입니다.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가 다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해 희미한 윤곽이나마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요. 제게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그런 곳입니다. 볼거리도 많지만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를 드러내는 창과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또 보여주지 않는지를 통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안데스 나라들이 현대사의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찾아보려고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보고타의 ‘기억.평화.화해 센터’, 리마의 ‘기억.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 산티아고의 ‘기억과 인권 박물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 같은 곳입니다. 문외한의 인상일 뿐이지만 많이 달랐습니다. 콜롬비아는 내전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비전이 분명했습니다. 칠레는 청산할 과거와 미래의 방향에 관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 같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칠레의 성과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페루는 질곡의 과거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정작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 볼리비아의 모습은 아쉬웠습니다. 여전히 혼돈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