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고, 누구나 길을 지니고 산다. 오래 전 나는 인간과 만물이 만든 길이 이 세계와 우주 속에 열려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세계와 우주가 만든 길들이 인간과 만물 속에 열려 있음을 안다. 이 길 위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종교나 과학과 구별되지만, 종교나 과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세계관(Weltanschauung)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적 혹은 과학적 세계관과는 다른, 그러나 역시 일종의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철학관에서 볼 때 철학자는 지적 '신'이 되고자 하며, 그의 관점은 '신의 관점(God's eye's view)'을 갖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철학적 세계관을 '사유의 둥지'로서의 철학관이라 부르고, 그러한 방식의 철학을 '둥지의 철학'이라 이름 짓고,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철학적 둥지 짓는 작업으로 파악한다. 나의 철학관은 지금까지의 여러 철학관들이나 철학적 활동의 부정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둥지의 철학관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철학 활동은 물론 모든 학문들도 세계관으로서의 단 하나의 통일된 관념적 둥지를 짓는데 필요한 다양한 부분적, 분과적 활동이며, 건축 양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극동의 조그만 나라 한국의 벽촌에서 태어난 나는 민족으로서나 개인적으로 극히 고달프고 험난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만큼 열정적으로 고향에서, 서울에서, 파리와 보스턴에서 책을 통해, 그리고 대학 강의실과 그 바깥에서 알게 모르게 세계화의 과정을 몸소 체험했다.
이러한 나로서는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 인종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이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 일상생활에서도 남다르게 예민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화 과정의 역사적 경험은 문화, 문명, 지구, 자연, 우주 그리고 초월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시야를 넓혀주고, 보다 거시적이고 깊은 차원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경험하고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문학자가 아니며, 동양철학자도 아님은 물론 어떤 의미로서나 제대로 돼먹은 철학자도 아닌 내가 이 에세이를 썼다는 것은 철없이 저지른 당돌한 짓이며, 터무니없는 엉터리 생각인 줄을 나는 잘 의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러한 일을 감히 저질러놓고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는 이유는 첫째, 무엇보다도 내가 노장 사상에 늦게나마 매혹을 느꼈으며, 둘째, 노장 사상이 순수한 철학적 입장에서나 이데올로기 즉 이념적인 관점에서 극히 현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결같이 이상하고 알 수 없고 불분명하고 막연하고 애매할 때가 많다. 철학이란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담론(談論)이 아니라 가능하면 모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모든 문제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모든 문제들을 논리정연하게 풀며, 모든 사유를 가능하면 가능한 만큼 열린 마음으로 투명하게 해보려는 마음의 태도이며 탐구자세이다.
문학, 더 정확히 말해서 문학 작품의 창작과 감상이 나를 강렬한 매력, 아니 마력으로 유혹하고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그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존재이며, 그것이 발휘하는 마력의 본질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들은 그만큼 더 내 곁을 떠나기는커녕 그만큼 더 커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편으로는 큐비즘, 뒤샹의 작품으로 '샘'이라 제목을 붙인 변기의 발표에서 비롯하여 백남준의 '전자 예술'에 이르기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황당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시의 출현,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의 발표, 데리다와 로티로 대표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론가들에 의한 문학과 철학 간의 구별의 부정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위와 같은 종류의 물음들을 가능하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던지고 그것들에 대답을 역시 근본적 차원에서 찾아보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답은 그만큼 철학적 색깔을 띠게 된다.
시는 자연, 세계 그리고 인간 간의 전인적 따라서 행복한 관계가 차려놓은 언어의 축제이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발기발기 찢어진 세계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찾고, 그러한 행복은 세계의 순간적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조화로운 통합 속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은 나름대로 따뜻하고 행복했던 거처이다.고향은 언제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골이며, 자연과 가까운 시골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행복했던 추억이 담긴 거처이다. 시는 나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집필을 시작해 1983년에 초판이 나오면서 이 책은 오늘날까지 독자들의 관심을 꾸준히 끌어 현재 20쇄를 거듭 찍게 됐다. 이것은 이 책이 요청하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아직도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필자인 나로서는 흐뭇함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 책의 초판에서 발견되는 활자의 오식, 새로운 세대의 독자에게는 너무나 작은 활자, 종이와 인쇄의 상대적으로 낮은 질에 대해서 늘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껴왔다. 이런 처제에 이 개정판을 세상에 내놓게 되어 필자로서는 기쁘다.
초판이 나온 지가 벌써 23년이 넘었고, 그동안 예술계에도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책의 후기에 실은 최근의 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를 원래의 내용을 새롭게 요약하는 의미에서 추가한 것 이외는 개정판의 내용은 초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어도 예술의 개념의 철학적 정의에 관한 한 나의 생각에는 핵심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해 언급할 때 중요한 것은 종교라는 낱말의 개념 정리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개념 정리가 없는 상황에서의 논쟁은 모두 무의미한 헛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낱말이고 'abracadabra'라는 발음처럼 그 뜻을 규정할 수 없는 주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실은 철학적 담론의 경우 더욱 분명하다.
서른한 살이 되던 1961년 10월 나는 오로지 세상을 알고 싶은 내면적 요청에 밀려 '출가' 하는 심정으로 구체적 계획도 없이 무작정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파리로 떠났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살아갈 길의 너무 막막함,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그리고 막연한 공포를 감출 순 없었다.
이 책은 그동안 여러 잡지, 신문, 학술대회 등에서 발표했던 여러 글들 가운데 나의 지적 궤적, 정서적 흔적 및 도덕적 자세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자전적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아주 보잘 것 없지만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살아 왔다고 자처하는 나의 삶을 객관화해서 정리해 보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에 전개된 서양철학사를 소개하는 요약서이지만 그냥 소개가 아니라 나의 철학관에 기초한 비판적 소개서이므로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한 사례로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철학 개론서이자 철학 교양서이며 한 철학자의 철학적 사유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20세기 후반 난삽하게 달라진 서양 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