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오사(二十五史)’는 전체 분량이 모두 2,730만 자를 넘는다. 이를 완독하려면 하루에 8만 자를 읽는다고 해도 1년이 넘게 걸린다. 따라서 중국 역사의 특징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복잡다기한 중국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이미 다양한 도서가 출간되어 있다. 왕조 교체의 시간 순서에 따라 하(夏), 상(商), 주(周)에서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는 역사를 기전체(紀傳體)식으로 정리한 책이 있는가 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학, 예술, 제도 등의 영역을 분야별로 정리한 미시사(微視史) 저작도 출간되어 있다.
그런데 거젠슝(葛劍雄)의 이 저서는 위와 같은 기존의 역사 서술 방법과는 달리 땅과 인간과 정신의 어울림이야말로 역사의 주요 얼개라는 독특한 관점에 근거해 이와 연관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을 선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특히 중국 고대 지리와 인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만큼 이러한 얼개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융합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땅을 다루면서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출현한 ‘중국(中國)’이라는 어휘의 의미가 확대되어온 과정을 서술한 뒤 각 왕조의 강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히고 이에 수반해 중국의 역대 행정 구역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해왔는지 드러냈다. 또한 중국 각 왕조 도성과 식량 수급 문제의 밀접한 연관성을 밝혔으며, 이어서 만리장성, 운하, 치도, 역참에 얽힌 난관, 사회적 장단점, 부패 상황, 유관 일화 등을 흥미롭게 서술했다.
아울러 저자는 중국 땅에서 역사를 일궈온 중국인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며 이민, 인구, 인물, 외교 등을 주제로 그들의 활동 양상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의 이주 과정을 서술하면서 현재 쓰촨, 윈난, 구이저우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선조가 후베이 마청 샤오간향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점, 또 지금의 화베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산시(山西) 훙동 다화이수 아래에서 왔다고 하는 점 등 중국 고대인의 이주와 관련된 서사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이는 정사의 이면에 묻혀 있던 중국인의 이주사를 생생하게 복원한 내용이라고 할 만하다. 또 당나라 때는 과부의 개가를 자유롭게 허용하다가 송나라 이후로 과부의 수절을 강조한 것은 유가의 이념보다 인구의 포화 상태 때문이라고 주장한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중국 정사에서 “수렵을 나갔다[狩]”로 기록한 역사의 이면에는 기실 천자가 외부 세력에 의해 치욕을 당한 역사의 실상이 숨어 있음을 밝힌 부분, 또 명나라 청백리 해서(海瑞)를 통해 관리 사회의 부패상을 드러낸 단락, 비정규 관리인 막료 왕이(王二)를 통해 중국 명·청 시대의 기형적인 관리 제도를 폭로한 대목도 매우 신선하다.
이어서 저자는 고대 중국의 정신적 중추라는 제목 아래 ‘천하’와 ‘제왕’이란 주제를 잡고 중국의 통일을 추구하고 유지해온 관념과 제도의 특징을 논술했다. 그중에서도 장평대전(長平大戰) 이후 수십만 명을 생매장해서 죽인 대학살의 주요 원인이 군량미 부족 때문이었다고 주장한 점, 초한 쟁패시기에 유방이 함양을 점령하고 포고 했다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이 기실 허구적인 선언에 불과했음을 논단한 점 등도 일반 독자의 역사 상식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견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황제의 사생활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는 태자, 황후, 태상황, 종실, 능묘를 키워드로 화려한 황실 이면에 묻힌 인간 군상의 비극적 실상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중국 관방에서 정사로 인정하는 역사서의 가식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미 앞에서 저자는 역대 사관(史官)들이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준거로 정사를 편찬할 때 객관적 역사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보다 집권 세력의 가치관을 선양하기 위해 일차 사료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분식했음을 논술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중국 역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의 사례를 인용해 지금의 『구당서』와 『신당서』에 실린 ‘현무문의 변’의 진실이 당 태종의 정치적 욕망과 의도에 의해 왜곡되고 분식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다. 그는 맺음말에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역사서든 후인들이 이미 발생한 사건을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기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원리를 알면 사료 가운데서 표면을 뚫고 내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옛 역사를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다.
저자 거젠슝은 이러한 입장에 서 있으므로 중국 역사의 견고한 껍질을 뚫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밝혀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이 저서를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견지해야 할 관점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다루는 중국 역사는 중국 사관(史官)의 관점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저자 거젠슝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형성된 중국 역사관에 의해 영향 받은 중국 역사학자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저자는 중국 고대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한(漢)나라의 강역이 동쪽으로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중부까지 포괄했고, 여기에는 한국의 수도 서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 측의 일방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한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일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지만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싸고 현재 한반도 이남과 이북의 역사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을 이 짧은 「후기(後記)」에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주제를 확정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로 진술하는 것은 진정한 역사학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또 저자는 북위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을 거론하는 가운데 효 문제가 “자각적으로 한족과 융화하기 위한 중대 개혁을 단행했고 마침내 찬란한 성과를 거뒀다”라고 찬양했지만, 중국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자기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스스로 폐기한 굴욕적인 조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는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중국 정부의 정책이 사실은 매우 은밀하고 패권적인 동화 정책임을 드러내는 언설인 셈이다. 이는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유지에도 반하는 논리다.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해외 화교도 중국 언어와 중국 문화를 유지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현지인으로 동화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저자는 한 고조 유방, 후한 광무제 유수, 송 태조 조광윤 등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와의 신의조차 내팽개친 일을 천하 통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정의와 진리를 숭상해야 할 학계에까지 패권주의적 논리가 깊이 스며 있으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5천 년 역사 동안 중국과 이웃해서 살았고 앞으로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거젠슝이 보여주고 있는 사관을 우리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가 기존 사료의 표면을 뚫고 역사의 내면을 생생하게 분석해내는 것처럼 우리도 그가 지은 이 책의 표면을 뚫고 그 내면에 잠복해 있는 인식과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에서 분석한 이 책의 장단점은 모두 우리에게 유용한 타산지석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왕후이는 이 지점에서 「아Q정전」의 저자 루쉰까지 포함하는 개방적 텍스트 읽기를 시도한다. 이제 왕후이의 시각에는 아Q를 묘사하는 루쉰도 아Q와 같은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 포착된다. 왕후이는 묻는다. “아Q가 병약하고 마비된 중국인의 전형이라면 그런 중국인에 대해 반성을 수행하는 루쉰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 하나로 「아Q정전」속에서 병약하고 마비된 형상으로 전형화된 중국인이 오욕의 순환구조를 끊고 자기 역사와 사회에 반성을 수행하는 깨인 현대인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모사로서 가장 큰 성취를 이루고도 뒤로 물러난 장량의 일생은 수많은 사람들이 경탄하고 숭배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장량의 성취를 긍정 일변도로만 평가했던 것만은 아니다. 논란이 된 몇 가지 지점이 있다. 첫째, 장량의 전 생애를 살펴보면 창해군, 황석노인, 상산사호 등과 관련하여 허황하고 비현실적인 측면이 강하다. 둘째, 장량이 초기에는 한(韓)나라 복수와 재건에 진력하다가 역이기가 유방에게 육국의 후예를 분봉하여 육국을 재건하자고 건의할 때는 오히려 여덟 가지 이유를 들어 육국 재건을 극력 반대했다. 셋째, 장량은 홍구강화 합의문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유방에게 약속을 파기하라고 종용하여 신의를 내팽개쳤다. 특히 송나라 성리학자들은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장량을 전국시대 종횡가(縱橫家)의 아류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우리나라 성리학자들도 이 같은 논리를 따르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의 입장에서는 역사 속 인물을 과거의 호평이나 혹평에만 근거하여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떤 인물을 평가하려면 유기적 통일성이란 시각을 견지하는 게 좋다. 장량도 마찬가지다. 가령 한(韓)나라 복수와 재건에 진력하던 장량이 육이기의 육국 분봉 건의를 저지한 여덟 가지 논리도 시대의 변화와 현실의 수요에 따른 인식의 발전으로 해석할 수 있고, 홍구강화 파기도 천하대세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군사와 백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책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나중에 장량이 높은 봉작과 막대한 이익에 탐닉했다면 이런 이율배반적 행위가 가식과 허위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량은 만년에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끊고 검소하고 담박한 삶을 살았다. 바로 이 점이 장량의 삶을 유기적 통일성이란 시각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의외로 장량의 사상이나 행적에 관한 책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지금 상황에서 이 책은 역사 속 장량을 다시 불러내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매개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