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시인의 말
이제는 가끔씩 꿈에나 보이는 외할머님, 그 애틋한 사랑의 기억 하나로 저는 살아 있습니다. 평화시장, 그 새벽 도깨비시장에서 당신이 사주시던 해장국의 온기로 첫 시집을 엮습니다.
1997년 11월
박정대
개정판 시인의 말
나의 시는 여전히 고독과 침묵의 식민지
1997년 가을~2020년 가을
박정대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리라던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말은 옳다
대중들은 자꾸만 그들의 눈높이로 예술가를 끌어내리려 하고
예술가들은 자꾸만 그들의 눈높이로 대중을 끌어올리려 한다
그러니 이 땅의 가난한 예술가들이여,
굴종과 타협을 하나의 미덕으로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교묘한 시스템에 퍽큐를 날려라
문화 권력과 사회 기득권자들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대를 환영한다
그대를 자신들의 방법으로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저항하고 반항하라
그대가 속해 있는 이 세계는 또 하나의 허상이다
*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동안 이 글들을 썼고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면 이 글들을 마쳤다
담배처럼 짧고 아름다운 책을 쓰고 싶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뱉듯
스스로 오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이런 생각과 글들이 모여
담배에 관한 짧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이루었다
열망은 고통을 동반하지만 열망이 사라진 세계는 고통 자체였다
이 세상에 절대 고독이 없듯 완전한 이별 또한 없을 것이다
이 글이 당신과 나를 만나게 할 수 있다면
허공을 지나온 빛과 온도로 언젠가 우리 만나리
차갑게 식은 입술로 말하노니
눈발이여, 너는 갸륵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너는 무한히 흩어지려 하지만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이는
이 세계는 시가 적힌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2025년 시월, 이절에서의 눈송이 낚시에서
강원도에는 가을이 많다. 겨울은 더 많다. 그리고 밤하늘엔 겨울보다 더 많은 별들이 있다. 그 동안 내가 쓴 강원도에 대한 시들을 보며 나는 본질적인 삶에 대하여 오래도록 생각했다. 생각의 한가운데로 별들이 총총 떠오르고 있었다. 별빛 아래 놓인 강원도를 생각했다.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체 게베라가 그려진 지포라이터 관리술」)
왜 갑자기 이 시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삶이란 모르는 것투성이겠지만, 이제사 이것만은 알겠다. 강원도엔 삶이 많다. 본질적인 삶이 많다.
숨 쉬는 것조차도 정치적 행위가 되어버리는 이 땅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의 '고요한 혁명'임을 깨닫는 아침입니다. 지금 한국의 시가 사춘기라면 제 시는 아직도 전생前生이겠지요. 그러나 시를 쓰면 보여줄 수 있는 도반道伴들이 있어 조금은 행복해져도 될 듯한 시간입니다.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는 아프리카의 민속 악기다
은델레 기타는 3줄, 이낭가는 8줄이다
은델레 기타는 너무 작아서 거기에서 무슨 소리가 날까 싶다
이낭가는 시인이 노래하거나 시를 읊조릴 때 반주 악기로 사용했다 한다
여기에 모아 놓은 44편의 시들은 어쩌면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를 연주하는 그대를 위한
나의 소박한 읊조림 같은 것이다
바라건대, 나의 읊조림이 그대 생의 기슭에 밀물처럼 고요히 스며들 수 있기를
거칠게 말을 달려 여기까지 왔다
말은 지치고, 허공엔 눈발이
눈발 사이로는 허공이 가득하다
검은 벨벳 옷을 입은 까마귀가 물고 온 이절의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는 누군가 혁명처럼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호롱불처럼 돋아나는 저녁이 여기 있으니
혁명아, 한 사나흘 쉬었다 가자
2023년 3월, <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