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테크놀로지를 위하여
로렌 그레이엄의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이라는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된 것은 유학 첫 학기였던 2000년의 일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운이 좋게도 기술사 전공으로 미국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 학교에서 생활비를 받기 위해 수업 조교를 맡아야 했다. 처음으로 조교를 맡았던 수업은 ‘산업 시대의 기술과 과학’이라는 학부 교과목이었다. 담당 교수는 나치스 치하 독일 엔지니어와 매니저들이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위한 시설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했는지에 대해 연구한 독일 기술사 전공자였다. 그레이엄의 책은 수강생들이 읽고 서평을 써야 하는 책들 중 한 권이었는데, 학생들의 서평을 채점해야 했기 때문에 나도 이 책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레이엄은 이 책에서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러시아 엔지니어의 삶을 추적한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기술 교육을 받은 팔친스키는 서유럽 사회에서의 경험을 살려 러시아의 근대화에 기여하기를 원했다. 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이 책의 2장에서 설명하듯이) 당시 세계 최고로 알려진 미국식 기술과 경영관리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는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소련 지도부는 인민의 삶보다는 자본주의와의 경쟁과 체제의 유지에 초점을 맞춘 기술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팔친스키는 엔지니어링 전문가로서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이를 이유로 1929년 사형에 처해졌다. 그레이엄은 팔친스키의 삶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소련 초창기의 문제점을 짚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련 패망의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세기 이후 한 사회가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19세기 말 이후 과학과 긴밀하게 결합된 기술로 인해 그 영향력이 심대해졌기 때문이다. 과학적 기술은 산업으로 이어져 인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생산력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끊임없는 기술 혁신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쟁취해야 하는 절대선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각국 정책의 근간으로 작동했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이른바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한 발짝 뒤늦게 경쟁에 뛰어든 러시아와 일본, 이후 후발 산업화를 이룬 대만과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테크놀로지의 중요성은 맹목적으로 강조되었지만, 테크놀로지가 각각의 사회 구조와 어떻게 연관을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었다.
이 책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서 그레이엄은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의 문제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을 팔친스키가 경험했던 서유럽 사회와 암묵적으로 대비시키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1920년대 이후 소련 사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민들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대규모 기술 시스템이라는 현상은,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소련에서 드네프르 댐이 1921년에서 1941년까지 건설되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180미터 높이의 후버 댐이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지어졌다. 물론 스탈린과 같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대형화와 복잡화는 20세기 테크놀로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사용자를 고려하기보다는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기술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 소련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레이엄의 비판은 사실 현대 테크놀로지 일반으로 확장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테크놀로지는 한편으로는 경제 발전 또는 생산력의 핵심 요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위신 또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의 확산일 것이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 테크놀로지는 그 근원적인 개념, 즉 인간의 복지와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자연에의 개입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레이엄이 그리는 팔친스키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테크놀로지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전문가 집단인 엔지니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발언했던 것이다.
팔친스키의 목소리는 21세기 한국의 과학자, 엔지니어, 그리고 위정자들에게도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최근 한국 사회는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각종 논쟁들을 효과적으로 종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4대강 사업의 효과, 정부의 탈핵 정책, 초미세먼지의 원인 등 다양한 기술적 문제들에 대해 대중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제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난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 서 있음을 사회적으로 설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정자들 역시 전문가 집단을 시녀로 부리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권력과 전문가의 결탁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통합의 근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은 공학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소련의 기술 교육에서 나타났듯이 세부적인 전문 분야에 대한 좁은 교육 방식은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사회적 문제를 살피지 못하는 협소한 엔지니어를 배출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제지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를 생각해 보라.) 적어도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라면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것을 폭넓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고 (예비) 전문가로서의 윤리 의식을 갖춘 교양인으로 만드는 교육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공학교육은 인증사업을 통해 일부 이러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대학에서 관련된 교육 과정이 부족한 실정이다. 1960~1970년대에 기술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 구성된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면, 한국에서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가 그 첫 단계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은 현재의 한국 사회와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독자들에게 이 책이 보다 깊이 있는 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마이클 앨런(Michael Thad Allen) 교수와, 번역 과정에서 초고를 꼼꼼하게 읽고 수많은 오류를 바로잡아 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김남섭 교수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