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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정과리

본명:정명교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8년, 대한민국 대전

직업: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최근작
2023년 8월 <비평의 숙명>

글숨의 광합성

나는 내가 살펴보고 해독하려고 애쓴 소설가들이 바로 그 ‘어떻게’라는 언어의 운명에 전력투구한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언제나 은밀한 충동들의 형식으로 복류해왔다. 그것은 한국 문학의 수용의 장이 한국 문학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데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어긋남의 하나의 결과가 오늘의 문학의 제도화와 산업화에 한국 문학이, 소설가들 자신을 포함해서, 지극히 무력한 소이이다. 이 환경 속에 살면서, 나는 숨 막히는가, 아니, 그래도 이들이 그나마 숨통을 틔어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가, 아니한가? 그 저울 위에 내 책 역시 놓이길 바란다. ('책머리에' 중에서)

네안데르탈인의 귀향

나는 내가 왔던 곳이 내가 사랑한 시인들의 목젖 아래 부근이었음을 알았다. 더불어 10년 전 젊은 시인 김태동의 시를 두고 '언어 탄생 이전의 음향들'이라고 명명하고자 했던 충동을 적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연정의 일지에 귀향기라는 이름을 붙여줄 명분을 얻게 되었다. 돌아올 곳은 여럿일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느낌 이후 모든 재생은 산란적이고, 그 동작의 형태는 수와 부피를 낳는다. 이 책은 그 점점이 뿌려진 동작들을 가둔 첫번째 원환이다. 소제목으로 쓰인 말들은 시의 ‘풍경’을 암시한다. 여기 수록된 어느 글에서 적었듯이 '풍경'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도, 자연으로의 귀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닫고 여는 사건의 다양한 양태들의 총칭일 따름이다. 강조점은 '사건' 위에 찍힌다. 그 사건은, 되풀이해 말하지만, 유한자들의 사건인 한, 언제나 점정(點睛)에서 헷갈려 버린 용그림의 훼절(毁折)된 꼴이 진면목인 사건이다. 때문에 나는 이 귀향이 혹시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아닐까 의심한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에게 그것이 탄로날까 봐 걱정이다. - <네안데르탈인의 귀향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서문 중에서

네안데르탈인의 귀향

이 책은 1989년 이래 지금까지 쓴 소설론을 모은 후에 다시 두 권으로 쪼개서 만든 첫번째 묶음이다. 분량 때문에 가른 두 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만, 굳이 나누자면 이 책은 소설의 내적 문법을 중시한 글들을 모았고, 다음 책은 소설이 세계와 직면한 상황을 중시한 글들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 문법을 다시 되새겨보자니 소설이란 다시 살아보기, 즉, 생의 반복으로써 생으로부터 차이 나는 짓이라는 게 잘 드러난다. -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 소설의 문법> 서문 중에서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이 책은 1989년 이래 지금까지 쓴 소설론을 모은 후에 다시 두 권으로 쪼개서 만든 첫번째 묶음이다. 분량 때문에 가른 두 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만, 굳이 나누자면 이 책은 소설의 내적 문법을 중시한 글들을 모았고, 다음 책은 소설이 세계와 직면한 상황을 중시한 글들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 문법을 다시 되새겨보자니 소설이란 다시 살아보기, 즉, 생의 반복으로써 생으로부터 차이 나는 짓이라는 게 잘 드러난다. -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 소설의 문법> 서문 중에서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나는 내가 왔던 곳이 내가 사랑한 시인들의 목젖 아래 부근이었음을 알았다. 더불어 10년 전 젊은 시인 김태동의 시를 두고 '언어 탄생 이전의 음향들'이라고 명명하고자 했던 충동을 적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연정의 일지에 귀향기라는 이름을 붙여줄 명분을 얻게 되었다. 돌아올 곳은 여럿일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느낌 이후 모든 재생은 산란적이고, 그 동작의 형태는 수와 부피를 낳는다. 이 책은 그 점점이 뿌려진 동작들을 가둔 첫번째 원환이다. 소제목으로 쓰인 말들은 시의 ‘풍경’을 암시한다. 여기 수록된 어느 글에서 적었듯이 '풍경'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도, 자연으로의 귀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닫고 여는 사건의 다양한 양태들의 총칭일 따름이다. 강조점은 '사건' 위에 찍힌다. 그 사건은, 되풀이해 말하지만, 유한자들의 사건인 한, 언제나 점정(點睛)에서 헷갈려 버린 용그림의 훼절(毁折)된 꼴이 진면목인 사건이다. 때문에 나는 이 귀향이 혹시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아닐까 의심한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에게 그것이 탄로날까 봐 걱정이다. - <네안데르탈인의 귀향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서문 중에서

들어라 청년들아

지금 세상의 문화심리적 현상에 대한 나의 진단은 이 책의 제목과 관련이 있다. 물론 모든 문제들은 고유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태를 접근하는 법으로부터 해결책을 도출하는 데까지 모두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특별한 노선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은 정신분석이 가르쳐준 교훈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이라고 이질적인 문제들이 하나의 문제적 환경 안에서 꿈틀댄다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피맛골을 유람하는 무한히 많은 길들이 서울문화지도라는 하나의 책에 실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서문_'청년 시대의 가을을 맞으며'에서)

무덤 속의 마젤란

문화 산업과 전자 문명의 시대에 타자성이 편재적이고 상투적인 명제가 된 까닭은, 산업과 문명의 경탄할 만한 인테리어 기술이 그것을 주관성이 천방지축으로 뛰놀 놀이방으로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삶의 극단적인 향락과 동의어로 쓰이면서 잘살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요컨대 '죽음'과 '타자성'의 문제가 현실 원칙의 그물 안에,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이 공모하여 짜놓은 행복한 질서의 그물 안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그 현실 원칙의 그물 안에서 죽음은 가장 씽씽한 역할을 배정받아 생의 무대에 등장하였으며, 타자성과 주관성은 가장 멋진 친구가 되었다. 이 생의 공모자로서의 죽음, 주관성의 확장으로서의 타자성과 생의 단호한 거부로서의 죽음, 주고나성의 해체 기제로서의 이타성을 분별해내기란 이제 너무 어려운 일이다. 전자의 모든 행위들은 항상 후자의 깃발 아래서 시도되기 때문이며, 동시에 후자의 모든 투기는 어쨌든 전자의 형식을 통해서만 실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생의 단호한 거부로서의 죽음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가리킨다면, 생과의 싸움은 시작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책 이름을 '무덤 속의 마젤란'으로 정한 것은 이러한 사정들을 고려한 결과이다. 좀더 '죽음'을 형상적으로, 즉 체험적으로 지시할 방도를 찾으려 했고, 그 죽음 자체로서의 생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 생의 방법론을 암시하길 바랐다.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

나는 2000년 가을에 충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로부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적을 옮겼다. 그해 여름에 『문학과사회』 술자리에 해당 과의 교수 한 분이 나를 찾아온 게 발단이 되었다. 나는 전화로 방문 의사를 들었을 때 술 한잔하고 싶었거니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게 연세대 국문과에 와서 시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역사의 페이지’는 그렇게 장을 바꾸게 되었다. 이는 한국문학 연구사의 페이지에도 ‘잉크칠을 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국문학과 교수가 되면서 나는 평소에 게을리 대했던 식민지 시기의 작품들을 열심히 읽게 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들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뿌리에 대해 많이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공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차츰 한국문학 연구 상태가 아주 부실하다는 점에 놀라 안타까운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상태는 연구의 내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연구 범위, 대상, 주제는 물론 연구 태도, 방법론, 마음의 이론, 시각을 망라하는 총괄적인 ‘연구 체제’를 아우르는 한국식 연구 풍토를 넘어, 우수 논문을 선별하는 기준을 비롯한 다양한 제도적 문제들 및 한국 교수진 및 연구 집단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한국 지식·문화?문학장의 거의 모든 장소에서 현상되어, 차라리 하나의 종족적 관습을 이루고 있다고까지 할 만하였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나 자신이 한국문학의 과거에 무심했던 만큼이나, 한국판 ‘스콜라 스티크scolastique’로부터 형성된 고정관념들에 깊숙이 침윤되어 이러한 상황을 반성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추수하는 자세를 스스로 방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오늘날의 한국문학(차라리 한국학) 연구 풍토와 조선시대의 주자학적 정신환경을 연결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어쨌든 김구 선생도 걱정하신 문제이니, 정말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장문의 백서를 쓸까 요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겨우 운만 띄운 형편에서도 살벌한 바람이 폭풍의 전조처럼 몰아치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 것이니, 정말 그랬다가는 세상의 개선을 위해서 한 일이 거꾸로 땅 꺼짐이 다중 폭발을 일으킬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다만 겨우 한 걸음이라도 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한국문학 연구를 위한 실마리에 한 올을 보태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나는 근대 초엽의 문학들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그에 대한 연구들을 가능한 한 꼼꼼히 되살피고, 좀더 온당한 해석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간신히 문제들을 간추려 분명한 윤곽 안에 배치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는 이르렀으니, 문학 이해의 차원에 국한해서 그걸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머리말을 대신하여」 부분 - 집필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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