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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022
  • 원청
    위화 (지은이), 문현선 (옮긴이) | 푸른숲 | 2022년 11월 "위화 8년 만의 신작, 한 시대의 운명"

    "여기가 원청입니까?" 갓난아기를 안고 거대한 봇짐을 둘러멘 사내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묻는다. 북쪽 마을을 떠나 먼 길을 온 린샹푸는 아내의 고향이라고 들은 '원청'을 찾아 헤매지만, 원청은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들었던 곳과 가장 분위기가 비슷한 '시진'에 정착한 린샹푸는 알지 못했다. 시대의 풍파가 삽시간에 그를 덮쳐 인생의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어 놓을 것임을.

    20세기의 중국을 문학으로 복원하는 것은 위화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에서 시작하는 <인생>,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허삼관 매혈기>, 자본주의가 스민 후의 중국 사회를 담아낸 <형제>. 그리고 집필에만 23년이 걸린 이번 신작 <원청>은 그 모든 시대의 급류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청나라로 대변되는 구시대가 저물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1900년대 초반 대격변기를 그리며 마침내 작가가 오래도록 품어온 염원을 실현한다.

    시대의 암흑 속에서도 긍지와 신념을 지키려 끝까지 분투하는 사람들과, 혼란을 틈타 악랄함을 극한으로 표출하는 사람들. 순백의 선의와 극악무도한 잔혹성이 대비를 이룬다. 그 모든 아픔과 비극과 찰나의 행복 위로, 하얀 눈이 모든 것을 감싸듯 조용히 내리는 모습이 못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작가는 그렇게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현재의 중국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만 하느냐고.

  • 밥 챙겨 먹어요, 행복하세요
    마포농수산쎈타 (지은이) | 세미콜론 | 2022년 11월 "매일 만날 수 있는 확실한 행복에 대하여"

    수많은 요리책들이 있고, 수많은 요리 유튜브 채널이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귀찮음을 핑계로 오늘도 배달 앱을 켠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은 이 모든 게 지겨워지기도 한다. 다 먹고살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인데 언제까지 이 물리는 배달 음식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바로 그런 날, 마음 편한 맛이 필요한 그날에 이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마포농수산쎈타'는 홀연히 트위터에 등장해 먹고 마시는 소소한 행복을 전해오고 있다. 아주 간편하게 뚝딱 만들 수 있는 집밥 (혹은 안주)을 남다른 감성으로 게재하며 지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가 창조해 전국적 유명세를 얻은 레시피는 순두부열라면과 대파돼지찜 등이 있고 이 밖에도 확실한 행복이 될만한, 그러나 참으로 간단한 요리들이 이 책에 실려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콘셉트에 충실한 책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데, 책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예스러움은 도서 내지에서도 잔뜩 묻어난다. 그러나 모두가 아시겠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설계된 빈티지란 세상 어려운 일이다. 2022년 송년회는 집에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요리들을 꼭 따라 해보기로 했다. 요리책 그 이상의 작품이 나왔다.

  • 오웰의 장미
    리베카 솔닛 (지은이), 최애리 (옮긴이) | 반비 | 2022년 11월 "은유, 정여울 추천, 우리의 저항엔 장미도 있다"

    짙은 허무를 반복해서 말하던 이가 단단히 믿고 있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할 때, 거친 투쟁의 표상인 이가 작고 귀여운 행복의 소중함에 대해 말할 때, 그 의미와 행복의 가치는 거대하게 다가온다. 마치 희망 같은 느낌으로. 이번 신작에서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의 우리가 알지 못했던 면모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충만한 기쁨을 놓치지 않는 정원가 오웰의 모습은 투사의 낯선 이면이다.

    책은 솔닛이 오웰이 심고 가꾸었던 장미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장미, 그가 심은 것이 장미라는 데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자가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되지만, 장미를 심는다는 것은 너무도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장미는 아무래도 실용이기보다는 기쁨이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오웰을 염두에 둘 때, 오웰의 저작들에선 새로운 것들이 발견된다. 투쟁의 뿌리에 있는 실천적 희망, 거대한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생활인의 뚝심...

    오웰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저항들에까지 뻗어간다. 여성 참정권 운동, 기후위기, 콜롬비아의 장미 산업까지. 오웰에게서 발견한 진실을 솔닛은 우리가 몸담은 저항에서도 기억하길 바란다. 저항과 기쁨은 함께 할 수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투쟁을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이 새로운 희망의 책에 대해 은유 작가는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겠다는 오웰의 다짐이 솔닛을 통해 구현"되었다며 추천했다.

  • 노마드 투자자 서한
    닉 슬립, 콰이스 자카리아 (지은이), 생각의여름(김태진), generalfox(변영진) (옮긴이) | 더퀘스트 | 2022년 11월 "전설의 투자자 서한, 드디어 정식 출간"

    2022년 초, <노마드 투자조합 투자자 서한>이라는 낯선 이름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거듭하며 퍼져나갔다. ‘노마드 투자조합’은 피터 린치의 ‘마젤란 펀드’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펀드는 아니지만, 2001년부터 2013년까지 약 13년간 누적 수익률 921%라는 기록을 달성한 전설적인 존재다. 이 펀드를 운용한 닉 슬립과 콰이스 자카리아는 13년 동안 1년에 두 차례씩 투자자들에게 비공개 서한을 보냈는데, 대중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들의 성향 때문에 이 서한들은 노마드의 인사이트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투자의 고수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공유되어왔다.

    2021년 초, 코로나19가 촉발한 전 세계적인 주식 광풍 속에 자신들이 쓴 서한에 이상한 내용이 추가된 비공식 버전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자, 두 사람은 서한의 원본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자선재단 홈페이지에 공유하였다. 그러자 노마드를 존경하는 한국의 대학 친구 두 명이 무턱대고 자선재단에 연락해서 한국어 번역을 허락 받았고, 2021년 9월 비영리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통해 한국어판이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후 독립출판물로도 출간되어 단기간에 3000부 가량이 전량 배포되었으며, 재고가 소진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구매 문의에 드디어 정식 출간되었다. 이제 그 ‘전설의 책’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주성치의 영화 ‘쿵푸 허슬’에 나오는, 절세 무공 비급을 파는 거지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12.62022
  • 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은이), 김선형 (옮긴이)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

    족쇄 같은 일상을 탈출해 낯선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이 있다. "미친 듯 돌아가는" 뉴욕의 직장을 그만두고 숲으로 둘러싸인 소도시에서 아침을 맞는 남자,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 유년이 고스란히 잠든 고향으로 도망친 여자, 수녀원에서 여자로 키워지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소년, 처음으로 직장을 결근해버린 중년 여성과, 대도시로 이사 와서 학교에 갈 걱정에 시달리는 아이, 그리고 고향을 탈출한 거미까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다리를 불살라 버렸기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해방되어 새로 맛본 자유는 너무나 달콤하지만, 타인이 제멋대로 내리는 판단과 적대적인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으로 치닫기도 한다.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 같은 순간의 우울, 그럼에도 새로운 자극에 다시 환희로 빛나는 감정의 격변을 작가는 세심하게 포착해낸다.

    그 모든 곤경과 아픔에도, 하이스미스의 인물들에게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나의 세계를 부수고 나온 이들이기에. 소설 속 '프림로즈색'이 노란색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플레밍씨처럼 그래야만 하는 것에 매달리는 자들, 오해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상대방의 본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는 자들과 다른 운명을 지닌 이들이기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날카로운 문체가 빛나는 소설집.

  • 돌봄과 작업
    정서경, 서유미, 홍한별, 임소연, 장하원, 전유진, 박재연, 엄지혜, 이설아, 김희진, 서수연 (지은이) | 돌고래 | 2022년 12월 "정서경, 임소연, 엄지혜... 엄마와 창작자로 사는 일"

    아이를 낳은 적도, 낳을 계획도 없는데 여러 저자의 글 곳곳에서 울컥한다. 심지어 슬픈 내용도 아닌데. 이 책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여자 열한 명의 잉태와 양육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임소연은 이렇게 말한다. "양육 이야기 없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된다." 아마도 나의 울컥은 이 이야기들에 담긴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에 대한 감동으로부터 온 것 같다. 출산은 전과 후를 완전하게 갈라놓는 사건이고, 양육은 농도가 짙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므로 저자들이 통과한 깨달음들이 너무나 절절하다.

    지구인의 육아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외계인에게 이 책을 쥐여준다면 이렇게 정리할 것 같다.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해내던 여자들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 그리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삶을 탄생시키는 것. 정서경은 출산과 양육 이후로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홍한별은 '아이들은, 아이들이 자라서 된 모든 어른은, 세상의 모든 여리고 약한 자들은 가엾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임소연은 사랑과 연대로서의 '여자 됨'을 자각하게 되었고 엄지혜는 타인을 돌보는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여자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 양육이라는 일, 보편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이 일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지, 들을수록 신비하고 이제서야 신비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 기이하다. 뭉뚱그려 형성된 엄마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여자들이 어느 날부터 삶의 일부를 헐어 다른 인간을 키워내는 이야기의 구체성과 특수성을 면면이 듣고 싶다. 수많은 "위인"들의 탄생 설화처럼 나는 이제 수많은 여자들의 양육 경험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시작으로 쭉.

  • 테스터
    이희영 (지은이) | 허블 | 2022년 11월 "<페인트>, <나나> 이희영의 디스토피아 SF"

    오방새를 복원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제 발로 동굴에 들어섰다. 빛나는 꼬리로 어두운 동굴을 환하게 비추는 '레인보우 버드'를 복원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욕심은 RB 바이러스의 복원을 유발했다. RB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햇빛 알레르기로 바깥과 접촉할 수 없는 백색 소년 마오는 숲속 집에 갇혀 메이드 로봇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마오는 바이러스의 또 다른 생존자인 하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마오는 삶을 얻고 싶다. 하라를 '테스터'로 사용해서라도.

    입양될 아이가 자신을 양육할 부모를 면접을 통해 선택하는 소설 <페인트>와 자신의 육체에서 튕겨져나온 내가 일주일 간 나를 향해 여행하며 돌아가기를 선택하는 소설 <나나>로 알려진 이희영이 디스토피아 SF를 들고 돌아왔다. '테스터'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지구라는 테스터를 벗어나 화성으로 떠나려는 인간의 탐욕을 깊이 고민하게 한다. 내가 마오라면, 내가 하라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희영 작가의 소설답게 선택의 이유를 둘러싼 이야기가 완독 후에도 남는다. 한국과학문학상을 출간하며 김초엽과 천선란의 이야기를 발굴한 출판사 허블이 청소년도 함께 읽는 '허블 청소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이 이야기를 내놓았다.

  • 내 아이의 말 습관
    천영희 (지은이) | 웨일북 | 2022년 11월 "아이의 말 속에 육아의 답이 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의 많은 모습에서 부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부모들이 아이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고민하는 사이 정작 아이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아이는 많은 말들을 쏟아 낸다.

    "이거 해도 돼요? 먹어도 돼요? 다 혼났으니깐 이제 놀아도 돼요? 저 칭찬해 줘요! 친구가 나랑 안 논대요."

    <내 아이의 말 습관>은 평소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을 통해 아이의 '마음 신호'를 읽는 법을 알려준다. 불안, 탐구, 재미, 주도, 사랑, 감정 등 6가지 언어 유형으로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숨은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경청 솔루션을 제공한다. 또한 아이의 성향과 상황에 맞춰 그림책을 읽어 줄 수 있도록 '그림책 경청법'도 제공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아이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은 '아이의 말'에 집중했던 까닭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내던 부모의 놀라운 능력은 아이가 커가면서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바쁨을 핑계로 '아이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아이가 잘 듣는지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시 아이의 말에 집중하면 좋겠다. 부모의 말 공부보다 내 아이의 말 공부가 먼저다.

12.92022
  •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은이), 백수린 (옮긴이) | 레모 | 2022년 11월 "2022 노벨문학상 아니 에르노 신작, 백수린 번역"

    1958년, 열여덟 살의 여름에 일어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 그 여름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60여 년이 흘러야 했다. 그간의 어떤 작품에서도 언급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몇 번이나 펜을 들어보았지만 그때마다 무기력에 빠져 중단했다. 그 기억의 구멍을 차라리 잊은 채 살아가고 싶었던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처절한 결심으로 겨우 글을 완성했다고 한다. 쓰이지 않는다면 그 아이가 경험한 것은 영원히 설명되지 못한 채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므로.

    차마 그 수치심의 기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작가는, 한때 '나'였으나 이제 내가 아닌 '1958년의 여자아이'를 '그녀'로 분리하여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조금씩 다가간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여름방학 캠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녀. 순식간에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야 했던 그녀를, '나'는 완전히 버려두었다. 심지어 '나'는 그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교수자격증을 따고 글을 쓸 예정인 똑똑하고 단정한 문학 전공 여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캠프 장소를 찾아가 그 기억을 끊어내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기억의 대면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에르노는 "삶을, 시간을 붙잡고 이해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그 순간에는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완전히 부재한 상태이기 때문에, 글쓰기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그렇게 그 순간들을 끌어당겨 겨우 기억의 중심부로 다가간 '나'는 그녀를 기어이 구출해낸다.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선언한다. 그녀는 나고, 나는 그녀라고. 바로 그녀로부터, 추락에서 추락으로 이어져 글쓰기라는 안식처로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나 내게 강요된 타자의 법칙 앞에 압도되어 자신을 상실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백수린 역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 거인의 어깨 1
    홍진채 (지은이) | 포레스트북스 | 2022년 12월 "거장의 어깨 너머로 배우는 투자의 본질"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이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이라는 뉴턴마저 그보다 먼저 있었던 누군가의 고민과 노력에 기대어 성취를 이루어 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수많은 세대가 노력한 결과물 위에서 새로운 발자국을 뗀다. 위대한 거인들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그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서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식 투자의 세계에도 위대한 거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벤저민 그레이엄, 워런 버핏, 피터 린치. 대가로 불리는 이들의 투자 철학과 방법론은 직접 저술한 저서나 주주 서한 모음집 등 다양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으며, 투자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들을 탐독한다고 해서 쉽게 그들처럼 투자의 고수가 되지는 못한다. 단숨에 올라서기에는 거인들의 어깨가 너무 높은 것일까. 오를 곳이 너무 높다면, 사다리를 놓고 한 단 한 단 천천히 올라가 보자. 이 책은 현대 주식투자의 시작과 성장, 대가들의 투자법이 정립되는 과정을 통해 투자의 본질을 통찰하게 한다. 19년간 초과 수익을 달성한 홍진채 저자가 짚어주는 대가들의 철학과 그 해석에서의 통찰은 우리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기 위해 밟고 올라갈 사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대런 바일러 (지은이), 홍명교 (옮긴이) | 생각의힘 | 2022년 11월 "강화길 추천. 21세기 최악의 인권 유린을 파헤치다"

    신장 위구르를 대상으로 한 중국 당국의 인권 유린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류학자 대런 바일러는 중국 내 무슬림 인구에 대한 탄압을 24개월 이상에 걸쳐 연구하여 이 책에 담아냈다. 2022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믿기 힘든 참혹한 현실이 생생하다.

    신장 위구르의 수용소 위성 사진이 밝혀진 후, 중국 당국에서는 이를 "직업훈련 프로그램"이라 변명했다. 그러나 생존자 베라는 수용소에 감금된 첫날, 동료 수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안네 프랑크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아요." 수감된 인원 추정 150만 명.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이 일상을 살다가 수용소로 끌려가 인권을 박탈 당한다.

    바일러가 중요하게 꼽는 이 탄압 시스템의 특징은 첨단 기술을 동원한 감시다. "예비 범죄자"를 식별해 내기 위한 전 거주민의 생체 인식 데이터 수집과 스마트폰 내 추적... 족쇄로 기능하는 기술의 배경엔 실리콘밸리가 있다.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세련된 이미지의 실리콘밸리와 인간성을 말소하는 신장의 수용소, 책은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짚어낸다. 복잡하게 좌절스러운 현실을 면밀히 폭로하는 책이다.

  • 존엄을 외쳐요
    김은하 (지은이), 윤예지 (그림) | 사계절 | 2022년 12월 "나의 존엄 뿐 아니라 너의 존엄을 위해서"

    세계 인권 선언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 선포되었다. 국제연합총회는 세계 인권 선언이 "모든 사람과 국가가 성취하여야 할 공통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길 바라며 총 30개의 조항을 공표하였으며 현재까지 인용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인권선언의 존재와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말이다.

    <존엄을 외쳐요>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어휘와 그림으로 '존엄'에 대해 풀이했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당연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의 권리다. 내가 이 나라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동권), 휴식이 보장된 주말에 잠을 청하는 것(휴식과 여가의 권리) 같이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피부색이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종교, 언어, 국적이 달라도 가난하건 부자건, 지위나 신념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제2항). "나는 너의 존엄을 지켜 줄 의무가 있"다. "다른 이들의 존엄을 해치는 권리와 자유는 제한받"는다. "우리는 모두가 존엄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제 29조).

    주위를 둘러보라. 나만 아닐 뿐(혹은 나일 때도) 반드시 누군가는 자신의 존엄을 침해받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존엄하다, 우리는.

12.132022
  • 이야기들
    로디 도일, 조이스 캐롤 오츠, 조안 해리스, 닐 게이먼, 마이클 마셜 스미스, 조 R. 랜스데일, 월터 모슬리, 리처드 애덤스, 조디 피코, 마이클 스완윅, 피터 스트라우브, 로런스 블록, 제프리 포드, 척 팔라닉, 다이애나 윈 존스, 스튜어트 오넌, 진 울프, 캐롤린 파크허스트, 캣 하워드, 조너선 캐럴, 제프리 디버, 팀 파워스, 알 사란토니오, 커트 앤더슨, 마이클 무어콕, 엘리자베스 핸드, 조 힐 (지은이), 닐 게이먼, 알 사란토니오 (엮은이), 장호연 (옮긴이)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닐 게이먼 기획, 작가 26인의 앤솔러지"

    어른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 아이였던 닐 게이먼.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는 항상 손 닿는 곳에 책이 있어야 했고 언제나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책 속의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그곳에 내가 있었"던 경험으로 남기에 이야기를 계속해서 갈구했다.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한 번씩은 느껴보았을 황홀한 체험. 닐 게이먼은 이를 "소설이 주는 마술"이라 칭한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고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동시에 읽고 싶었던 닐 게이먼은 동료 작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같이 쓰자고 제안했다. 판타지, 호러, SF로 구분된 '장르'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한 상상력의 놀이터에서 함께 마음껏 뛰어놀자는 초대장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와 로런스 블록, 제프리 디버를 포함해 26명의 작가들이 응답하면서 이 책이 탄생했다. 기획자 닐 게이먼의 바람은 단 하나다.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독자가 이 한마디를 내뱉는 것. 이야기의 존재 이유를 그대로 품고 있는 한마디의 말이자, 흠뻑 몰입한 이야기가 끊겼을 때 나오는 단 한마디의 말.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편향의 종말
    제시카 노델 (지은이), 김병화 (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편향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저자 제시카 노델은 서문에서 우리의 편향과 차별에 대한 사례들을 한 페이지에 가까이 읊는다. 범죄 경력이 있는 백인 취업 준비생은 범죄 경력이 없는 흑인 응시자에 비해 2차 면접을 치를 확률이 더 높다. 비만 아동은 날씬한 학생보다 교사로부터 학업 능력을 의심받을 확률이 더 높다. 여성이 말하는 의학적 징후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확률이 낮다... 줄줄이 억울한 명제들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의 편향적 사고는 본능적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진실도 있다. 편향적 사고는 갈등을 만든다. 사회의 부정적 긴장을 높이고 효율을 낮춘다. 억울한 삶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럼 이제 당연한 질문으로 넘어갈 때다. 우리는 어떻게 편향과 싸울 수 있을까?

    자신의 사고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이자 1차적 해결책이다. 그러나 의무는 개인의 양심에 온전히 기대야 하고,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편향은 여전히 치명적일 수 있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그다음을 내놓는다는 데에 있다. "편향의 회로를 끊는 새로운 설계"의 제시. 노델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대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현 사회에서 즉각 적용 가능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미국의 경찰, 병원, 유치원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끌어낸 방법들이다. 노델은 행동에 대한 '설득'보다 '설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카트리네 마르살의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과학이 여성에 대한 차별로 인해 놓친 수많은 혁신의 기회들을 소개한다. 인류의 일부에 대한 차별은 늘 인류 전체에 대한 해악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조직 경영에 있어 편향을 소거하는 설계를 고려한다면, 이는 단지 도덕적인 일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본능적 편향 사고를 넘어설 수 있는 과학적 설계, 우리가 문명에 기대하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 찰리 멍거 바이블
    김재현, 이건 (지은이) | 에프엔미디어 | 2022년 12월 "멍거가 설계하면 버핏이 실행한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를 ‘설계’한 이는 멍거이고 나는 실행만 했을 뿐”이라고 평한 인물 찰리 멍거. 그의 유일한 책 <Poor Charlie’s Almanack>의 해외 출간이 허용되지 않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드디어 베일에 가려진 그의 철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하워드 막스, 모건 하우절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이 입 모아 칭송하는 ‘현인들의 현자’ 찰리 멍거이지만, 그간 국내 독자들에게는 버크셔의 이인자, 버핏의 오른팔 정도로 단편적인 모습만 알려져 있었다.

    이 책은 멍거의 유명 강연과 주총 질의응답을 주제별로 엮고 저자들의 해설을 더해 구성했다. ‘가격이 잘못 매겨진 베팅의 기회, 격자틀 인식 모형, 능력범위, 롤라팔루자 효과’ 등 남다른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세상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관심사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왜 그가 심리학과 다학제를 그토록 중시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집중 투자와 분산 투자, 투자 결정을 위한 체크리스트, 오판의 원인과 극복 방법 등 투자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언도 가득하다. 멍거는 1924년생으로, 이제 곧 100세가 된다. 이 책의 출간으로 그동안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멍거의 철학과 사상이 늦게나마 조명받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슈퍼 토끼의 결심
    프란치스카 비어만 (지은이), 송순섭 (옮긴이) | 주니어김영사 | 2022년 11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면"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리의 갑충이 되고 만다. 갑충이 되어 본 세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모두 그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로베르트는 갑자기 토끼가 된다. 그렇게 싫어하던 당근과 오이가 제일 맛있는 토끼 말이다. 토끼가 되고 보니 학교 목장에 있는 염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염소들은 괜히 우는 게 아니었다. 관리인이 염소들에게 밥을 덜 주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우는 거였다. 체육관 부지에 살고 있던 전설의 고대 토끼들은 거대한 토끼 로베르트가 자신들을 구해 줄 영웅이라고 말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토끼가 되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이야길 들어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체육관 건설을 막아야 한다!

    재치 넘치는 글쓰기로 어린이 독자를 매혹시키는 프란치스카 비어만은 이번엔 토끼를 주인공 삼아 인간이 아닌 다른 것들 - 벌, 새, 나비, 지렁이, 염소 등등 -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면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새로운 관점과 생각이 떠오른다"는 어쩌면 당연한 명제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들은 이 땅을 단지 잠깐 빌린 것임을 유쾌하게 그려낸 이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생태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인지시켜줄 것이다. 거대한 토끼로 변하지 않아도 세상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12.162022
  •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은이), 박영인 (옮긴이)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2022년 세계 범죄문학상을 휩쓴 소설"

    어느 봄날, 중년의 두 남성 아이크와 버디가 장례식장에서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인종과 살아온 환경을 비롯해 무엇 하나 접점이 없어 일상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을 두 사람. 아니 어쩌면 편견에 가득 차 서로를 증오했을 그들의 아들들은 결혼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끝내 아들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모질게 대했다. 그런데 아들 부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경찰 수사는 아무런 진전이 없고, 그저 원한에 의한 살인 같다는 추측이 나올 뿐이다. 참다못한 버디는 아이크를 찾아가 이 사건을 함께 조사하자고 제안하지만 아이크는 거절한다. 누군가 아들 부부의 묘비를 훼손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아이크는 버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들들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하던 두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범인을 찾아내리라고 결심한다.

    신인 작가로 2021년 앤서니, 배리, 매커비티, 국제스릴러작가협회상 등 세계 유수의 범죄문학상을 휩쓴 <검은 황무지>에 이어 올해도 같은 상들을 수상하며 영미 문학계를 뒤흔든 S. A. 코스비의 신작. 마이클 코넬리가 "대단히 훌륭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S. A. 코스비는 범죄소설계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문학계의 미래다."라고 상찬했고, 이언 랜킨이 "이런 강력한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라고 추천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탑건 : 매버릭'의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으로 영화화가 확정되기도 했다.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지은이)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가장 투명한 부위가 시가 되는 것"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고명재의 첫 시집. 내 안에 고인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시인은 그 사랑의 환한 노란 빛을 옮겨적어 시를 짓는다. 자신을 기른 비구니들의 사랑, 밥을 지어 팔아 생계를 꾸린 가족의 사랑. 사랑에선 제철음식 맛이 난다. 잘 말린 대추의 반들거림, 거의 다 탄 쑥의 냄새, 좋은 튀김에서 나는 여름옷 같은 소리, 페이스트리가 부풀기를 기다리는 시간... 2장에 배치된 시 <소보로>는 삶이 시가 되는 시간, 그 순간의 시 되기를 이렇게 적는다.

    그때 나는 빵을 물면 밀밭을 보았고
    그때 나는 소금을 핥고 동해로 퍼졌고
    그때 나는 시를 읽고 미간이 뚫렸다
    그때부터 존재할 수 있었다

    시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빵에서 밀밭으로, 소금에서 동해로 퍼져나가는 이 감각을 따라 나의 가장 투명한 부위가 부푸는 시간을 같이 겪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부모는 늙어버렸다'는 비유(<일흔> 중)로 누워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핥는 내 아버지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떠올렸고,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떠난 사람이 캄캄하게 보고 싶어서'라는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중) 문장을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60대와 꼭 닮은, 60대인 엄마의 자는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 많은 것을 겪고도 아직 우리에게 구체적인 맛의 감각이 남아있다는 것, 여전히 생을 사랑하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 본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 <자유형>의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새해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물레 감듯 모든 걸 안고 나아가세요.

  • 내향인을 위한 심리학 수업
    최재훈 (지은이) | 미래의창 | 2022년 11월 "내 성격을 잘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

    삶이 그저 쉽기만 한 사람은 없겠지만 내향인은 유독 고통의 원인을 성격에서 찾게 되는 일이 잦다. 군중 앞에서 조금만 덜 떨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한 일을 조금만 더 드러낼 수 있다면,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조금만 덜 불편할 수 있다면... 이런 후회와 자책으로 오늘도 출처가 불분명한 심리 테스트를 전전하고 있는 내향인이라면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향인이 외향인처럼 사는 방식을 알려주는 내용은 아니다. 진짜 내향인이라면 그간의 삶의 경험을 통해 그런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내향형이라는 성격의 특성을 온전히 파악하고 조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떤 증상이든 이름을 붙이면 고통이 반감되는 법! 마음공간을 운영하는 심리 전문가로서 저자는 내향인의 마음 이모저모를 들여다보며 이름표를 붙여주고, 마음의 굳은 근육을 푸는 꿀팁을 아낌없이 알려준다.

    책은 내향인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지만 외향인도 적극 환영한다. 어느 하나의 면모만으로 100퍼센트 채워진 인간은 있을 리 없고, 책이 담고 있는 심리학 지식들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누구라도 머리에 새겨볼 만한 내용이다. 연말의 헛헛한 마음을 돌보고 싶은 모든 내/외향인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 100곰
    나비야씨 (지은이) | 비룡소 | 2022년 12월 "제2회 비룡소 사각사각 그림책상 대상작"

    '100곰' 제목을 보자마자 아들의 어린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아들은 책에서 백(白)곰을 보고는 집안 어딘가에 있는 백(白)곰 인형을 꺼내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90곰'이야!' 과거의 일화를 떠올리며 내용 또한 어느 정도 예상하고 그림책을 펼쳐들었다.

    과연 예상한 대로 <100곰>은 '숫자 그림책'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왼쪽에는 숫자가, 오른쪽에는 곰이 나온다. 숫자 1, 곰 한 마리, 숫자 2, 곰 두 마리...그렇게 100까지 이어지다가 다시 0이 되며 이야기는 끝난다. '적음'의 표현부터 '많음' 그리고 '없음'의 표현까지 아이들이 숫자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니다. <100곰>은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그림책'이다. 늘어나는 숫자와 곰 그리고 작아지는 빙산, 높아지는 해수면... 작가는 치밀한 디테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숫자 그림책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 메시지는 강력하다.

    <100곰>은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깊어지는 그림책이다.'라는 심사평처럼 숫자 놀이하듯 아이들이 쉽고 빠르게 넘겨 볼 수도 있고, 부모와 함께 그 의미를 생각하며 볼 수 있는 그림책이다. 처음과 끝에 똑같이 '고요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은 평온하고 끝은 적막하다.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12.202022
  •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
    김원우 (지은이) | 아작 | 2022년 12월 "2022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작"

    광화문 광장에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 불시착했다. 이 문장을 놓고 어떤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영화 <컨택트>처럼 드니 빌뇌브적인 고요함? 뉴욕을 침공한 <어벤져스> 속 외계인들의 물량공세? 소설가 김원우는 이런 풍경을 상상했다. 개천절에 출근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외교부 직원은 외계인이 불시착하는 걸 목격하자마자 '휴일인데 과장한테 전화해도 되나?'(83쪽)를 고민하고, 미국인은 외계인이 상륙한 곳이 아메리카가 아니라는 사실에 상심하고, 한국 정부는 '관광 상품'으로 국가 원수들에게 자몽을 닮은 이 외계인과 사진찍을 수 있는 권리를 팔며 으스댄다. 유튜브엔 외계인이 이번 독감의 원인이라는 가짜 정보가 난무하고, 외계인 테마주가 화제에 오르내리고, 어떤 종교단체장은 외계인에게 '세례'를 시도하다 제지당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런 현상을 비웃다 '자필 사과문'을 올리기도 한다.) 이 왁자지껄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의 어떤 조각이 당신의 유머감각과 통하는 바가 있다면, 이 우주 활극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스타트렉>의 열렬한 팬이며, 잠시 아이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나영은 '자몽'에 대한 집착으로 2020년에만 네 편의 논문을 썼다. 외계인에 대한 연구에 실패한 각계의 전문가들은 자몽 전문가로 학계에 알려진 나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영은 '자몽의 생산과 변이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외계인이 자몽을 닮았다는 것과 나영이 오노 요코의 '자몽' 작품집에 대한 미술 평론을 썼다는 것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어 나영이 이 위기에서 세계를 구해야 한단 말인가? 바로 이 수다스러움에서 어떤 유머와 재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역시 이 소설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곧 공개될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김원우는 '크리스마스'와 '인터내셔널'을 함께 놓은 제목에 대한 질문에 "저에게 있어 '인터내셔널'만큼 평화와 가까운 단어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저항과 투쟁과 유머와 평등이 함께 놓인 자리에서, 그의 우상인 코니 윌리스의 소설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가능성을 찾아내는 사람들'(69쪽)의 투쟁이 시작된다. 도서관에 얽힌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지금 우리가 발딛고 선 이곳에서 이어나갈 싸움까지 이어지는 활달한 SF를 크리스마스에 읽을 것을 권해 본다. 김초엽, 이다혜, 민규동이 심사한 제2회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 우리와 그들의 정치
    제이슨 스탠리 (지은이), 김정훈 (옮긴이) | 솔출판사 | 2022년 12월 "위태로운 시대의 필독서"

    세계에 부는 극우 바람이 피부로 느껴질 때마다 두려움이 인다. 한때 충격적이었던 혐오는 어느새 일상적 언어가 되고 있고 당연하던 보편적 가치들은 그 색이 바래는 중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가 파시즘을 떠올릴 때 우리에게 유난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들이 누군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누구에게든 칼을 쥐여줄 수 있다. 파시스트 정치도 그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꼼꼼히 지켜볼 수 있다면 파시스트를 가려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생계는 머리와 손발을 가만두지 않는다. 모든 언론을 살피며 비교해 보기엔 시간도 체력도 역부족이다. 이런 우리에겐 현실의 흐름을 정확히 읽도록 도와주는 책이 필요하다. 예일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파시스트 정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전술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다. 책 한 권만으로 세계 정치를 꿰뚫는 통찰을 가질 순 없겠지만, 이 책은 분명 눈을 번쩍 뜨도록 한다. 책에서 나열하는 파시스트 정치의 징후가 구체적이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많은 문장들에서 소름이 돋을 것이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정당한 전술과 파시스트 정치의 음흉한 전술의 차이를 인식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목적에 충실하게, 책은 읽기 편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많은 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진실과 거짓을, 진심과 기만을 함께 가려낼 수 있길 바란다. "정치는 다 똑같지."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다.

  • 물 요정의 숲
    히로시마 레이코 (지은이), 해랑 (그림), 김정화 (옮긴이) | 길벗스쿨 | 2022년 12월 "<전천당> 히로시마 레이코의 데뷔작"

    깨끗한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 요정은 어른 물 요정이 되기 위해 평생 딱 한 번 뭍을 향한다. 그 숲 깊은 곳 호수에서 보름 동안 머물어야 비로소 성체가 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물 요정을 노리는 적이 많다. 맑은 물을 독으로 오염시키는 괴물고기 우라는 물 요정을 이용해 배고픔을 채우려 한다. 물 요정 나나이는 우라의 표적이 되었지만 용감한 소년 타키를 만나면서 우라로부터 벗어나 간신히 성체가 된다.

    인간과 물 요정 두 존재는 전혀 다른 타인이지만 우정이라는 덕목 아래 통과의례를 겪으며 한 걸음 더 성장한다. 이 성장은 누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들 스스로 성취한 것이라 더욱 눈부시다. 일본 주니어 판타지 소설상 대상을 수상한 <물 요정의 숲>이 소개되며 히로시마 레이코가 쌓아가고 있는 세계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바젤탑
    아담 레보어 (지은이), 임수강 (옮긴이) | 더늠 | 2022년 11월 "금융으로 쌓은 바벨탑"

    스위스 바젤 중앙역이 내려다보이는 시내 한복판, 원통형 탑처럼 보이는 한 빌딩에 국제결제은행(BIS)이 있다. BIS는 국제금융의 중추 기관으로 한 세기 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 시작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전쟁 배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립한 국제기구이며, 스위스 바젤에 본부를 두고 홍콩과 멕시코시티에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60여 개 국가의 중앙은행이 가입해있으며,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1996년 9월 33번째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보다 먼저 설립된 기관으로, 수십 년 동안 BIS는 돈, 권력, 그리고 은밀한 세계적 영향력의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보통 사람들은 BIS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이 책은 세계 중앙은행들의 은행이라 불리는 BIS의 역사에 대한 책으로,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BIS와 국제금융이 얽힌 사건들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스스로 금융 분야의 중립적인 테크노크라트라고 주장하는 중앙은행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저자는 BIS와 중앙은행이 정치적인 성격의 조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주장한다. 이자율이나 화폐 공급량과 같은 중앙은행가들의 결정은 고도로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결정이 다수 대중에게 상이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가 필요함을 주장하며, BIS의 비밀주의를 폐기하고 전문가주의를 민주적 통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경우 성경 속 바벨탑처럼 금융으로 쌓은 이 탑도 무너질 수 있음을 제목으로 암시하고 있다.

    2022년 8월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유의미함을 실감케 하는 가운데, 이 책이 올바른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을 정립하고 민주적 통제를 고민하는데 유의미한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12.232022
  • 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은이), 유혜인 (옮긴이)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미국도서관협회 선정 최고의 소설"

    1426년 조선, 제주의 한 마을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다. 이름 높은 수사관 민제우가 이 실종 사건 수사를 위해 제주로 떠나지만 그 자신도 실종된다. 그가 남긴 일지에는 피해자들이 절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검시할 새도 없이 시신이 바로 매장되어 사건의 내막을 밝히기 어렵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소설은 그의 딸 민환이가 남장을 하고 제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면서 시작한다. 그의 봇짐 속에 아버지의 일지가 있다. 누군가 불에 타다 까맣게 그을린 일지를 민환이에게 보낸 것이다. "저 섬에 있는 게 너를 죽일지도 몰라." 마음속 두려움이 속삭이지만 민환이는 기필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한다.

    '미국도서관협회 선정 최고의 소설', '포브스 선정 2022년 가장 기대되는 작가' 등 세계에서 먼저 주목받은 작가 허주은의 장편소설. 작가는 자신이 쓰는 책들은 "전부 한국 역사에 바치는 러브레터"이며 "책장을 넘기는 동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환상의 세계로 같이 빨려 들어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한다. 천선란 작가가 "오래도록 삶을 엿보고 싶은 인물을 만났다."라고 추천하며 함께 읽은 책.

  • 에도로 가는 길
    에이미 스탠리 (지은이), 유강은 (옮긴이) | 생각의힘 | 2022년 12월 "2021 퓰리처상 전기 부문 최종 후보작"

    19세기 일본의 여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역사학 교수인 저자 에이미 스탠리는 쓰네노라는 여성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과 시대 배경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추적한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고향을 떠나 크고 복잡한 세계인 에도로 향하는 삶을 산 쓰네노. 책은 그의 출생적 배경, 억지로 맺어진 결혼과 실패, 그 시절 여성에게 으레 가해지던 여러 당위적 굴레들과 거부, 결혼 실패의 반복과 그가 나아가고자 했던 삶의 방향 등을 촘촘히 정리하여 재구성한다. '전통적 여성의 삶'을 거부한 한 여성의 일생을 책은 생생하고 충실하게 펼쳐 놓는다. 앞뒤 사정이 잘 갈무리되어 소설을 읽는 듯 선명하다.

    현실은 늘 소설을 뛰어넘는다. 19세기 에도의 어지럽게 치솟는 에너지, 그 속에서 희망을 갖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 지금 우리가 속한 곳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는 마음을 붕 뜨게 만든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이 "도쿠가와 시대 에도(지금의 도쿄)에 살던 하층 여성의 삶과 생각을 이렇게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중략)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 생겼다."라며 추천했다.

  • 안젤리크
    기욤 뮈소 (지은이), 양영란 (옮긴이) | 밝은세상 | 2022년 12월 "기욤 뮈소, 무용수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직 에투알 무용수 스텔라 페트렌코가 6층 자택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구인 현관문이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어, 경찰은 스텔라가 발코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한다. 그러나 어머니 스텔라의 죽음 뒤에 무언가 더 있다고 느낀 딸 루이즈는 전직 강력반 반장 마티아스를 찾아가 재수사를 의뢰한다.

    스텔라의 집을 둘러보던 마티아스는 벽에 걸린 초상화가 눈에 밟힌다. 그것은 화가 마르코의 그림이었다. 마르코는 스텔라의 집 바로 위층에 거주하던 유명 명품 브랜드 '아쿠아알타'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6층의 발레리나와 7층의 화가가 이틀 간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마티아스는 독자적인 수사를 시작하고, 스텔라의 죽음에 가려진 거대한 비밀을 맞닥뜨린다. 파리와 베네치아를 오가며 펼쳐지는 기욤 뮈소 신작 스릴러.

  • 총상 입은 밤하늘
    오션 브엉 (지은이), 안톤 허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당신은 오션 브엉을 기억하게 된다"

    T.S.엘리엇상, 휘팅상, 톰건상, 포워드상을 수상한 오션 브엉의 첫 시집이 국내에 소개된다.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을 번역해 2022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한 안톤 허가 번역을 맡았다. 오션 브엉은 2019년 베트남계 이민자이자 작가이자 퀴어인, 실제 오션 브엉의 삶을 닮은 이야기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라는 소설로 국내 독자를 처음 만난 작가다. 시는 소설보다 대담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넘나들며 아픔과 환희가 교차하는 삶의 순간을 그러모은다.

    넌 책 속에서 마음껏 스스로를 잊지만
    절대로 신이
    자신의 손을 잊듯
    너 자신을 잊지 못할 거다

    (36쪽, <머리부터 먼저>)

    밤하늘을 보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속해 있다. 할머니 - 엄마 - 나의 계보는 내 피부에 흐른다. 한 인간은 자신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지금의 삶이 펼쳐지는 브루클린의 곳곳에도 베트남의 풍경이 함께 흐른다. 무성한 숲과 황토빛으로 흐르는 강과 소금기 절은 물과 밀림에 숨은 AK-47 소총. (베트남전에서 처음 사용된 AK-47 소총은 현재도 1억 정 가량 세계에 배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과 폭력은 오션 브엉의 탄생과 연결되어 있다. 폭탄 없음 = 가족 없음 = 나 없음. (92쪽)이라는 서늘한 등식과 함께 '수류탄에 입 맞추듯이' (93쪽) 이 삶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오션 브엉은 <언젠가 난 오션 브엉을 사랑할 거야>라는 시를 첫 시집에 실었다. 록산 게이, 황인숙 등의 작가가 먼저 사랑한 시인. 적어도 당신은 이 시인을 쉽게 잊지는 못할 것이다.

12.272022
  •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데이비드 이글먼 (지은이), 김승욱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뇌에는 종점이 없다."

    갓 태어난 인간의 뇌는 백지와 같다. 뇌의 성장은 다른 신체기관과 달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지 않으며, 오로지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삶의 경험에 따라 뇌가 매 순간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뇌는 우리가 경험한 "공간과 시간의 그릇"이 되고, 인간은 죽는 날까지 결코 완성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삶의 짜릿함은 우리가 지금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현재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가에 있다."는 선언과 함께 <더 브레인>의 저자 데이비드 이글먼이 뇌과학의 최신 이슈를 깊이 있게 소개한다. <연을 쫓는 아이>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모든 페이지가 마음을 꽉 채우는 아이디어와 눈부신 통찰력으로 가득하다."고, <진리의 발견>의 저자 마리아 포포바가 "겉보기에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이해의 총합처럼 완전히 맞춰질 때의 황홀함으로 가득하다."라고 말하며 함께 읽은 책.

  • 팩토피아 1 : 잡학 상식
    케이트 헤일 (지은이), 앤디 스미스 (그림), 조은영 (옮긴이) | 시공주니어 | 2022년 12월 "세상의 온갖 지식을 맛보는 팩트 세계"

    당연하게도 세상엔 많은 지식이 있다. 그렇지만 어떤 지식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른다. 대표적인 천재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이들을 위한 맛보기용 책이 있으니 바로 <팩토피아>다. 과학 이론, 역사, 동식물을 따로 소개하는 다른 도서들과는 달리 모든 지식은 결국 연결되어 있음을 점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빅뱅으로 인해 기인한 우주의 탄생과 대왕 오징어의 뇌가 도넛 모양이라는 게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만약 도넛 모양에 관심이 간다면 음식 이야기의 점선을, 대왕 오징어에 관심이 간다면 해양 생태 점선을 따라가면 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특한 구성은 독서 내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호기심을 자극하며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 것이다. 영국에선 연어를 수상하게 들고 있으면 불법이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나처럼 말이다.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백신애, 최진영 (지은이)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백신애의 소설을 최진영이 잇다"

    가족이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17쪽)라는 이유로 '광인수기'를 쓰게 된 여성이 있다. "세상에 제 한 몸만 위하고 제 마음의 자유와 기쁨만을 위한다면 이렇게 미치광이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요."(45쪽)라고 되묻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이 시대를 앞서간 이야기는 1930년대에 발표되었다. 2020년 소설집 <겨울방학>으로 제13회 백신애문학상을 수상한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의 최진영이 백신애의 미친, 정직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이어 썼다.

    '나에게도 갈 길이 명백히 나타났어요."(94쪽)라고 말하는 <혼명에서>의 인물처럼, 실제 백신애는 시베리아의 모험가로, 배우로, 항일 운동가로 짧은 생을 살았다.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의 순희와 정규의 이름이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 되살아나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인간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의 계보를 톺아보는 시리즈 '소설, 잇다'가 시작된다. 백신애와 최진영의 만남을 시작으로 강경애와 한유주, 김말봉과 박솔뫼, 이선희와 천희란, 지하련과 임솔아의 만남 등이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 생리는 처음이야
    하선영 (지은이), 이윤희 (그림), 임영림 (감수) | 작은코도마뱀 | 2022년 12월 "우리는 성장 중"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소설 <해리 포터> 속 마법사들은 볼드모트가 너무 무서워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오직 '그'라고만 할 뿐 혹시라도 이름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마법 세계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와도 볼드모트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생리다. 생리를 대체해서 부르는 말은 여러 가지다. '그날', '대자연', '마법'... 국제여성건강연합에 의하면 세계적으로도 월경을 뜻하는 은어는 5천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대체 생리를 생리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초경을 맞이한 12살 소녀들이 있다. 2차 성징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놀릴까 봐 두렵기도 하다. 생리통에 시달리고 또 생리통이 심하면 얼마나 심하겠냐는 빈정거림의 시선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양육자와 보건 선생님이 있다. 생리는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생리가 일어났을 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생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인류의 역사 기간 동안 서로를 도우며 성장하는 자들을 보살폈다. 이제는 긴 시간 동안 여전히 금기시되는 생리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 때이다. 생리는 감추고 쉬쉬해야 할 일이 아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동화 <생리는 처음이야>로 물꼬를 트는 건 어떨까.

12.302022
  • 당신의 창밖은 안녕한가요
    바르바라 뒤리오 (엮은이) | | 2022년 12월 "창문을 열면 어느덧 새해"

    2020년 봄을 우리는 역사적인 시점으로 기억할 것이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의 '코로나19 팬데믹' 선언과 함께 세계는 잠시 문을 걸어 잠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록다운이 이어지던 그 해의 봄, 벨기에의 프리랜서 디자이너 겸 사진작가 바르바라 뒤리오는 나의 창밖 풍경 (https://www.facebook.com/groups/viewfrommywindow/)이라는 페이스북 그룹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우리는 몇 주가 될지 모를 오랜 시간 동안 단 하나뿐인 풍경이 보이는 집에 격리될 텐데, 지구 반대편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9쪽)

    이 페이스북 그룹에 지금까지 342만명의 사용자가 자신의 창밖 풍경을 공유하며 참여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견딘 낡은 집의 강인함을 이야기하는 벨기에의 미셸의 창문, 텅 빈 거리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비둘기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남편을 보는 파리의 엘렉트라의 창문, 어머니 지구의 짧은 휴식으로 이 순간을 기억하는 쿠알라룸푸르의 일린의 창문 등이 눈에 들어온다. 260여 개의 창 밖 풍경과 서로를 응원하는 짧은 편지를 엮은 사진집이 2023년의 봄을 부른다. 창문을 열면 이제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 각자의 창으로 이웃을 초대하는 사진집을 들추어보며 새해 첫 공기를 맞이해 본다.

  • 파묻힌 여성
    마릴렌 파투-마티스 (지은이), 공수진 (옮긴이) | 프시케의숲 | 2022년 12월 "선사 시대 여성은 정확하게 해석되었는가?"

    선사 시대의 여성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인 인상을 떠올릴 것이다. 남성이 사냥, 낚시, 모험을 하는 동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풍만한 몸 모양의 조각상을 보며 또한 우리는 비슷한 해석을 할 것이다. 다산에 대한 기원을 담은 상징물. 우리가 머릿 속에 비슷한 것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마릴렌 파투-마티스는 묻는다. 그것은 누구의 해석이냐고.

    선사학은 19세기 중반에 생긴 신생학문이며 19세기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반여성주의적 이념이 팽배한 시대였다. 온전히 남아있는 설명적 요소가 없는 과거의 유물을 해석하는 데는, 해석자가 가진 시대적, 사상적 한계가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한 비난과 멸시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시작된 학문에 낀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은 지금의 시대가 떠맡은 책임일 것이다.

    하여, 이 책은 반여성주의적 시각에 파묻힌 선사 시대 여성을 다시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이 누구의 관점인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 면밀히 살펴 나간다. 선사 시대에 여성은 정말 남성보다 지위가 낮았나, 벽화와 조각은 남성만이 한 일일까. 저자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근거 없는 믿음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음을 알게된다.

    진실이라 믿어왔던 학문적 상식이 사실은 편향에 치우친 의견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지적한다는 공통점으로, 올해 큰 주목을 받았던 임소연 작가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과 함께 읽어도 재미있는 조합이 될 것 같다. 참신한 관점, 흥미로운 접근, 올해 출간된 페미니즘 도서들 중 손에 꼽을 만한 책이다.

  • 마케팅 설계자
    러셀 브런슨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 윌북 | 2022년 12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빵과 고기, 다양한 채소로 구성된 균형 잡힌 식단의 대표주자 햄버거를 먹기 위해 매장을 방문하여 키오스크 앞에 선다. 요즘 살이 좀 붙은 것 같아 감자튀김과 탄산음료를 피하고자 햄버거 단품을 고르지만, 눈치 없는 키오스크는 먹음직스러운 햄버거 세트의 이미지와 함께 세트 주문을 제안한다. 햄버거만 먹으면 목이 마를 것이며, 감자는 식물이니 샐러드나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결국 세트로 변경하고 결제 화면으로 넘어가려는데, 이번에는 사이드 메뉴를 변경할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와 함께 단돈 몇백 원만 더하면 감자튀김을 치킨 너겟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설계’한 구매 여정을 따라간 끝에, 결국 처음 골랐던 햄버거 단품 가격의 약 1.5배 가격을 지불한다.

    러셀 브런슨은 1,000억 원 규모의 마케팅 플랫폼 기업 ‘클릭퍼널스닷컴’의 설립자이자 대표로서 수많은 기업의 컨설팅을 진행해왔다. 그에게 컨설팅을 의뢰한 많은 기업들은 트래픽(방문)과 전환 문제를 호소해왔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는 카피도, 방문자 수도, 전환율도 아닌 ‘세일즈 퍼널’의 설계, 즉 첫 광고 카피를 쓰는 순간부터 고객이 구매 버튼을 누르는 마지막까지 판매의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마케팅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고객이 자연스럽게 판매자가 설계한 길을 따라가며 이탈 없이 최종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하는 저자의 노하우를 상황과 고객에 따른 맞춤 퍼널과 스크립트 예시와 함께 담았다.

  • 뒤라스×고다르 대화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뤽 고다르 (지은이), 신은실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한 세기에 관한 가장 강력한 증언"

    1979년, 1980년, 1987년 세 번에 걸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장-뤽 고다르가 나눈 대화가 엮여 책으로 나왔다. 둘은 자신들이 쓰고 만든 글과 영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 재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재현하는 방식, 배우들과의 작업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진다기보단 그 반대에 가깝다. 각자의 세계를 견고하게 만들어낸 두 대가의 대화는 서로 오해되고 엇갈리고 충돌한다. 그러나 어긋나는 대화의 에너지는 끝내 그들을 역설적 동맹으로 만들어 낸다. 배경지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한 대화인지라 책은 상세하고 많은 주석으로 이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