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아들 내외에게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몰래 택시를 불러 읍내 병원에 다녀오곤 했던 한 노인을 기억한다. 행여나 요양 시설에 들어가자고 할까, 아픈 몸을 이끌고 마을 회관 앞 공터까지 나가 택시에 오르면서 가족들이 깰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심신이 쇠약해지면 요양 시설에 입소하고 그곳에서 마지막을 맞는 것이 범상한 일이 된 지 오래지만, 가족의 힘만으로 돌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린 아마도 최선이라고 믿었던 결정을 노인은 한사코 거부했다. 요양 시설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노인에게는 마지막을, 그동안 맺어왔던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이 ‘어느 서민 여성’,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술회한다. 평생 노동계급으로 살았던 어머니가 건강 악화로 요양원에 입소한 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에리봉은 노년과 취약한 주체, 돌봄과 연대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마주한 것은 인간으로서 피해 갈 수 없는 질병과 고통받는 몸, 노화와 자율성의 상실, 열악한 공공 보건과 요양원의 현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같은 문제들이다. 어머니에 관한 개인적인 회고담에서 출발하면서, 저자는 ‘프랑스 노동계급 여성의 전형적 일생’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를 거쳐 다시 ‘노년’과 ‘노인’이라는 사회적 범주, 나아가 늙음과 장애를 숙명적으로 겪는 인간 주체의 취약성과 연대에 관한 이론적 성찰로 이야기를 확장해 간다. 결론에 이르러 저자는 자율성을 상실하고 요양원에 고립된 노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묻는다.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
AI의 등장은 직업의 소멸을 묻는 근원적인 두려움과 새로운 성취를 향한 설렘을 동시에 몰고 왔다. 누군가는 내 자리가 사라질까 전전긍긍하고, 누군가는 기술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기상조라 냉소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 있다는 점이다. 휴대폰이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었듯, 이제 인공지능을 다루는 감각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직업인의 기본값이 되었다. 직종과 국가,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 속도는 다르겠지만, 도구가 인간의 노동을 정의하던 시대에서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시대로 이행 중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흐름이다.
27년간 현장을 누빈 설계자는 기술이 폭격하는 혼돈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을 바라보는 태도와 구조'라고 단언한다. AI가 정교한 보고서를 대신 써줄 수는 있어도, 그 안에 담길 문제의 본질을 정의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사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기록을 통해 단순히 최신 툴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자를 넘어, 자신의 일과 삶을 입체적으로 조율하는 ‘설계자’로서의 감각을 깨우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서 이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변화의 파도에 휩쓸리는 대신 그 파도의 결을 읽어내어 자신만의 항로를 설계하는 단단한 중심을 얻기를 바란다.
깜깜한 밤을 뚫고 새벽이 아침을 데려온다. “안녕, 아침. 안녕, 하늘.” 바람처럼 달리는 말 ‘아침놀’을 탄 아이가 새 아침에 반갑게 인사한다. 태양빛이 와락 쏟아지며 세상은 환하게 빛나고, 아침놀과 함께 숲과 언덕을 지나 마을로 향하는 길 위에서 아이의 감탄은 멈추지 않는다. “아침은 이렇게나 눈부시게 반짝이고, 햇빛이 가득 흘러넘쳐!”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 특별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 문학상, 일본 그림책 대상 등 주요 그림책 상을 휩쓸고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불리며 사랑받아온 아라이 료지의 그림책. 세상의 모든 순간에 경탄하는 아이의 세계를 춤추듯 자유롭고 환상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어쩌면 어른들이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아이의 시선으로, 이 책은 말한다. 오늘은 매일 어김없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하루가 아니라, 축하할 일로 가득한 새로운 선물 같은 하루라는 것을. 새해의 첫 아침,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이의 말을 떠올린다. “축하해, 우리 모두. 축하해, 온 세상!”
제 4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나하늘 시집. 글자들을 지운 채 발행한 『Liebe』 , 훼손 없이는 펼칠 수 없도록 닫힌 채 제작된 『은신술』 등의 독립출판물을 작업했고, 독립문예지 '베개'에 참여하기도 한 시인은 성원권의 경계를 넘나들며 둔갑을 시도한다. 때론 마녀, 때론 유령인 존재들의 비기는 작아지기 같은 것이다.
작아지기는 변신술/둔갑술의 일종으로 통념과 달리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16쪽, <작아지기>)
작아지기와 유용함은 반대항이라는 2020년대 한국사회의 '통념'이 있다. '약속에 항상 늦고 / 끊임없이 이직을 희망하며' (<사랑에 빠지게 하거나 죽은 사람 살리는 건 안 돼> 58쪽),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까'(<사라지기 2>, 49쪽) 걱정하느라 '실망시키고 원성을 샀을' (<사라지기1> 30쪽) 화자들. 용서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들은 살아있기 위해 메일을 열어보지 않고 회신을 지연한다. 잠을 너무 오래 자는 사람, 서점의 유령, 가부장제의 마녀, 저전력모드, 슬픈 사람, 친구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며 이 시집을 읽는다. 바코드 태그가 누락된 채 도서관에서 분실된 책 같은, 필경사 바틀비 같은 친구들이 '간신히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책을 짓고' (<사라지기 - 막>, 105쪽) 서가에서 한 철을 나길 바란다. 과오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한 시인 김수영을 떠올리며 함께 몸을 웅크려 본다. 여백에서 놀다 갈 새해의 시 읽는 마음을 기다리며 목소리를 작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프랑크푸르트, 한 리더가 던진 서늘한 일갈이 공기를 갈랐다. 그 문장은 정교하게 계산된 수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위기의식과 책임감이 응축된 결연한 선언이었다. 그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개인의 태도나 일시적인 성과 부진이 아니라,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고착화된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품질과 사람을 중심에 두고 판 자체를 다시 짜지 않는 한, 그 어떤 사투도 결국 공회전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서늘한 자각을 한 것일까? 방향을 바꾸는 말은 언제나 희귀하기에, 그날의 선언은 여전히 우리 곁에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재설계하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책은 우리에게 더 독하게 버티거나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부으라고 종용하는 대신, 지금의 정체가 무엇을 동력 삼아 유지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묻는다. 저자가 독자에게 바라는 변화는 '분주함'이 아닌 '정확함'이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의지부터 다잡는 성실한 수행자를 넘어, 시스템의 어느 지점을 건드려야 전체의 흐름이 반전되는지를 포착하는 영리한 설계자로 이동하길 권한다. 개인과 조직의 막힘은 우연한 불운이 아니라 설계된 결과이며, 따라서 변화의 출발점 또한 막연한 결심이 아닌 정교한 설계여야 한다. 이 책은 해답을 나열하는 대신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력 자체를 교정한다.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의 시야는 덜 흔들리고 더 또렷해질 것이다. 그 명료함이 찾아온 찰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1848년 12월 20일 새벽,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의 한 대저택의 그림자에 자리한 오두막 안에서 엘렌과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 부부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 엘렌은 장애가 있는 백인 남성으로, 남편 윌리엄은 그의 흑인 노예로 보이도록 변장을 마친 뒤, 두 사람은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노예제도가 없는 북쪽의 캐나다. 이들은 어둠을 틈타 산과 숲을 가로지르거나 자기 몸을 화물 상자에 넣어 우편물로 부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백인 신사와 그 노예로 행세하며 기차와 증기선, 최고급 역마차를 갈아타고 184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노예제가 폐지된 자유주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다. 세상의 편견을 역으로 이용한 이 대담한 여정은 긴장감 넘치는 로드무비 한 편을 방불케 하며, 미국 노예제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대담한 탈출 실화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우일연은 1848년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크래프트 부부의 탈출 실화에 주목했다. 작가는 피부색, 인종, 계급이라는 미국의 고질적인 문제를 제3자의 시선으로 냉철한 분석과 문학적 열정으로 재조명하였고, 엄격한 역사적 고증과 소설적 긴장감을 결합해 크래프트 부부의 이야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어찌 보면 가장 미국적일 수 있는 주제를 한국계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특별하게 보일 수 있으나, 크래프트 부부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로 분열된 국가와 민족에 관한 이야기이자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며 불의에 대항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으며, 2024년 퓰리처상 위원회는 이 작품을 선정하며 “인종, 계급, 차별을 이용한 풍부하고 놀라운 서사”라는 찬사를 보냈다.
인간의 표정과 몸짓, 호흡과 체온, 맥박까지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 내담자의 신체 반응과 대화를 분석해 미세한 정서 변화도 읽어내는 이로운 초등학교의 상담 교사 ‘모드니’. 어떤 일을 계기로 각자 지닌 상처와 아픔을 서로에게 공유하게 된 희주, 시연, 민아. 어느 날, 모드니가 학교 옥상에서 추락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이 흔들린다. 범인을 추적하던 세 아이의 관계는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의심과 오해는 결국 서로를 향한 불신과 미움으로 번져간다. 세 아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며, 과연 누가 모드니를 옥상에서 밀었을까?
충격적인 사건 장면에서 시작되는 이 책은, 가족으로부터 저마다 다른 방식의 상처를 받은 세 아이의 시점에 따라 다층적으로 이야기를 펼쳐 간다.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과, 무너진 관계를 되짚어가는 과정이 교차되면서 긴장감과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반전과 섬세한 심리 묘사가 더해져 마지막 장까지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신선하고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평가 속에, 이 작품은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제1회 소원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콜록콜록.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 아이는 매일 달님에게 할머니가 낫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달나라에서는 떡방아를 찧던 토끼들이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아이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자는 토끼들의 부탁에 토끼 신령님이 "옳거니!" 하며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은 바로 영롱한 주황빛 귤. "귤 속에서 답을 찾아보거라. 껄껄껄." 토끼 신령님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귤이라는 것을 처음 본 토끼들은 조심스레 한 알을 맛본다.
"아니, 이럴 수가!" 입안에 새콤달콤한 알맹이가 팡팡 터지고 마음이 환해진다. 이 기쁨을 아이와 나누고 싶은 토끼들은 달나라에서 귤 씨앗을 심고 정성껏 돌본다.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주렁주렁 열매가 가득 열리자 토끼들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댄 토끼들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 낸다. 동글동글 새콤달콤 귀여운 귤처럼 사랑스러운 백유연 작가의 그림에 우리 옛이야기와 지역의 색깔이 맛있는 상상력으로 어우러진 그림책. 겨울밤을 환하고 따뜻한 빛으로 밝혀주며 토끼들이 외친다. "모두의 소원이 알알이 이루어지길!"
'월간 이슬아'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도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출판사 운영자로 활발하게 활동해 온 이슬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로 2026년 새해를 연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솔직하고도 대범한 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그의 서사는, 이번 책에서 내 옆에 서 있는 타인에게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책에는 친구, 격투기 선수, 작가, 그리고 책과 영화에 대한 단상들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책의 중반 이후에는 이슬아의 강연록과 덴마크의 시인 마야, 시각장애인 김성은과의 인터뷰도 실려 있어 책의 결을 한층 넓히고 시인 이훤의 감각적인 사진과 시가 더해져, 다채로운 구성의 책이라는 인상이 더욱 또렷해진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문득 이유 없이 싫어질 때도 있지만,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건 인간일지도 모른다. 이슬아의 이번 글에서는 유독 따뜻함과 어떤 다정한 성장 같은 것이 느껴진다. 2026년 새해에 처음으로 만나는 에세이로 손색이 없는 책,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다.
세상의 끝이란 뭘까? 어디냐고 묻지 않는 이유는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지구의 끝이 벼랑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은 없지만 우리가 끝이라고 인지하는 장소는 나타난다. 아주 멀리 떠난 나라에서 마주한 해안선이 그런 곳일까.
50년의 우정을 쌓아온 존 버거와 장 모르는 노년에 이르러 '세상의 끝'이란 주제로 사진과 글을 엮어냈다. 1999년 오리지널 초판 이후 20여 년 만의 복간이다. 작가들의 작가라 일컬어지는 그들이 생각한 세상의 끝은 어떤 풍경들일까. 세속적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난 세상의 끝, 스코틀랜드의 외딴섬, 아프리카의 독재자 국가, 스리랑카의 농장, 멕시코의 반란군 집회…. 지금은 영영 갈 수 없는 그곳을 흑백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인권, 노동, 일상 속 인간 존엄의 문제를 탐구했던 두 거장이 기록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하다.
한 남자가 독일 총리 메르켈 앞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다. 국가 지도자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며 물리학 학위를 가진 학식 있는 자연과학자이자 전문가인 총리가 자신이 예측한 물질과 반물질의 불균형 문제, 사회의 붕괴를 야기할 우주론적 예측을 이해할 것이라고, 그래서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체국 창구 직원 제시카의 비웃음, 시민 대학에서 그에게 물리학 강의를 해준 쾰러의 설득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편지를 보낸다. 수신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10557, 베를린, 빌리 브란트 슈트라세 1. 발신자는 헤르쉬트, 07769. 다른 정보는 필요 없다.
2025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신작.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는 수전 손택의 평에 걸맞게, 작가는 독일 튀링겐의 어느 가상의 마을 카나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삶과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재앙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작중 인물인 헤르쉬트 플로리안은 힘이 엄청나게 세지만 온순하고 어리숙한 면이 있어 주변 사람들의 일을 돕고 밥이나 용돈을 벌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스’가 운영하는 청소 업체에 고용되어 보스가 숭배하다시피 하는 바흐의 기념물에 누군가가 남긴 그래피티를 지운다. 하지만 그가 취업한 업체는 사실 네오나치와 유관한 네트워크였으며 보스는 그 일원으로 헤르쉬트에게 그의 뒤틀린 생각들을 주입한다. 이처럼 이야기의 배경에는 나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그것이 종말과 재앙의 감각을 벼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다운 문장, 분위기, 소재의 일상성과 개성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작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또 하나의 대표작.
‘미쉐린’이라는 이름으로 빛나는 식당의 풍경은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그 한 순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무수한 고뇌와 선택, 인내와 반복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별을 만드는 사람들>은 한국 파인 다이닝의 정점에서 그 시간을 견뎌온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안성재 셰프는 이 책을 두고 “한국 미식 거장들의 영혼이 담긴 기록이며, 그들의 헌신에 바치는 경의”라고 말한다.
밍글스, 스와니예, 이타닉 가든, 라망시크레, 온지음, 윤서울, 강민철 레스토랑, 솔밤, 빈호, 이스트. 한국을 대표하는 레스토랑 10곳의 셰프와 매니저, 소믈리에 24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완벽'을 향해 정진해온 길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화려한 평가 뒤에 가려진 시행착오와 책임, 메뉴 하나와 서비스 한 동작에 담긴 깊은 고민은 결국 한 사람이 자신의 일을,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그 태도가 모여 한국 미식의 현재를 이루는 순간을 비춘다.
찰나의 주가 등락에 매몰되는 것은 소음의 파고에 몸을 맡기는 일과 같다. 진정한 부의 기회는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파편이 아니라, 그 아래를 도도하게 흐르는 거대한 해류의 방향을 읽는 자에게 허락된다. 기술의 진보와 정책의 변화, 자본의 이동이 한 지점에서 교차하며 산업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지금,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꿰는 힘이다. 거시적 흐름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 개별 산업의 본질적 가치를 정밀하게 겹쳐볼 수 있을 때, 투자는 비로소 운이 아닌 구조가 된다. 넓게 보되 피상에 머무르지 않고, 깊게 파되 숲을 잃지 않는 통찰! 지금 시장이 요구하는 투자자의 시선은 바로 '박이정(博而精)'이다.
단편적인 뉴스에 흔들리며 계좌의 향방을 시장의 기분에 맡기던 지난날과 작별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지도를 건넨다. 유행하는 테마를 뒤쫓는 대신, 시대의 구조적 변화를 먼저 점유하고자 하는 이들, 숫자의 등락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부의 설계도를 이해하고 싶은 투자자라면 이 여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거센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투자 기준을 세우고, 2026년과 2027년이라는 다가올 시간을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구체적인 확신으로 채우고 싶다면, 지금 이 책을 펼쳐야 한다. 방향을 잃은 계좌 앞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지금 가장 먼저 손에 쥐어야 할 한 권이다.
2005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 임경선은 산문과 소설을 넘나들며 그만의 독보적인 글쓰기를 해왔다. 이번 책은 전업 작가로 생활하며 처음으로 내놓는 '글쓰기'에 관한 글이며, 동시에 가장 임경선다운 글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 그의 글을 보라고들 한다. 백발백중이다. 이 글은 아마도 임경선 그 자체일 것이다. 솔직하고 거침없으며, 때로는 매섭기까지 하다. 입에 발린 말 따윈 하지 않는다.
모두가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시대, 이 책은 그렇다면 글쓰기란 본질적으로 어떤 행위이며 어떤 태도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읽힌다.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정리된 생각을 써 내려가기까지 글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쉼 없이 그리고 뼈저리게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글이 고맙다. 2015년에 출간된 <태도에 관하여>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게 읽히듯, 이 책 또한 쉽게 닳지 않는 언어와 태도로,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의 곁에 오래 머무를 책이라 믿는다.
인터넷이, 사이버 공간이 전 지구적인 민주주의, 평등, 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기대받던 때가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발언의 연단을 제공하는 궁극의 공론장이자, 물리적 신체와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동시에 국가의 통제와 압력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 하지만 21세기의 1/4을 지나는 시점에서, 인터넷은 지금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것은 전 세계적 감시 네크워크의 근간을 이루며, 거짓과 음모론을 퍼뜨리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소셜 미디어 알고리듬을 낳았다. 2010년까지만 해도 중동의 민주화 항쟁을 이끈 “해방의 기술”로 칭송받았던 닷컴(dot-com)은 닷폭탄(dot-bomb)으로 변했고,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와 기업은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 ‘공정한’ 기술을 안전하고 정의롭게 사용하여 끝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뉴미디어와 네트워크 기술, 기계학습 등을 둘러싼 기술적·인식론적 통찰을 바탕으로 북미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 연구를 주도해 온 웬디 희경 전은 그와 같은 물음을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이 ‘맹목적’이며 따라서 공정하다는 근본적인 믿음 자체를 부정하며, 현재의 기계학습과 알고리듬에 인간의 편견과 차별이 어떻게 내재해 있는지, 즉 단순히 데이터의 수준에서뿐만이 아니라 절차와 예측, 태생과 논리의 수준에서도 얼마나 깊게 결합해 있는지를 밝힌다. 빅데이터, 추천 알고리듬, 안면 인식 기술 등을 통해 작동하는 차별의 정치에 내재한 19세기 말 이후의 인식론적, 사회과학적, 컴퓨터 공학적 기원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여 기술과 인간과 사회의 건강한 관계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책.
25년 차 독서 교육 전문가 라온오쌤 오현선이 고전 읽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나섰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읽고, 고민하고, 마음을 나눠 온 작가이기에, 고전이 얼마나 멀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낯선 어휘와 긴 문장이 아이들을 얼마나 쉽게 지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이번 책은 고전의 문턱에서 망설이던 아이들이 기꺼이 그 세계로 한 걸음 내딛도록 돕는다.
책에 수록된 고전 작품은 총 30편으로,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필수 작품들이다. 어떤 고전부터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아이, 낯선 어휘 때문에 번번이 책을 덮곤 했던 아이에게도 이 책은 든든한 길잡이가 된다. 핵심 장면을 문학툰으로 엮어 흥미를 살리고, 중심인물 프로필과 간결한 요약으로 이야기를 한눈에 잡게 했다. 여기에 어휘 정리와 질문 코너를 두어 짧은 시간 안에 서른 작품을 자연스럽게 훑어볼 수 있다. 읽다 보면, 어느새 한 작품 한 작품을 더 깊이 만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더 넓은 고전의 세계로 이어주는 다리이자, 다음 독서를 열어주는 문과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