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첫화면으로 가기
헤더배너
분야보기



닫기
8.22022
  • 파친코 1
    이민진 (지은이), 신승미 (옮긴이)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비운의 시대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얼마나 될까. 역사는 조국과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과,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무엇이든 팔아넘긴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소설의 시선은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을 향한다. 양반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고 한탄하면서도 "가족을 지켜라. 자기 배를 채워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도자들을 믿지 마라."라고 되뇌며 그저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역사의 소용돌이가 삶의 터전을 뒤흔들고 파괴해도, 옳은 것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간직한 채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사람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시대의 비극을 어떻게든 감내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쳐진 헌사.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윤여정과 이민호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되며 세계를 달구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 한번 뜨거운 주목을 받던 도중 판권 만료로 갑작스레 절판되었던 소설 <파친코>를 새로운 번역과 표지로 만난다. 현재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과 <파친코>에 이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 마지막 소설 <아메리칸 학원>을 집필 중인 작가는 미국에서 왜 한국인 이야기를 쓰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내게 한국인은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깊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다. 온갖 놀라운 상황들을 견디며 분투해왔기 때문이다."라는 대답과 함께 앞으로도 한국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나가고 싶다는 이민진 작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할 곳이 기대된다.

  •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은이) | 마음산책 | 2022년 8월 "영화에 이목구비가 있다면, 김혜리 영화산문"

    좋아하는 것을 만나면 호들갑을 떨고 싶다. 그러다 꼭 내 마음 같은 말을 정제된 언어로 옮겨 놓은 필자를 만나면 반가워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그런 반가운 필자 중 하나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속 명대사처럼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듯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다." 김혜리의 글은 후자의 방식으로 좋아하는 대상을 '묘사'한다. '조용한 잉크 방울이 떨어져 스미듯 부드럽게 펼쳐지는 글'로, 영화의 이목구비를 스케치하는 글. "내게 허락된 재료로 방금 본 영화와 비슷한 구조물을 짓고 싶었다"(11쪽)고 말하는 겸손한 태도로, 김혜리는 이 영화가 무엇인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씨네21'의 개봉작 칼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 2017~2020년 연재했던 글과 틸다 스윈튼, 톰 크루즈 같은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한 배우론 등의 영화 산문을 더했다. 이른바 '예술 영화'부터 '블록버스터'까지, 김혜리는 다양한 영화를 다루며 극장 통로석에서 같은 시기 같은 영화를 본 이들이 하고 싶었을 말을 한다. 이 필자의 감상을 믿기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기사를 온전히 읽기 위해 관람한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김혜리가 해리포터 시리즈의 장엄한 마지막 편에 바치는 "그래, 거기 가만히. 찰칵. 너희에게도 우리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녕."(314쪽)이라는 인사를, 그의 명징한 문장과 함께 본 이 아름다운 영화들에게 바치고 싶다.

  •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D (지은이), 김수정, 김영주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생존과 연대의 치열한 기록"

    영웅 탄생의 빠질 수 없는 조건으로 역경이 있다. 저자 D는 그 자신이 당한 피해로부터 생존자가 된 이후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해 함께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 현실의 영웅에게 사이다 서사는 거의 없다. 그가 연대한 여러 성폭력 피해자들의 법정 싸움은 대부분 굽이굽이 숨 막히는 고난이다.

    피해자로서, 연대자로서 깊숙이 들여다본 법정의 풍경은 상식과 거리가 먼 지점이 많다. 피해자에게 모멸감을 주는 재판 과정, 국민감정과 달리 움직이는 감형 기준, 피해자의 보호와 회복에는 관심이 없는 시스템과 무신경한 검사, 경찰, 변호사 들. 그리고 팩트보다 자극을 좇는 언론까지 합쳐지면 피해자는 기존의 피해에 더해 이 모든 추가적 부담을 오롯이 짊어지고 울며 나아가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D가 연대한 사례들에 얽힌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법정이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우리가 함께 어느 지점을 비판하여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이 피 튀기는 기록의 출간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이 치열하고 치밀한 기록으로부터 거대한 변화가 끌려 나와야 한다.

    한 명의 개인이 해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힘든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걱정했고 동시에 감탄했다. 그러나 D를 비롯한 누구도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며 영웅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영웅의 대동 없이도, 평범한 개인이 혼자 상식적인 사법 체계에 의지하여 회복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적일 것이다.

  • 두더지의 여름
    김상근 (지은이) | 사계절 | 2022년 8월 "두더지와 새 친구가 함께한 근사한 여름휴가"

    <두더지의 고민>, <두더지의 소원>에 이은 '두더지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 두 전작이 겨울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신작은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청량한 색감과 들썩이는 분위기 속에서 두더지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두더지네 숲에 여름이 찾아온다. "땅 파기는 하기 싫어!" 따분한 일상을 뒤로하고 여름휴가를 떠나게 된 길목에서 두더지는 우연히 거북이를 만나게 된다. 거북이의 말수가 적은 덕에 생겨난 오해로 함께 바다로 향하게 되는데... 걷고 또 걷지만 도무지 바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숲은 점점 으스스해진다. "얘야, 땅속에선 어디든 안전하게 갈 수 있단다" 문득 떠오른 할머니의 한 마디! 좌충우돌 땅 파기가 시작되면서 두더지와 거북이의 친밀감은 더해져 간다. 말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헤매느라 입도 마르고 발도 아프지만 그래도 두더지는 신이 난다.

    "너랑 같이 가니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바다에서 근사한 여름휴가를 즐기지만 이별의 순간은 찾아온다. 예상치 못한 거북이의 한 마디에 의외의 엔딩을 맞이하지만 이번 여름휴가를 통해 두더지는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땅 파기에 서툴렀던 두더지는 마침내 '땅 파기 선수'가 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 함께 걷고 나눈 여정에서 '너와 나'를 알아 가게 된다. 여행의 정서를 골고루 담아낸 <두더지의 여름>은 녹음 짙은 숲에서부터 청량한 바다에 이르기까지 반짝이는 여름의 장면들을 사랑스럽게 담아낸다.

8.52022
  • 사라진 숲의 아이들
    손보미 (지은이) | 안온북스 | 2022년 7월 "손보미 스타일, 손보미 탐정소설"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손보미의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먼저 읽지 않더라도 알아볼 수 있다. 연쇄해 퍼져나가는 상상, '을지로' 같은 익숙한 지명이든 아니든 그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구름 같은 문체. 이 문체를 만나면 "을지로에 있는 숲에 가봐요. 꽃이 피어 있던 숲으로." (96쪽)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장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을지로와 베트남이 '숲'이라는 이미지로 함께 무성해지는 감각적인 문체로 손보미가 지글지글 끓는 듯한 탐정소설을 선보인다.

    '대학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했던 그 모든 곳에서 함께 일한 모두와'(16쪽) 불화하는 인터넷 방송국의 PD 채유형은 자극적인 사건을 찾기 위해 청소년 살인사건 피의자인 심효전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채유형은 사회와 불화하는데, 예외적으로 진경언 형사만이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다. 도넛과 커피를 사랑하고, 탄수화물에 중독된 사십대 후반 여성 형사. 동료의 비리를 파헤치다 조직에서 소외된 그는 "이게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거"(130쪽)라는 이유만으로 심효전 사건에 손을 내민다. 독보적인 스타일을 지닌 작가가 창조한 독보적인 탐정이 도시를 수색한다. 빵을 고르는 여성의 뒷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이는 순간과 함께 손보미의 탐정, 진형사 시리즈가 시작된다.

  •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지은이) | 창비 | 2022년 7월 "공존을 짓밟는 공정을 넘어서기 위해"

    공정이라는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시키는 것은 공정한가.", "여성 할당제는 공정한가", "시험을 치지 않고 사람을 뽑는 기업은 공정한가." 최근 몇 년 한국 사회를 달군 대부분의 굵직한 이슈 뒤에는 '공정한가'가 따라붙는다. '공정한가'는 마법의 질문이다. 이슈 내에 복잡하게 자리 잡은 첨예한 이해관계나 깊숙한 불평등을 손쉽게 덮어 문제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저자 김정희원은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공정 담론의 폐쇄적인 도돌이표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추동하여 엉뚱한 지점에 에너지가 몰리도록 만든다.

    책은 공정이 어쩌다 한국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는지 살피고, 능력주의와 결탁한 공정 개념이 얼마나 엉성하고도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지 분석한다. 타인을 공격하며 나를 위한 공정만 찾는 동안 불평등은 강화되고 우리 대부분의 삶은 더 척박해진다. 저자는 우리가 가야 할 더 나은 세계의 가치로, '보편적 정의'와 '돌봄'을 꼽는다. 생소한 연결이지만 개별적 존재론의 한계를 벗어나 관계적 존재론을 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이고 선명하게 이어진다. 텅 빈 공정 열풍을 벗어나 더 나은 논쟁을 하기 위해, 각자의 이유로 화나 있는 이들이 모두 정확히 읽어보길 바란다.

  • 하얼빈
    김훈 (지은이) | 문학동네 | 2022년 8월 "<칼의 노래> 김훈의 새로운 대표작"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306쪽) 이 역사소설에 덧붙인 소설가 김훈의 말이다. 1948년생인 작가 김훈은 '더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으로 가슴 속에 오래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글로 붙잡았다고 한다. 적의 법정에서 스스로의 직업을 포수로, 무직으로 소개한 한 인간의 육신이 거쳐간 길을 이 소설은 따른다. 차례에 앞서 안중근이 이동한 도시들의 이름이 새겨진 지도가 소개된 이유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2일,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6일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많은 독자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설이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이룬 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그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격랑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식 교육을 받고 천주교에 입교해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은 한 젊은이는 살인의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이토가 죽었다면, 나의 목숨이 이토의 목숨 속에 들어가서 박힌 것이다."(193쪽)라고 김훈의 소설 속 인물은 생각한다. 아직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일이다. 안중근의 마지막 7일을, 그의 젊었던 날을 김훈이 쓴다.

  •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은이), 장소미 (옮긴이) | 엘리 | 2022년 7월 "당신을 살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에서 20년째 묘지지기로 일하고 있는 비올레트. 매일 묘지의 꽃과 나무를 정성스레 돌보고 묘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동안 세월이 삶을 풍화시키고 죽음마저 풍화시키는 것을 무수히 보았다. 어쩌면 묘비명은 흐르는 세월을 거슬러 추억을 꼭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비올레트는 생각한다.

    그렇게 소설 속 94개의 장은 누군가의 묘비명으로 시작한다. "죽음은 당신 꿈을 꾸는 사람이 더는 아무도 없을 때 시작된다.”라는 깊은 고독부터 "밀짚모자 사이로 보이는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라는 반짝이는 환희까지. 세상을 떠난 자들과 남은 이들, 그리고 비올레트의 사연을 읽으며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떠올려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인식하고 매순간 감탄하며 누릴 수 있다면, 필멸임을 알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도 그리 허망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8.92022
  • 자유죽음
    장 아메리 (지은이), 김희상 (옮긴이)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자살'에 관한 가장 뜨거운 문제작"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사회적 금기이며 여러 종류의 죽음 중에서도 특히 자살은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이거나 '긍정적' 기운이 묻은 논의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시피 하다. 대부분의 인류 사회는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든 죽음보다 삶의 가치를 절대적 우위에 놓는다. 장 아메리는 이 인식에 반기를 든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약 50년 전 출간된 이 책이 여전히 논쟁적이고 아직도 유효한 이유다.

    그는 자살자들이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을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만든 굴욕적 삶, 그 앞에서 자발적 죽음은 자유와 존엄을 찾는 길이라는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라기보단 포용적이다. 죽음에 관한 한 당연하게 여겨져온 인식들에 의문들을 제기하며 죽음과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 책은 단지 자살 옹호로 오독되기엔 인간 존엄과 자유에 대한 본격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절판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재출간을 바라왔다는 사실이 책이 담고 있는 가치를 증언한다.

  •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곽재식 (지은이) | 동아시아 | 2022년 8월 "달을 향한 인류의 과학과 상상력"

    2022년 8월 우리나라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가 지구를 출발하며 달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 우리는 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에서 달 탐사가 시작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다누리호는 달에서 무엇을 새로 알아내려는 것일까. 새삼스레 솟아나는 질문들에 이 책이 전방위로 대답한다.

    유럽에서 유독 보름달과 괴물이 연관되는 이유, 조선 시대에는 음양 이론에 따라 달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으리라는 상상이 있었던 것, 냉전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에서 아폴로11호 발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남산에 대형 스크린까지 설치했었다는 것, 풍화작용이 없는 달에 남아 있는 무수한 운석 충돌의 흔적들이 지구 탄생의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는 것. 달에 대한 과학과 역사, 설화와 소설을 종횡무진하는 이 책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다누리호 발사를 축하하는 잔치 식순에서 달 이야기 한마당 코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축제의 자리를 독자 여러분이 함께 빛내주시기를 바란다.

  • 여름의 피부
    이현아 (지은이) | 푸른숲 | 2022년 7월 "내 안의 고독처럼 푸른 그림들에게"

    <어라운드> 등의 매체에서 에디터로 활동한 이현아의 그림 이야기. 깊게 들여다보는 저자는 푸른 그림에서 네 가지 이야기 줄기를 찾아냈다. 새파랗게 어렸던 '유년', 모든 것이 푸르던 계절 '여름', 마음이 퍼렇게 멍드는 '우울', 비밀을 향해 침잠하는 '고독'. 이 줄기에서 뻗어나간 내밀한 이야기들. 호아킨 소로야의 발렌시아의 바다와 에드워드 호퍼의 묵묵히 멈춘 하늘을 엮어 작가는 푸른 그림을 사랑해온 우리의 기억에 낱말을 더한다.

    제임스 설터의 책에 운치를 더하는 던컨 한나의 그림과 줌파 라히리의 작품과 익숙한 에이미 베넷의 그림처럼, 이 푸른 책을 피부로 느낀 이에겐 표지화인 피에르 본콤팽의 푸른 그림이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여름에는 새로운 단어를 껴안을 수 있는 몸을 갖게 된다."(76쪽)고 말하며 '세상을 살갗으로 느낀'(77쪽) 만큼 적은 푸른 이야기는 "여름 오후의 잔열보다 그늘을"(87쪽) 읽기 좋아하는 바로 당신에게 알맞다.

  • 반려공구
    모호연 (지은이) | 라이프앤페이지 | 2022년 8월 “김하나.김혼비 추천, 자유롭고 흥미진진한 공구의 세계”

    ‘사람을 불러서 집을 고치고, 새 물건을 사서 고장 난 물건을 치워버리는 방식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문제를 잊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과거에 그랬던 저자 모호연이 공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 공구의 가짓수를 늘리게 되었고, 늘린 공구 수만큼 삶이 이전보다 재밌는 일들로 채워졌다고 말한다. 손에 익도록 아껴주며 써온 ‘반려공구’의 목록과 각각의 쓰임새, 공구 덕에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실용적인 정보와 에세이를 적절히 섞어가며 들려준다.

    저자의 말처럼,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생경하고 두려운 모험이다.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면 시작조차 망설여지고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공구를 사용할수록 안심이 되었고, 일상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여러 면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고백한다.

    전동 드라이버를 산 후로 일단 시작해보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다음에 성공할 방법을 고민하고, 요모조모 쓰임이 많은 글루건을 보면서 자신도 글루건처럼 아주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톱질의 경험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서 힘차게 밀고 당기며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줄자로 좋아하는 책의 키와 손톱의 너비, 거대한 플라타너스의 잎을 재는 엉뚱한 매력을 발산하거나, 빌라 건물의 입구 유리문 손잡이를 렌치로 고치고, 빌라를 나설 때마다 튼튼한 문 상태를 확인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귀여운 면모도 보인다. 이렇듯, 공구 예찬에 씩씩함과 다정함을 물씬 풍기면서 공구를 사용하기 전보다 단단해지고 흥미진진해진 삶의 이야기를 더해 들려주니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채로운 공구 사이사이, 유머와 긍정을 놓지 않으려는 작은 시도들과 함께 진중하게 일상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무척 편안하고 즐겁다.

8.122022
  • 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은이)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월드로 오세요"

    괴이한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기 좋은 계절이다. "이 괴이한 것을 어쩌자고 집 안에 들였을까."라고 <고기와 석류>의 등장인물 옥주는 탄식한다. 썩은 날고기를 먹는 '그것'에게 뜯어먹힌 후 옥주는 '그것'을 집에 들이고 석류라고 이름 붙인다. 외롭게 혼자 죽어가는 것보다는 석류와의 현재가 낫다고 생각하는 옥주의 마음, 섬뜩하지만 공감 가는 구석이 있다. 죽는 것보다 죽은 후 발견되지 않는 것이 더 두려웠을, (나같은) 원룸생활자라면, 이 상상을 따라잡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칵테일, 러브, 좀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조예은의 총천연색 놀이동산이 영업을 시작한다. 기후위기와 다단계 영업과 망상과 애정이 어우러진 <가장 작은 신> 같은 소설을 조예은 월드 초심자에게 먼저 권한다. 전작 <칵테일, 러브, 좀비>의 좀비가 되고서도 가족에게 명령을 하는 가부장 좀비 아버지처럼, 조예은 월드의 존재들은 비틀어진 세계의 틈을 비집고 나타나 이 낯선 세계를 익숙하게 만든다. 괴물, 살인마, 유령, 사기꾼 같은 이들이 나타나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202쪽) 같은 말을 나누는 세계라니.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이 세계를 돌며 밤을 만끽한다. 아껴 먹고 싶은 소설집이다.

  • 빙하여 안녕
    제마 워덤 (지은이), 박아람 (옮긴이) | 문학수첩 | 2022년 7월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빙하학자의 지구 탐험기"

    북극의 스발바르와 그린란드부터 알프스, 히말라야, 안데스와 파타고니아를 거쳐 남극까지. 빙하의 신비로움에 매혹되어 빙하학자의 길을 가게 된 저자가 세계 각지의 빙하로 우리를 데려간다. 많은 이들이 빙하를 거대한 얼음덩어리라는 막연한 이미지로 상상한다. 그러나 빙하는 어떤 기후와 지형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움직이고 녹느냐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특징과 생태계를 갖고 있다.

    투명한 색에서 청록색까지 다양한 빛깔로 빛나는 빙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높은 지대에 위치한 빙하, 각 지점마다 온도가 다른 빙하, 외계 행성을 방불케 하는 빙하, 온도에 따라 크기를 바꾸는 빙하, 바다로 전력질주하는 빙하. 작가는 세계 곳곳의 빙하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고, 빙하가 오래도록 간직한 물의 기억을 들려준다. 빙하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물들을 호명하고 빙하와 함께한 경이로운 기억을 나누며 빙하가 그저 하나의 얼음덩어리가 아닌 생생히 살아 숨쉬는 존재임을,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어느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동떨어진 일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에서 공존하는 소중하고도 거대한 생명체의 연쇄 사망임을 시급히 알린다.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 불편한 편의점 2
    김호연 (지은이) | 나무옆의자 | 2022년 8월 "지친 하루 끝, 편의점의 여름밤"

    70만 독자의 지친 하루를 위로한 얼웨이즈 편의점은 오늘도 문을 연다. 서울역 노숙인이던 독고가 편의점의 야간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작되는 1편의 이야기 이후 1년 반이 흘렀다. ALWAYS 편의점의 여름, 독고의 후임으로 밤 시간을 책임지던 곽 씨가 그만두고 새 야간 알바를 구하면서 편의점은 다시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커다란 덩치와 느린 행동이 독고를 연상시키는 이 남자, 어수룩한 수다쟁이가 황근배라는 이름 대신 홍금보라는 별명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마냥 느긋하게 손님들을 맞는다.

    술이라도 마셔 속의 열기를 식히고 싶은 밤, 유독 지치는 날에 나는 편의점에 간다. 청파동 편의점에도 그런 손님들이 방문한다. 자꾸 세상에게 속기만 하는 취업준비생 소진, 거리두기를 하느라 장사가 안 되어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정육식당 최 사장,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며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목격하느라 더욱 지치고 상처 받는 고등학생 민규. 이들도 나처럼 유독 지친 하루면 편의점에 간다. 야간 초소처럼 불을 밝힌 골목길의 편의점은 언제나 그들을 환영하고 있다. 거절당해도 굴하지 않고 자꾸 말을 붙이는 편의점 계산원 근배의 넉넉한 마음씨와 함께, 편의점의 여름밤이 깊어간다.

  • 데볼루션
    맥스 브룩스 (지은이), 조은아 (옮긴이) | 하빌리스 | 2022년 7월 "영화 '월드 워 Z' 원작 작가, 맥스 브룩스 신작"

    화산 폭발로 혼돈에 빠진 미국. 화산 피해를 입은 지역을 조사하던 중 누군가의 일기장이 발견된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자연재해보다 더욱 끔찍하다. 화산 폭발로 고립된 숲속 공동체 '그린루프'에서 있었던 기묘한 살인 사건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괴생물체가 벌인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에 맞선 주민들의 처절한 사투의 기록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물체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인간의 이중성이다. 선택된 소수만이 살 수 있는 이른바 '최첨단 고급 친환경 공동체'인 그린루프에는 현대문명을 비판하며 자연을 사랑하고 사회 소수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극한 상황에서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현실 르포르타주를 방불케하며 서늘한 공포를 자아낸다. <세계대전 Z>,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로 좀비 열풍을 일으킨 맥스 브룩스의 강렬한 신작.

8.162022
  • 어린이를 위한 역사의 쓸모 1
    최태성 (지은이), 신진호 (그림) | 다산어린이 | 2022년 8월 "역사를 거울 삼아 미래를 설계하기"

    역사 교과서를 펴면 선사시대부터 시작이다. 고인돌과 뗀석기를 배운다. 기원전 약 8000년 전의 이야기를 2020년대의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니 지루하다. 괜스레 툴툴거리며 반문한다. 시험공부를 위해서라면 외우기만 하면 되는데 왜 역사를 배우는 걸까?

    역사를 전공하고 오랜 기간 역사를 가르쳐온 저자 최태성은 시험을 위한 역사 지식은 잊어도 된다고 말한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공부"라 단언한다. 상상할 수 있는 무한의 나를 과거의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기에 그들이 남긴 기록은 시대가 다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 책은 우주만큼의 가능성을 품은 어린이들의 미래 설계에 나침반 역할을 자처한다. 지겨운 역사 과목이 아니라 쓸모 있는 인생 해설집이다. 더불어 교양과 개인 수양을 위한 공부로서의 역사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반가운 안내서가 될 것이다.

  • 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은이) | 창비 | 2022년 7월 "<유원> 백온유 신작, 마음이 자라는 맛"

    기적의 아이, 혹은 본의 아니게 살아남은 아이인 <유원>의 이야기로 창비청소년문학상,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한 백온유가 마음이 자라는 쌉싸래한 맛을 들고 여름을 찾았다. 열아홉 살인 시안과 해원은 다른 삶을 산다. 학교가 끝나면 매일 병원에 가 '식물인간' 상태인 엄마를 간병해야 하는 시안은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다른 도시로 이사한 후 지원으로 개명을 하고, 평범하게 남자친구를 사귀고 학원에 다니는 해원은 매해 '프록시모' 백신을 접종할 때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린다. 전염병 유행 이후에도 계속 자라난 두 사람이 너무 달라진 얼굴로 만난다.

    '슈퍼전파자'라는 이름을 지닌 누군가의 동선을 공유하던 것도 이제 2년 전의 일이다. 2022년 8월 16일 누적 확진자수는 2150만명에 달한다. 위중증 환자는 563명, 이 숫자에 가려진 어떤 삶에 대해 백온유는 상상한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이의 삶에도 마땅한 존엄이 있다는 것을. 시원쌉싸래하게 퍼지는 여름의 맛. '그늘을 벗어나 햇볕으로 한걸음' 나설 모든 이의 행보를 응원하며, 백온유가 전한다.

  • 제 꿈 꾸세요
    김멜라 (지은이) | 문학동네 | 2022년 8월 "그 사랑이 내겐 위로가 돼"

    이 소설집의 출간을 기다렸다. 2021년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나뭇잎이 마르고>와 2022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저녁놀>이 수록된 김멜라의 두번째 소설집. 여덟 편의 이야기 속에서 인물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나보다 어떻게 그 사랑을 지켜갔느냐가 더 중요합니다."(162쪽, <설탕, 더블 더블>)라는 소설 속 '할머니'의 말처럼, 자신이 시작한 사랑을 지켜나가는 인간들은 각자의 이유로 존엄하다.

    <나뭇잎이 마르고>의 '체'라는 인물의 구체성은 읽는 이를 압도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트된 담배를 '혁명의 일부인 양'(49쪽) 피우는 사람. 장애가 있는 체는 정확하게 발음하거나 빠르게 뛰는 것은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에게 다가가 마음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75쪽)고, "먼저 주고, 준 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75쪽)는 사람이기도 하다. 침을 흘리고, 오줌을 싸고, 고소공포증(그는 오, 소, 옹, 포, 쯩!이라고 발음한다)이 있는 이 사람의 육체와 그가 하는 말을 김멜라는 그대로 옮겨 적는다. 한 여성을 '앙헬'(천사)이라고 호명하는, "난 여자 가슴이 좋아"(83쪽)라고 말하는 구체적인 스펙트럼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의 존엄한 삶의 결이 사랑을 '선동'한다. (소설가 편혜영의 추천 중) 꿈꾸는 자에게 보내는 김멜라의 편지에 더해 소설의 한 문장을 옮겨 적어본다. "네가 누구를 사랑하는진 몰라도 그 사랑이 내겐 위로가 돼." (148쪽) 이 사랑들이 어떤 다름을, 이상함을, 수치스러움을 위로할 것이다.

  • 불편한 편의점 2
    김호연 (지은이) | 나무옆의자 | 2022년 8월 "지친 하루 끝, 편의점의 여름밤"

    70만 독자의 지친 하루를 위로한 얼웨이즈 편의점은 오늘도 문을 연다. 서울역 노숙인이던 독고가 편의점의 야간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작되는 1편의 이야기 이후 1년 반이 흘렀다. ALWAYS 편의점의 여름, 독고의 후임으로 밤 시간을 책임지던 곽 씨가 그만두고 새 야간 알바를 구하면서 편의점은 다시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커다란 덩치와 느린 행동이 독고를 연상시키는 이 남자, 어수룩한 수다쟁이가 황근배라는 이름 대신 홍금보라는 별명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마냥 느긋하게 손님들을 맞는다.

    술이라도 마셔 속의 열기를 식히고 싶은 밤, 유독 지치는 날에 나는 편의점에 간다. 청파동 편의점에도 그런 손님들이 방문한다. 자꾸 세상에게 속기만 하는 취업준비생 소진, 거리두기를 하느라 장사가 안 되어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정육식당 최 사장,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며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목격하느라 더욱 지치고 상처 받는 고등학생 민규. 이들도 나처럼 유독 지친 하루면 편의점에 간다. 야간 초소처럼 불을 밝힌 골목길의 편의점은 언제나 그들을 환영하고 있다. 거절당해도 굴하지 않고 자꾸 말을 붙이는 편의점 계산원 근배의 넉넉한 마음씨와 함께, 편의점의 여름밤이 깊어간다.

8.192022
  • 알고 있다는 착각
    질리언 테트 (지은이), 문희경 (옮긴이) | 어크로스 | 2022년 8월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의 위험성"

    2005년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금융인 포럼에 참석한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질리언 테트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연단에 오른 금융인들은 금융계의 혁신에 관해 논의하면서 온갖 방정식과 도표, 약어가 적힌 파워포인트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외계어처럼 들리는 그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인류학을 연구했던 그에게 그곳 회의장은 자신이 연구했던 타지키스탄 산악 지대 마을처럼 낯설었다.

    그는 인류학자다운 호기심을 발휘하여 외부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단어로 소통하는 금융인들과 그들의 일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신용파생상품을 둘러싼 금융시장이 너무나도 복잡해, 이를 완전하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는 신용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금융인들은 크게 반발하며 그의 기사를 ‘가짜 뉴스’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질리언 테트는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금융 위기 이전 금융계에서는 신용파생상품이 금융 제도 전반에서 리스크를 분산시켜 위험을 줄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의 반대편에는 여러 개의 모기지를 받아놓고 갚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금융인들은 실제 현장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금융 엘리트의 눈이 아닌 인류학자의 렌즈로 이 사태를 바라봤다면 리스크와 내부 모순을 사전에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비단 금융위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후변화와 전염병의 대유행, 인종차별주의, 광적으로 치닫는 SNS, 정치 분쟁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사건과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낯선 진실을 발견하는 인류학자의 사고법, 인류학적 시각이 필요한 이유다.

  • 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은이), 이수영 (옮긴이)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노동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면"

    어떤 불쾌감이 들 수도 있다. 나의 노동이 가짜라는 말을 들으면. 내 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 의미 없는 일에 헌납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참조 이메일, 상대가 듣고 있는지 파악도 잘되지 않는 회의, 기계처럼 처리하는 반복적 서류작업으로 바빴던 하루의 끝 '오늘 내가 뭘 했나' 물었을 때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음을 깨닫고 멍해진 적이 있다면, 이 설득력 없는 피로와 분주함을 의심해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정치적 성향이 반대인 두 저자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가짜 노동의 굴레를 분석한다. 세상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른 이들이지만 현대사회가 고집하는 근로의 판타지에 커다란 모순이 있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저자들은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을 시간 기준으로 책정하는 일,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만들어내는 움직임들, 노동이 실제로 창출하는 성과와 상관없이 바쁘고 능력 있는 회사원으로 보이기 위한 업무들을 모두 가짜 노동으로 정의한다. 책에서 밝히는 여러 데이터와 인터뷰에 따르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들이 가짜 노동에 해당된다.

    가짜 노동은 단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자존감과 존재 자체에 타격감을 주기에 인간 삶의 근본을 무너뜨린다. 지친 사회의 활력을 다시 깨우는 일은 무의미한 노동의 쳇바퀴를 과감하게, 종종, 멈추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언제나 바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현대 사회의 거대한 연극, 그 기만을 깨야만 더 많은 혁신과 진짜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가짜 노동에 대한 고발로 실제로 덴마크 전역에 유의미한 변화를 몰고 왔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거대한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추천한다.

  • 경성 기억 극장
    최연숙 (지은이), 최경식 (그림) | 웅진주니어 | 2022년 8월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으신가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비교적 온화한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사람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은 마땅히 없을 것이다. 도리어 많은 기억들이 모여 자기 자신을 이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작은 기억 조각들이 모여 인간의 형태를 이룬다고 여긴다.

    1945년 1월, 열두 살 덕구는 우연히 경성 기억 극장에서 일하게 된다. 사람들의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는 그곳엔 친일 행위를 한 교사, 군인, 순사 등이 방문해 괴롭고 부끄러운 기억들을 지우고 상쾌한 기분으로 극장 밖을 나선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덕구 자신도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사실을 지웠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사실에 좌절하며 어떤 선택이 옳은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똑똑히 기억하고자 한 용기 있는 개인의 이야기를 과학적 상상력을 빌려 그려낸 이 동화는 기억에 대해,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해 계속 되묻게 해준다. 과거의 행동은 바꿀 수 없지만 기억하는 한 앞으로의 선택은 이전보다 나아질 수 있다. 제13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 부문 우수상 수상작.

  •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은이)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우리 집을 지옥에 빌려줬다"

    하우스메이스 형태로 세를 얻어 살았던 적이 있었다. 전세 계약자에게 월세를 내는 전전세 형태였는데, 이 계약이 적법한 것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리러하의 소설<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의 첫 목차를 보며 비슷한 질문을 만났다. "지옥은 법인으로서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가"(9쪽) 할머니가 지옥에 세를 주는 바람에 할머니 맞은편 자리의 웬 남자(지옥 방문객)는 살아있을 때 본인이 남긴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있다. 이 광경을 보며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지옥에 세를 줄 수 있을까?

    전자책으로 먼저 출간된 후 종이책으로 독자를 만난<달러구트 꿈 백화점>처럼, 술술 읽히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신설된 '제1회 K-스토리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이다. 지옥 손님과 원주민 인간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미스터리 로맨스 판타지. 심사위원인 소설가 김초엽이 "지옥에 세를 줬다는 매력적인 설정과 예측을 1도씩 빗나가는 전개가 몰입도를 높인다."라는 말과 함께 추천했다.

8.232022
  •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지은이), 김상훈 (옮긴이) | 허블 | 2022년 8월 "테드 창, 김초엽 추천 SF 거장 그렉 이건 소설집"

    악성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소년. 그는 어떤 두려움도 느낄 수 없다. 애써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종양의 희귀한 부작용으로 행복감을 자아내는 엔도르핀의 일종인 루엔케팔린의 뇌내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작은 일상에 그저 행복해하는 소년을 보며 극한의 슬픔을 느낀 부모는 무리한 비용을 감내하고 최첨단 치료를 예약한다. 수술은 극적으로 성공하여 종양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찬란하게 반짝이던 행복의 빛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암세포와 함께 루엔케팔린도 전멸한 것이다. 우울의 심연이 지배한 소년의 내면은 폐허가 되어 생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를 회복이라 할 수 있을까. 고도로 발전한 의학은 의뇌를 이식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문제를 명쾌히 해결해 내려 한다. 그 결말은 누군가에겐 현대 의학의 빛나는 승리요, 누군가에겐 끝 모를 깊은 공허다. 테드 창과 켄 리우를 만난 이후, 또 한 번 생을 뒤흔들 강렬한 작가와의 조우에 목말랐을 독자들에게 그렉 이건의 세계를 권한다.

  • 돌봄이 돌보는 세계
    김창엽, 김현미, 박목우, 백영경, 안숙영, 염윤선, 오승은, 전근배, 정희진, 조한진희(반다), 채효정 (지은이), 다른몸들 (기획) | 동아시아 | 2022년 8월 "돌봄은 혁명이 되어야 한다"

    팬데믹과 기후 위기의 시대, 서로의 돌봄 없이 홀로 굳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현실성 없었는지 깨달아가고 있다. 돌봄과 상호의존은 아마도 위기의 시대에 유일한 삶의 방식일지 모르겠다. 돌봄의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재, 그러나 그간 저평가되고 축소되어 온 이 개념을 되살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돌봄에 얽힌 다층적인 현실을 살피고 어디부터가 돌봄이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조명하는 책의 등장이 반갑다.

    책에선 질병, 장애, 노동, 의료, 젠더 등 여러 주제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주제에서 돌봄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 돌봄과 관련한 사회적 모순은 무엇이며 돌봄이 가진 가치와 가능성은 어떤 것인지 살핀다. 각 주제는 별개의 장이지만 모두 연결적이다. 강연 기반의 내용이기에 더 선명하게 읽히는 이 책은 돌봄이 더 이상 지엽적인 주제가 아닌 삶의 기저에 자리하는 태도여야 함을 알려준다. 돌봄으로 새로 잡히는 세계의 질서, 다시 만나는 세계는 지금과 분명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 숫자 감각의 힘
    사이토 고타츠 (지은이), 양필성 (옮긴이) | 클랩북스 | 2022년 8월 "성공 확률을 높이는 전략적 숫자 사용법"

    만약 당신이 “시카고에 피아노 조율사는 몇 명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황스러운 기분은 잠시 접어두고, 출제자의 풀이를 따라가 보자. 시카고의 인구를 300만 명으로 추정하고 한 가구의 구성원을 평균 3명, 피아노가 있는 집을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라 가정하면 시카고의 피아노 수는 20만 대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정당 평균 연 1회의 피아노 조율을 받고, 조율사가 하루에 조율할 수 있는 피아노는 3대, 1년 근무 일수를 250일로 계산하면 1년에 조율사 1인이 조율 가능한 피아노는 750대이다. 여기에 시카고의 총 피아노 수인 20만 대를 적용하면 시카고에 270명의 피아노 조율사가 있다고 추측해낼 수 있다.

    정확한 파악이나 예측이 어려운 수치에 대해 논리적 사고를 이용하여 근사치를 추정해내는 이와 같은 방식은,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엔리코 페르미가 고안하여 ‘페르미 추정’이라 불린다. 페르미 추정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에 논리의 절차를 만들어 답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판단의 근거를 ‘수치화’하여 검증 가능한 가설을 설계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되면 도출한 근사치와 실제 수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어디서 예측이 빗나갔는지를 논의할 수 있고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

    학교 성적, 회사에서의 실적, 상품 판매량, 유튜브 조회수, 퇴직연금 수익률,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 등 많은 것들을 숫자로 만나게 되는 세상이다. 이런 숫자들을 보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있었다면 이제는 주어진 숫자들을 나에게 유의미한 데이터로 바꾸어 보자. 필요한 것은 사칙연산, 그리고 직감과 어림짐작을 구체적으로 수치화하는 ‘숫자 감각’이다. 비즈니스 현장은 숫자로 가득하고, 성공도 실패도 확률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숫자에 강한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성과와 수익을 내고 있다.

  • 부모의 말
    김종원 (지은이) | 상상아카데미 | 2022년 8월 "아는 것과 실천하는 말은 다릅니다"

    부모의 말에는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좋은 소식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려면 긍정적인 방향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 좋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다."라는 말은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표현이다. 평소에 '때문에'라는 말을 자주 했다면, '덕분에'로 살짝 바꿔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도 네 덕분에 웃는다."

    부모는 무심결에 부정적 표현이나 명령이 담긴 말들을 사용하곤 한다. "그건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했어? 안했어?", "빨리 움직이라고 했잖아!"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했다면, "그건 조금 위험하니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로 살짝 바꿔서 말을 해보자. 부모의 언어가 긍정적일 때, 아이도 긍정적인 답을 한다. 긍정이 긍정을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종원 작가의 <부모의 말>에는 이처럼 모르지 않았지만 일상에서 실천하기 어려웠던 말들이 담겨 있다.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낭독과 필사를 통해 이 책의 말들을 나의 언어로 만들 것을 권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저자가 권하는 말들을 한 줄 한 줄 따라 쓰고, 읽다 보면 실천하기엔 조금 부끄럽거나 낯설었던 언어들이 조금 더 나와 가까워진다.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이 기적처럼 아름답게 바뀌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해 본다.

8.262022
  • 아라의 소설
    정세랑 (지은이) | 안온북스 | 2022년 8월 "정세랑 다이제스트"

    "좋아하는 마음으로, 좋아해서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기다렸었다." (205쪽) 소설 속 '현정'처럼 정세랑의 신작을 기다렸을 독자를 위해 이 책이 도착했다. 정세랑을 구성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친절함과 신랄함 같은 것들이 조각조각 모인 퍼즐 같은 책. 200조각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면 그림처럼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캔와인을 마시고, 좋은 우산을 사 작은 사치를 하고, 카페인을 줄이기 위해 하루 한 잔만 마실 수 있는 커피를 소중히 여기는 이 시대의 얼굴. 작가가 스스로 '가장 과감한 주인공에게 자주 붙이는 이름'(15쪽)인 '아라'라는 이름을 달고. 그 아라들은 이를테면 이런 조각들을 지니고 있다.

    아라의 고향 : 아라는 올림픽을 앞둔 H시에서 겨울엔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라의 경험 : 소설가인 아라는 더 이상 연애소설을 믿지 않는다. "세상이 드물게 나쁜 사람들과 평이하게 좋은 사람들로 차 있다고 믿던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라의 친구 : 아라의 친구들은 코드 파인딩 클럽을 함께한다. "완전히 회복할 수 없음을 인정한 후에도 계속하는 것"(130쪽)이 그들의 지금이다.
    아라의 세대 : 그들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기준은 높고 자본은 없는"(180쪽) 세대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소설 <현정>은 알라딘의 청탁으로 공개되었다. 주인공 현정은 합정의 지하 서점에서 지진을 만나 고립된 상황에서 열일곱 권의 소설을 읽었다. 무너진 세상에서 로알드 달의 소설을 읽으며 현정은 생각한다 "그의 책은 친절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207쪽) 내겐 많은 것이 붕괴된 2022년이었다. 붕괴된 서점에서 소설을 읽는 현정을 생각하며, 정세랑의 친절 한 조각을 손에 쥐고, 나 역시 아라와 동시대를 지나간다.

  •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리 스몰린 (지은이), 강형구 (옮긴이) | 김영사 | 2022년 8월 "카를로 로벨리가 공언한 맞수, 리 스몰린"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른다고 누군가 말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학자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때 이는 급진적인 주장이 된다. 주류 물리학계에서 시간은 '환상'이며 물리 법칙은 시간 바깥에 있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변하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가 자신의 '맞수'라고 공언한 이가 있다. 양자중력 연구의 석학, 리 스몰린이 "시간의 흐름은 본질적이고 실재하는 것이며, 비시간적인 진리에 대한 희망은 신화"라고 외치며 그간의 단단한 믿음에 균열을 낸다.

    <Time Reborn(시간의 재탄생)>이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최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져 왔으며,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에 관한 논의를 가장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추하고 불편하고 시간에 얽매인 듯 보이는 인간 세계를 순수하고 비시간적인 진리의 세계로 바꾸고자 열망"하며 물리학자가 된 저자가 20년의 연구 끝에 믿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기까지 어떤 발견들이 있었을까. 저자가 '여는 글'을 통해 "물리학 또는 수학에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을 강조하니, 혹여 물리학 책이 처음이더라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잠시 멍해졌다면 이 책을 권한다.

  • 재수사 1
    장강명 (지은이) | 은행나무 | 2022년 8월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 장강명의 귀환"

    장강명이 6년 만에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시작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이 심상치않다. <백치>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그것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는, 미결사건의 살인자가 첫 장을 시작한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라는 고백과 함께. 장강명은 원고지 3천 매가 넘는, 지난 세기에 사라진 듯한 '소설'의 전범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유독 방대한 것은, 도박빚에 쫓기던 그가 글자수 단위로 원고료를 받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검거되지 않은 살인자의 뒤편에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형사 연지혜가 있다. 연지혜는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을 재수사하고, 드디어 이야기가 추동한다. 연지혜는 "차도를 건널 때면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등을 기다리기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지하도나 육교를 택"(12쪽)하는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마주치면 불꽃이 튀지 않을 수가 없다. 100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범죄자와 형사의 내면을 취재하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한 사람을 죽게 하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것이 과연 한 악인의 잘못에 불과한지, 한 사회의 사법 시스템이 이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이 아닌지, 소설은 주장하는 대신 캐묻는다.

    문학상을 석권하며 자신의 존재를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각인시킨 이후, 장강명은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스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때론 불편한 질문이 되기도 했을 그 질문들의 방식처럼, 장강명은 쓴다. 소설가 정유정이 먼저 장강명을 읽었다. "마침내 나는 상상 속의 소설을 만났다. 이 소설이 바로 그 소설이다." 이것이 정유정의 대답이다.

  •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최현희 (지은이) | 위고 | 2022년 8월 "사회적 폭력으로 무너진 일상의 재건 일지"

    썼던 일기를 다시 읽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내 정서의 디폴트 값이 우울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던 때, 일기장 속 불과 3개월 전 날짜들에 삶에 대한 더없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이 빼곡한 기록을 보고 혼란스러웠던 기억. 정서는 언제나 어느 정도 출렁거리는 상태다. 큰 일 없는 일상에서도 기분은 업 다운을 반복한다. 그리고 저기압의 터널을 지날 때는, 낙관적인 날들이 아무리 가까운 과거였다고 해도 그 상태를 정확히 기억해거나 돌아가는 일이 어렵다.

    하물며 인생에 커다란 충격이 온 이후엔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에 약간의 의문을 품고 있다. 회복의 사전적 의미,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사건의 발생은 이미 이전과 이후를 갈라 놓는다. 나는 이 책을 회복보다는 재건 일지로 읽었다. 마중물 샘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 이후 그가 상처와 분노와 바뀌어버린 삶의 풍경을 하나하나 고통스레 삼키며 천천히 다시 일어서는 노력의 목표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것으로 읽히진 않았다. 다만 전에 상상한 적 없었지만, 도달해야만 하는 새로운 종류의 일상을 재건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그것은 언뜻 비슷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취약성을 완전히 끌어안은 채로 다시 강해지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괴로운 시간 동안 쓴 일기를 나누어준 그에게, 독자들이 할 수 있는 보답은 그가 재건하는 일상에 대한 응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커다란 폭력을 겪어낸 그의 고통 앞에 말을 함부로 얹는 것일까 조심스럽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감히 그의 새로운, 강인한 세계가 멋지다고 전하고 싶다.

8.302022
  • 뾰족한 마음
    위근우 (지은이) | 시대의창 | 2022년 8월 "위근우. 더 나은 논의를 위하여"

    비판받아 마땅한 미디어 콘텐츠가 무탈히 순항 중일 때,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때, 혹은 어떤 인물이나 콘텐츠가 해낸 일이 편견에 의해 저평가 되고 있을 때. 슬며시 위근우의 SNS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의 글은 언제나 늦지 않게 도착한다.

    위근우의 비판은 재빠르지만 날림이 없다. 이슈를 휘감고 있는 통념, 편견, 백방으로 튀는 누리꾼들의 의견과 언론의 헛발질을 모두 헤치고 이 시점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핵을 겨냥한다. 그의 문장은 두루뭉술한 법이 없다. 정확하고 뾰족한 문장들, 이에 찔린 이들의 오해와 비난은 어느새 구름 떼로 뒤따른다.

    지치지 않을까? 자주 생각했는데, 책의 부제가 "지치지 않고 세상에 말 걸기"다. 지치지 않기 위해, 무기력하게 타협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대단하지 않음이 모여 만들어낼 새로운 전망을 믿기 위해" 뾰족한 마음을 준비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빚은 마음으로 써낸 글들이 또 한 권으로 모였다. 이 글들에 기대 생각하고 위안하는 이들이 많다. 312쪽, 그가 쓴 문장들을 그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

  • 딜리터
    김중혁 (지은이)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한 번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면"

    "지우는 건 인간들이 최고다. 지구가 그 증거다" (9쪽, 딜리터 묵시록 중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이 첫 페이지의 규칙에 따라 전개된다. 어딘가로 증발한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존재들, 양말 한 짝, 친구, 지갑, 시간... 그것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딜리터가 사라져버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면, 당신은 '딜리터'에게 연락할 수 있다. 딜리터는 검은 명함을 전달하며 권한다. "딜리팅은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김중혁 신작 소설. 영상화를 상상케하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언톨드 오리지널스'로 김중혁식 판타지를 만난다. 소설가이자 딜리터인 '강치우'는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고 싶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산다. 세계의 레이어를 볼 줄 아는 픽토르 '조이수'와 만난 후 강치우는 자신이 사라지게 해버린, 저 레이어 너머의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조이수의 조력을 필요로 한다. 캐릭터의 생동감과 대사의 슴슴함이 어우러져 눈에 보이듯 펼쳐지는 겹겹의 세계. 한 번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모든 마이너스의 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은이), 신해경 (옮긴이) | 엘리 | 2022년 8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첫 책, 어슐러 르 귄 추천"

    “가장 남성적인 SF를 쓰는 작가"로 불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작가의 이름과 문체, 소설 속 생생한 군대 이야기와 여성을 향한 욕망이 이를 뒷받침했다. 10년간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해오던 그가 61세의 여성 작가임이 밝혀졌을 때 SF 문학계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 '팁트리 쇼크'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절대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작가의 성별을 바꾸어 보았을 때 그의 소설은 전혀 다른 것들을 담고 있었고, 이는 문학이 그동안 어떤 견고한 고정관념 속에서 쓰이고 읽혀 왔는지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내보인 책이 1973년 출간 당시 초판본 일러스트를 담은 표지와 함께 도착했다. 작가가 남성을 암시하는 필명을 통해 세상에 꼭 외쳐야만 했던, 글로 터뜨리지 않았다면 흘러넘쳐 스스로 폭발했을 강렬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가득하다. "작가로서의 여성과 여성으로서의 작가에 관한 모든 이론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작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우리의 어떤 가정들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하며 어슐러 르 귄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인류의 가려움을 벅벅 긁어주는 작가의 힘이 더없이 즐겁고 통쾌하다."라고 천선란 작가가 추천하며 함께 읽은 책이다.

  • 멘탈이 강해지는 연습
    데이먼 자하리아데스 (지은이), 김미정 (옮긴이) | 서삼독 | 2022년 8월 "당신의 멘탈은 충분히 강한가"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 향긋한 커피를 사 들고 사무실로 출근했는데, 상기된 표정의 상사가 다가와 다짜고짜 “일을 이따위로 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라며 쏘아붙인다. 열심히 부연 설명을 해보지만, 상사는 듣지 않은 채 자기 할 말만 떠들다가 씩씩거리며 사라진다. 그렇게 서서 30분간 시달리다가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손에 든 커피는 이미 차게 식어버렸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들은 아침부터 기분을 망쳤다는 생각에 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동료와 메신저를 통해 정성스럽게 상사를 욕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하지만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고, 정신을 추스른 뒤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자신의 평온함을 무너뜨리는 불쾌한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한 멘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미국의 떠오르는 자기계발 멘토 데이먼 자하리아데스는 강인한 멘탈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훈련을 통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번잡한 이론 설명과 성공 사례 자랑이 아닌, 오늘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트레이닝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그 과정은 고되고, 변화는 점진적일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다. 알다시피 인생은 원래도 힘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