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쉴 데 없던 학창 시절의 경쟁, 성인이 되고 나서 그때를 돌아볼 때의 반응은 크게 두 분류로 갈리는 것 같다. 그 잔혹한 시절을 통과해냈다는 데에 대한 '괴로움의 훈장'같은 성취감, 혹은 십수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악몽을 꿀만큼 독한 기억. 물론 둘 모두인 경우도 있다. 인생의 짧지 않은 시기를, 더군다나 자아 형성의 코어가 되는 시기를 경쟁과 압박이라는 갈고리에 갈기갈기 찢기며 보낸 이들의 마음엔 그 흔적이 오래, 진하게 남는다. 마음의 균열은 그저 흉터로 조용히 남아있지만은 않는다. 훈장 같은 성취감은 오만함으로 변질되기 쉽고, 독한 기억은 모멸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김누리 교수는 그것이 한국 사회의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 그럼에도 더한 불평등을 요구하는 시민들, 끝없는 자기 착취, 자살률 1위...
그렇기에 이 책은 표면적으로 한국의 교육에 관해 말하는 책이지만 근본적으로 교육 너머,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변화에 관해 말하는 책이다. 그는 한국 교육의 비정상적인 경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질문한다. 우리가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거나 '당연하다', '자연스럽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근거를 따져 물으며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꼬집는다. 그는 독일의 교육과 한국의 교육을 비교하며 다른 가능성을 알려주고 시야를 트이게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교육도, 사회도 이미 벼랑 끝으로 몰렸다는 감각이 엄혹하게 다가온다. 그 절망감을 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지의 여부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오직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 사회과학 MD 김경영
목련 피는 계절, 이대흠의 시의 마지막 행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를 제목이 인용한 창비시선 500번 기념 시선이 출간되었다. 401번으로 1948년생 시인 김용택의 <울고 들어온 너에게>(2016)가, 499번으로 2000년생 시인 한재범의 <웃긴 게 뭔지 아세요>(2024)가 출간된 것처럼 창비 시선의 400번 시대는 한국시의 현재와 미래가 어우러지는 시기였음을 엮은이 안희연, 황인찬은 주목한다. 401번에서 499번까지 이름을 올린 시인들의 시 중 한 편씩만 골라 현재적으로 어우러지는 시 90편을 물 흐르듯 엮었다.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박형준 <달 나라의 돌> 72쪽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안희연 <슈톨렌> 74쪽
인용한 박형준-안희연처럼 안미옥-박연준, 장석남-박라연, 고영민-황인찬 등으로 시가 맞닿아 배치되어 있는데, 접한 시와 시 사이에서 훈기가 일면서 시를 읽는 새로운 리듬이 만들어지는 점이 읽는 내내 신기했다.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읽는 현재적인 시의 풍경. 창비시선의 시 중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읽는 시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응답한 77인의 시인의 답을 더해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도 함께 출간되었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시를 사랑한다면, 그리하여 시가 들려주는 그 낯선 목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포개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새로워질 수 있고, 시는 우리와 함께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엮은이의 말
믿고 보는 창비 좋은 어린이책, 제28회 대상 수상작으로 정은정 작가의 <아무거나 문방구 1>이 당선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도깨비 '아무거나'는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이야기라면 아무거나, 뭐든 좋아해서 도깨비방망이는 잊어도 이야기 장부는 꼭 지니고 다닌다. 그런 도깨비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초등학교 뒷골목에 '아무거나 문방구'를 차린다.
도깨비 '아무거나'는 한때 주인으로부터 사랑받았다가 유기당해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만 고양이 귀신 '어서옵쇼'를 문구점의 평생 직원으로 고용한다. '아무거나'와 '어서옵쇼'가 운영하는 문방구에서는 진기한 물건을 진열해 둔다. 우연히 문방구를 찾은 네 명의 어린이, 제이, 영재, 나리, 지우는 각각 '달달 샘물', '강아지 가면', '도깨비감투', '더블더블컵'을 공짜로 손에 넣게 되면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아이들은 문방구로 다시 돌아가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고, 문방구 주인아저씨이자 도깨비는 아이들의 여러 이야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장부에 기록한다.
누구나 각자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이상의 고민거리를 지니고 산다. 마음 안에 꽁꽁 싸매어두기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난 후에 왠지 모르게 안심되고 위로받는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이 책은 어떤 이야기든 좋아하는 도깨비라는 신선한 캐릭터와 네 아이들의 신기방기한 사연을 통해 이야기가 지니는 힘과 대화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값진지 알려준다.
- 어린이 MD 송진경
검사인 히로키에게는 등교를 거부하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 인간에게는 당연히 걸어야 할 평범한 길이 있다고, 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의외로 많고 그 사람들과 범죄와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진다고 믿는 그는 아들이 그 길을 벗어나게 될까 초조하다. 침구 전문점 직원으로 일하는 나쓰키는 인생을 통째로 규정하는 비밀을 안고 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타인이나 사회와의 연결을 최대한 지양하는 삶을 살지만,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롭다. 대학생 야에코는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학교 축제 준비위원으로서 ‘다이버시티 페스티벌’을 기획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과 연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는 남자를 만난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드러나는 순간, 소설은 독자를 강렬하게 흔들어놓는다.
2021년 출간 이후 일본을 뒤흔든 문제의 베스트셀러. ‘다양성’이라는 말에도 쉽게 포함되지 못하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죽이고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잡을 다른 손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책은 정욕(正欲),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지, ‘바르다’는 것, ‘어엿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공격적으로 묻는다. 그리고 바르지 않다고,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 욕망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고 나서도 쉽게 입을 때기 어렵게 만드는, 그럼에도 마음속 한구석에 균열을 일으켜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념을 주체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작. 카프카가 말했던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 소설 MD 박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