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 사이엔 무수한 책장이 여름 숲처럼 무성하다. (11쪽)
지고지순한 사랑에 관한 정용준의 소설. 이야기는 여름을 닮은 도시 소랑에서 시작된다. 소랑도서관 레지던시 작가 여름사람 ‘인하’는 말 대신 패드에 입력한 텍스트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는 울음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지 않고, 사람에게 곁을 내주고 싶지 않다. 그런 인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겨울아이 '동아'가 있다. 말을 넘어설 용기를 겨우 낸 연인에게 '겨울통'이 닥친다. 여름에서 겨울로 틀림없이 시간이 가고, 이 병에 걸린 사람은 12월의 어느 날 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별을 앞둔 연인은 '사라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붙잡기 위해,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계절을 바꾸려 한다. 물이 되면 연인의 '틈과 구멍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는 생각'(132쪽)을 할 정도로 어떤 사랑은 지극할 수 있다. 기꺼이 메마른 겨울 땅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 연인의 이야기를 정용준이 전한다. <구의 증명> 최진영이 '사랑에 빠지면 기적을 바라게 된다.'고 말하며 이 사랑 이야기를 추천했다.
인류의 역사는 도구를 통해 능력을 확장해 온 여정이다. 돌을 깨뜨려 쓰던 석기 시대부터 산업혁명, 컴퓨터와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도구를 쥔 자들은 시대를 선점했고 관성에 머문 이들은 도태되었다. 이 도구의 법칙은 거대한 위기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팬데믹으로 강연 무대가 사라졌을 때 저자 김미경이 '디지털 전환'이라는 도구를 쥐고 생존을 넘어선 성장을 일궈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능형 도구인 'AI'를 맞이했다. 결국 AI 또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탄생한 도구일 뿐이며, 다가올 미래의 격차는 이 위대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플러스'해 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 낯설고 거대한 변화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배움에 끝이 없음을 몸소 증명한 저자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생 기술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예순둘의 나이에 코딩 한 줄 모르는 상태에서 직접 AI 에이전트를 만들고 자신만의 디지털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이 책은 그 도전과 성장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단순하다. AI 문명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선 1학년이라는 것! 나이라는 벽을 넘어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문명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가 해냈다면, 지금 이 책을 펼치는 독자 역시 충분히 해낼 수 있다. AI 시대의 미래는 특별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다.
영화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가 거미에 물려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며 초능력을 얻었듯, 우리 역시 'AI'라는 비범한 거미에 기꺼이 물려 생각의 유전자를 바꿀 때다. 그 짜릿한 변화를 받아들여 나만의 '초(超) AI 능력'을 장착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평범한 보통 인간이 아닌 세상을 새롭게 조각해 나가는 진짜 '플러스 휴먼'이 되지 않을까?
"안녕." 아이가 건네는 반가운 인사에 세상이 봄처럼 환해진다. "기뻐."라고 말하자 나풀대는 나비처럼 기쁨이 마음 가득 번져나가고, "고마워."라는 말을 전하면 웃음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난다. 속상할 때는 가시 돋친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럴 땐 마음이라는 밭에 심긴 고운 말 씨앗을 하나씩 틔워보자. 땅을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 같은 위로의 말, 반짝반짝 힘을 북돋우는 응원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들의 마음에도 알록달록 꽃밭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는 큰 힘이 깃들어 있다. <괜찮아>, <너는 어떤 씨앗이니?> 등으로 어린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최숙희 작가가 신작 <꽃처럼 말해요>에서 아이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감정과 말들을 담았다. 다정한 말이 꽃처럼 피어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고 주변을 색색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말에 담긴 힘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위대하고 신성한 카눔 제국은 먼바다로부터 나타나 인류를 위협하는 거대 괴수 레비아탄으로부터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군은 총 9등급의 계급으로 구분되었고, 레기온, 아포세티칼, 엔지니어, 유덱스 등 직역에 따라 구분된 ‘이얄렛’에 소속되어 제국을 위해 복무했다. 그중 수사 및 감찰 기관에 해당하는 유덱스 소속 보조 수사관이자 시그넘 계급의 디니오스 콜은 삼중 성벽으로 보호받는 제국의 내륜 밖, 해벽 바로 안쪽 외륜의 다레타나 지역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4개월 전 내륜에서 갑자기 발령되어 온 수사관 아나 돌라브라의 보조 수사관으로, 장교들의 급여 사기 사건 정도나 다루던 그는 어느 날 귀족 저택에서 사망한 엔지니어 소속 장교의 사망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거대한 나무가 사람의 몸을 뚫고 자라나 순식간에 사망에 이른 기괴한 사건을 맞닥뜨린 그는 완전 기억 능력을 바탕으로 사고 현장의 모든 것을 기억해 수사관 아나에게 보고하고, 아나는 사건의 진실에 단번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사건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제국 전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비리와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거대한 음모를 마주하게 되는데….
2025년 휴고상과 세계환상문학상을 석권한 화제의 소설. 출간 후 <셜록 홈즈>, <진격의 거인>, <서던 리치> 등 시대를 풍미한 명작들과 함께 거론되며 호평받았고, ‘판타지와 추리라는 두 장르를 완벽하게 조합’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이례적으로 휴고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에드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저자는 외부의 비인간적인 세력으로부터 실존적 위협을 받는 작중 사회가 파시즘적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며, 작품 속 괴수들이 전체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대로 기능하는 인간 사회만이 맞설 수 있는 거대하고도 복잡하며 새롭고도 영원한 도전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고 밝혔다. 외부의 적이 공동체의 실존을 위협하는 상태에서 각자의 욕망과 지향에 따라 움직이는 다양한 인간군상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2018년 독일 뮌스터에서 타계한 허수경의 마지막 시집이 될 유고시집. 42편의 시에 난다시편에 실리는 '시인의 편지'를 대신하는 산문 세 편과 표제작 영문 번역본을 함께 실었다. '혼자 가는 먼 집'을 향하여 나아가 폐허가 된 도시에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가늠한 시인이 일곱번째 마지막 시집으로 건네는 말은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어떤 시는 시인이 머물게 될 곳에 먼저 가있는 것 같다. 지상에서 시인이 적은 문장들은 미리 시간을 건넜다. '우리가 공중에 뜬 저녁 같은 한 권의 책이 될 때'에 '우리가 아주 헤어져 목소리로만 만나는 귀가 되더라도' (<듣는 책>)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한 노래가 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듯'(<푸른 계절이 왔네>) 시는 말을 건넨다. '동화책, 울지 마, 우리는 동무잖아'(<동화책 시절>) 진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뮌스턴으로, 방에서 방으로 옮겨다니며 시인은 메소포타미아의 폐허를 보았다. 시인이 쓰고 옮긴 찰나의 몸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교차해 허수경을 읽으며 한 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타계 넉 달 전. 투병중이던 시인은 제15회 이육사문학상을 수상소감을 글로 적어 보냈다. 시인의 말이 된 이 글을 덧붙인다.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쓸 것인가?”
이 모든 시간을 다 합하여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예!”
하고 저는 답할 것입니다.
2018년 6월 28일 허수경
여름이면 풍성하게 피어난 수국을 바라보며 향긋한 차를 즐길 수 있는 수국 찻집. 다섯 멧밭쥐들은 지난 여름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며 산딸기를 한 아름 따 들고 찻집 주인 두꺼비 노부부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정원에는 수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찻집 간판은 비뚤어져 있다. 근심 어린 표정의 두꺼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힘으로는 찻집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 문을 닫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준다.
"할머니,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한마음으로 외친 멧밭쥐들은 할머니의 곁을 지키며 무너진 일상을 하나씩 다시 세우기 위해 힘을 모은다. 목마른 꽃에 물을 듬뿍 주고, 뜨거운 햇볕을 가려 줄 그늘을 만들며 정성껏 정원을 돌본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를 위해 책을 읽어주고 함께 안경을 맞추러 간다. 멧밭쥐들의 따뜻한 마음에 멈춰 있던 찻집의 시간은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시들었던 정원과 마음에도 싱그러운 여름빛을 닮은 생기가 번져 간다.
현대 한국인의 75% 이상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를 묻는 조사에서 1위로 꼽힌 것은 ‘본인 의사와 무관한 연명의료’였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일부에게만 허락된 제도로, 많은 사람에게 닿지 못한다. ‘간병 살인’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사회에서 돌봄은 여전히 가족과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자기 죽음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다 보면, 병원에서 오래 치료받는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지면서 조력임종을 하나의 탈출구로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2022년 이른바 ‘조력존엄사법’이 국내 최초로 국회에 발의됐고, 2024년에도 같은 취지의 법안이 다시 발의됐다. 조력임종 찬성 여론이 80퍼센트에 이른다는 이 시점에, 우리는 이 새로운 죽음의 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암 병동에서 중증 질환 환자를 주로 만나는 정신과 전문의,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을 연구해온 신장내과 전문의, 의료윤리와 역사를 오래 가르쳐온 의료인문학 교수. 서로 다른 자리에서 죽음을 마주해온 세 사람이 함께 조력임종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이 책에 담았다.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개념 정리부터 한국의 말기 돌봄 현실, 자기결정권의 이면, 네덜란드와 일본, 캐나다와 미국, 스위스에서 대만 등 해외의 실제 사례까지 조력임종에 관한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재난에 가까운 말기 돌봄 공백 사회에서, 새로운 죽음의 방식이 우리 공동체에 남길 영향력에 대한 절박하고 진지한 탐구. 더 나은 죽음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분리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그림책상 특별상을 수상한 강혜숙 작가의 독창적인 인물 도감 <101 전성기 도감>은 0세부터 101세까지, 각기 다른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문학·과학·스포츠·경제·음악 분야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만의 특별한 감각과 섬세한 터치로 완성한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는 책 속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한다.
작가는 “전성기는 산꼭대기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원하는 산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전성기가 있으며, 중요한 것은 숫자에 불과한 나이가 아니라 ‘지금’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린이에게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태도를 배우는 유익한 경험을, 어른에게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인물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세대를 넘어 누구나 공감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인물 도감이다.
안토니 가우디 서거 100주기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첨탑 완공의 해를 맞아 <레우스 수기>가 알라딘 북펀드로 세상에 나왔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가우디의 작업실이 불타면서 도면과 모형, 메모 등 모든 자료가 소실되어, 가우디의 건축 세계는 완성된 건축물을 둘러싼 해석과 추측으로만 전해져 왔다. 가우디가 7년간 손수 써 내려간 노트 한 권만이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제목이 없었던 이 노트는 그의 고향 레우스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여 <레우스 수기>라 이름 붙여졌다. 그 속에는 가우디의 고민과 탐구, 건축에 대한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가우디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가우디의 건축을 화려한 장식과 비정형의 곡선으로 대표되는 감성적인 이미지로 떠올리지만, 이 책으로 만나는 가우디는 전혀 다르다. "형태가 완벽할수록 장식의 필요성은 줄어든다."고 말하며 장식을 절제한 구조적인 건축을 추구하고, 제한된 예산 안에서 낭비를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재료와 시공 방식, 적정 설계비를 냉철히 고민하는 이성적인 모습이다. 오페라 가르니에, 사크레쾨르 성당을 비롯한 동시대 건축과 그리스·로마, 고딕 건축의 역사, 도시와 산업 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평을 펼친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가우디가 끊임없이 자문하는 사유의 출발점. '광기의 천재'라는 수식어 너머에는 치열하게 질문하고 탐구하는 한 인간이 있다. <레우스 수기>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가우디를 새롭게 정의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1년 전과 올해 상황이 다르고 지난달과 이번 달 상황이 또 다르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동의를 했건 하지 않았건 질주하는 세상은 우리 모두의 발목을 묶어 맨 채 달린다. 이 어지럼증을 어찌해야 하나. 김상욱 교수는 물리학의 기본은 변치 않는 물리량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물리학의 기본 원칙을 그는 확장시켜 세상에 적용시킨다. "변화의 시대, 변치 않을 것부터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여, 이 책에선 10년 뒤에도 변치 않을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법칙,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더 나은 내일을 찾는 과정, 여러 국가들의 비슷한 몰락과 그 과정에서 건져낸 우리 앞날을 결정할 역사라는 초기 조건의 의미, 끊임없이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인간의 몫... 과학 지식과 사회 진단이 버무려진 그의 문장들은 흡입력 있게 읽히며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이 혼잡한 시대, 중심을 잡아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이 변치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의 베이스캠프로 삼아봐도 좋겠다. 28편의 글은 한 편 한 편 그리 길지 않아 부담이 덜하고, 그러나 금세 날아가 버리는 가벼운 내용은 아니기에 곱씹으며 생각을 발전시키기에 적절하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참고 자료들로 다음 독서를 이어갈 계기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은 덤이다.
미키 깁슨이 부자 체납자들의 자산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 사립탐정회사 프로아이에 취직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급여도 높았고, 소싯적 배워둔 컴퓨터 기술도 써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거의 풀타임 재택근무가 가능해,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인 미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집 근처 압류된 저택을 직접 방문해 유형자산을 파악하고 목록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의아했지만, 잠깐 현장에 바람 쐬러 나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한 시간쯤 차를 몰고 도착한 저택에 들어선 미키는, 집 안을 수색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듯한 감각, 윙윙거리는 소리. 수상한 소음과 기류를 따라 발을 옮기던 미키에게 순간 ‘냄새’가 덮쳐왔다. 과학수사팀에서 2년, 제복 경관으로 6년, 형사로 4년 근무한 전직 경찰 출신인 미키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발견된 것은 부패하기 시작한 남자의 시신. 그리고 이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미키 자신이었다.
전 세계 2억 부 판매를 기록한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의 새로운 시리즈. 전직 형사이자 현재는 금융범죄를 조사해 자금을 추적하는 일을 하는 싱글맘 ‘미키 깁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밀도 디지털 범죄 스릴러다. 데이비드 발다치는 이번 작품에서 현대의 금융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스릴러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치밀하게 짜인 함정에 빠져 살인사건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 미키와, 그를 용의자로 만들어 조종하는 의문의 존재는 거대한 은닉 자산의 행방을 쫓아 세계 곳곳을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를 속이고 추적한다. 전통적인 마피아 범죄와 최첨단 디지털 금융 범죄가 결합된, 현대 범죄 스릴러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
문지혁의 한국어 수업. 이민 작가를 꿈꾸며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의 <초급 한국어>(2020), 바다가 보이는 사립대에서 한 학기 동안 '나에 대한 글쓰기'를 가르치는 강사의 <중급 한국어>(2023)를 잇는 세 번째 이야기다. 문지혁이되 문지혁이 아닌 소설 속 인물은 '고급 한국어' 수업을 기대했을 독자에게 실전을 내민다. 인생은 언제나 실전이기 때문이다.
2024년 1월 23일. 소설 속 평행우주의 문지혁은 '다른 학교에서 그만두신 분, 실제로는 쫓겨났을지도 모르는 분을 왜 우리가 채용해야 하죠?'(23쪽)하는 대사를 들으며 K대학 전임교원 임용에 탈락한다. 그에게 대신 주어진 강의실은 구청의 ‘나도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뽀개기’ 수업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주인공은 강의와 글쓰기와 육아를 오가며 삶이라는 실전을 마주한다.
우리네 삶처럼 소설은 실없고 짠하다가 웃기고 사랑스럽다. 한 소년의 성장기를 12년 동안 지켜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처럼,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시간이 흘러 <초급 한국어> 시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딸은 이제 말문이 트여 작가인 아버지와 끝말잇기를 한다. 사람 - 람보. 다람쥐 - 쥐구멍 - 멍게로 이어지는 낱말 핑퐁처럼 하루의 밥벌이와 문학이 시소처럼 오르내리는 리듬을 따라 흐르다보면 어느새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평화를 바라게 되니 우리도 자신의 끝말잇기를 이어나갈 수밖에. 읽고 난 자리에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촉망받는 영문과 교수이자 교양 있고 세련된 어른이었으며, 다정하고 가정적인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티븐이 열한 살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다. 갑작스레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향한 의문과 그리움, 원망과 분노는 평생 스티븐 마음 한편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차마 어머니와도 나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스티븐은 아버지가 홀로 이어가고 있을 비밀스러운 삶을 상상한다. 아버지는 어째서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걸까? 스티븐이 알던 모습 말고도, 아무도 모르는 또 다른 면이 있었던 걸까? 스티븐은 떨쳐낼 수 없는 내면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그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불거지는 갖가지 문제가 아버지의 실종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자문한다.
자신의 인생이 위기에 놓이자, 그는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기로 마음먹는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일기장과 아버지가 남긴 편지와 메모를 다시 세세히 들여다보고, 당시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던 동료와 친구들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서로 모순되거나 엇갈리기까지 한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아버지는 더욱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로 다가오며, 그나마 손에 쥔 단서들마저 구체적인 형상을 잃고 모호해진다. 평행 서사처럼 여러 갈래로 존재하는 삶, 그 수많은 가능성 사이를 헤매던 스티븐이 끝내 가닿는 진실은 결국 무엇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소설집 <사라진 것들> 이후 2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는 앤드루 포터의 신작. 장편 소설로는 <어떤 날들>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불확실한 기억을 더듬어 과거를 재구성하며, 가장 사랑하는 이의 삶에 관한 진실을 좇는 여정을 작가 특유의 고요한 시선과 절제된 문체로 담았다. 가장 깊은 애정을 주고받는 이들마저도 끝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앞에서 마주하는 진실과, 이를 뒤로하고 내딛는 발걸음이 가닿는 장소가 독자들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그런 밤이 있다. 전셋집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고, 뉴스에서는 집값 이야기가 쏟아지고, 주변에서 하나둘 집을 샀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그런 밤. 계산기를 두드리다가도,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다가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 멈춰 선다. '지금 사야 할까, 아니면 기다려야 할까.' 집은 참 이상한 존재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가장 큰돈이 오가는 자산이다. 우리는 집을 이야기할 때 숫자보다 감정을 먼저 꺼내곤 한다. 불안과 조급함, 기대와 욕심이 뒤섞인 채 결정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재무 의사결정은 감정이 아니라 '이해' 위에 세워져야 한다. 집값이 왜 오르고 내리는지, 사람들은 왜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지, 좋은 집의 기준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막연했던 두려움은 명확한 방향을 가진 판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 판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부동산을 전혀 모르던 주인공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어느새 함께 성장하게 된다. 복잡한 이론은 딱딱한 설명이 아니라 생생한 대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어려운 개념은 누군가의 현실적인 경험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읽는 내내 공부를 한다기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란히 따라 걷는 기분이 드는 이유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신기하게도 부동산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디가 오를지 찍어주는 예언을 배운 것이 아니다. 대신 무엇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된다. 결국 부를 만드는 사람은 남의 말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Live) 위해, 집을 바르게 사는(Buy) 눈을 뜨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건넨다.
여기, 가자지구 전쟁을 몸소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있다.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의 저자 알라 알카이시는 굶주림과 생존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목격한 현실을 언어로 남긴다. 이 책은 전쟁의 한가운데서 사라져가는 세계를 증언하는 한 사람의 기록이다.
그는 뉴스 속 숫자와 속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을 열두 편의 에세이와 열네 편의 시로 옮겨낸다. 허물어져가는 삶과 기억을 붙들어 가장 가냘프게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봉쇄 너머의 세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 책은, 가자지구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굶주림과 환멸, 박탈과 무감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전쟁은 종종 통계와 속보의 형태로 소비되곤 한다. 저자는 그런 세태 속에서,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자지구를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교육부가 2026년부터 초·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사회정서학습(SEL, Social Emotional Learning)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면서, 아이들의 마음 성장과 관계 형성을 다룬 도서들이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상큼한 토마토 캐릭터가 돋보이는 <신비한 물물 교환소 토마토마켓>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선보인 판타지 동화로, 마음 돌봄과 관계 회복의 가치를 따뜻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지아는 단짝 친구 다율이와 사소한 오해로 다투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진다.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선뜻 진심을 전할 용기를 내지 못하던 지아는, 사연이 담긴 물건을 교환해 주는 신비한 공간 '토마토마켓'을 찾는다. 그곳에 다율이와 함께 만들었던 우정 팔찌와 자신의 속마음을 담은 글을 남긴 지아는 얼마 뒤 교환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토마토마켓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다율이를 만나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에게 전해 보는 경험은 건강한 관계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이 작품은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흥미로운 판타지 설정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고 나누는 과정을 친근하게 그려낸다. 서툴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하는 지아와 다율이의 이야기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며, 타인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운다.
연일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가 쏟아진다. SNS에는 주식 수익을 인증하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높은 성과급이 예상되는 특정 기업이 자리한 지역에서는 외제차 딜러들이 바쁘다는 소문도 들린다. 온통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만 들려오니, 나만 낙오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이런 불안은 남들 보기에 돈 좀 있다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팽배하다. 고정적인 수입이 꾸준히 들어오고, 내 집 마련을 이미 했고,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어도 불안을 느낀다. 성실하게 노동해 돈을 버는 사람도, 돈을 차곡차곡 모아 투자하는 사람도 초조해진다. 도대체 얼마를 가져야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금융시장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저자는 현대인이 돈 때문에 마주하는 막연한 공포의 실체를 파헤친다. 우리가 느끼는 돈에 대한 불안은 사실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광고와 SNS 등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불안을 부풀리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불안은 사라진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하기 쉬운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또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가격이 비싼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며, 이를 ‘가격의 저주’라 칭한다. 타인의 평가인 가격보다 자신의 만족감인 ‘가치’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돈과 노동, 그리고 우리 사회에 대한 독특한 성찰이 곱씹을 만하다.
"배가 곧 출발합니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뿌우,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원하고 널찍한 판형 가득 푸른 바다가 펼쳐지며 제주로 향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어느 여름, 우연히 해녀들의 밥상에 초대받은 소윤경 작가는 어쩐지 마음이 이끌려 계속해서 제주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제주에 오래도록 머물며 해녀 삼춘들과 함께한 하루들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겼다. 물질을 마친 뒤 둘러앉아 나누는 밥상, 성게를 까는 손끝, 메밀꽃이 어우러진 풍경, 바다 냄새가 스민 골목이 생생하다.
모진 파도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 줄 것을 믿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해녀 공동체의 삶은 작가에게 나이듦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위로해 주었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물질과 바다에서 얻은 제철 먹거리로 차린 소박한 밥상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보듬어주었다. 참외된장냉국, 성게비빔밥, 빙떡, 솔라니구이 등 제주 토속 음식의 레시피도 함께 실려 바다와 계절, 사람의 노동이 빚어낸 진짜 제주의 맛을 전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한 두근거림이 있다. 해녀들이 "오고셍이" 지켜 온 삶과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러 있다.
<눈으로 만든 사람>이후 5년, 최은미 소설집. 2021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에 선정된 이전 작품집의 한기 이후 이번 소설집에서 독자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무심히 내리쬐는 사악한 여름의 햇볕이다. 가차없이 부패하는 무른 과일의 향이 코를 가격할 때, 컨테이너 박스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통증처럼 등으로 쏟아질 때. 최은미의 소설은 독자를 쥐고 흔들어 인간의 무력함을, 계절의 난폭함을 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육감적이나 공격적이거나 동물적인 문장들이 휘몰아치는 순간 코가 뚫리고 땀구멍이 열린다.
2025 김승옥문학상 대상 <김춘영>, 2023 이상문학상과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그곳>, 2022 이상문학상 우수상 <고별> 등 발표할 때마다 주목받은 소설들이 단단하게 묶였다. 최은미의 소설이 묘사하는 산간지방의 땅. 그 흙냄새를 함께 감각하며 앞에 놓인 '지방-공간 3부작' 세 편의 떳떳하지 못한 서술자의 목소리를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 순서대로 듣는 것으로 독서를 시작하면 좋겠다.
<무장하는 날>의 서술자는 '버섯이 자라는 소리가 들려올 만큼 몸의 감각들이 고요하게 곤두서는 순간'을 기록한다. 이러한 문장을 읽는 동안 독자도 소설을 읽는 자신의 머릿속이 곤두설만큼 깨끗해지는 것을, 좋은 소설을 맛보는 미뢰가 예리해지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 믿음직한 소설가가 여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 더 좋은 소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반갑다. 이 반환점을 돌아 최은미가 보여줄 다음 장이 벌써 기대가 되는 소설집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 10-14로 뒤진 한국선수는 마스크를 내려쓰기 전, 주문처럼 혼잣말을 되뇌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상대가 한 점만 더 내면 끝나는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말이 경기를 뒤집었다. 말은 참 묘하다. 비단 운동선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기분을 살리기도 하고, 또 어떤 말은 자기 자신을 먼저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그렇지 뭐" 같은 습관적 한탄은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고, "한번 해보지 뭐"라는 짧은 문장은 막혀 있던 생각의 문을 조용히 열어젖힌다. 결국 우리가 매일 입 밖으로 내보내는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씨앗이다. 어떤 날은 위로가 되고, 어떤 날은 명령이 되며, 어떤 날은 운명을 바꾸는 주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행동을 만들며, 행동이 결국 삶의 궤적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어쩔 수 없어", "이번에도 안 될 거야"처럼 무심코 반복해온 말들이 어떻게 가능성을 가두는 감옥이 되는지, 반대로 어떤 말이 불안과 실패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바꾸는지 이 책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지금의 삶은 능력이나 환경보다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들려준 문장들의 결과일지 모른다. 만약 원하는 미래가 있다면, 바꿔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일 수 있다. 이 책은 더 나은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출발점을 제시한다. 새로운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라, 오늘 자신에게 건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의 선물>(1995)의 유년기, <빛의 과거>(2019)의 청장년기를 잇는 은희경 시간 3부작의 완결편. 인생의 저녁을 지나는 너무 다른 자매, 60대 여성 안나와 경선의 '첫' 마주침을 통해 삶의 도착점에도 열려있을 가능성의 문을 두드려본다.
같은 해 1월에 태어난 안나와 12월에 태어난 경선은 서로에게 무심하다. 연금 생활자로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형편인 안나가 경선이 살고 있는 신도시의 고층 아파트로 이사한 후, 종양수술을 하는 경선을 간병하게 되며 자매는 서로에게 언니가, 동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을 되짚게 된다.
'노인이라는 일반화가 너무 강력해서 개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77쪽) 은희경의 자매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이 일반화를 벗겨낸 고유하고 개별적인 여자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친척의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예쁜 아기인 경선은 외모 품평을 즐기는 노인이 됐다. 어깨가 넓고 머리가 큰 아이로 태어났던 안나는 자신이 사람들의 무관심에 초연한 반면 경선은 나이들어 받는 푸대접을 부당하게 여긴다고 느낀다. 서로를 의식하고 오해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자매의 속마음엔 조금씩 얄미운 구석이 있다. 은희경 특유의, 이 인간의 모서리를 뭉개지 않는 신랄함이 묘하게 다정하게 느껴진다.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보게될 자매는 '첫' 우정의 문 앞에 선다. 그들이 미래를 보듯 독자도 이 소설과 함께 자신의 시간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2025년 알라딘 독자 선정 올해의 책 1위. 40만 독자를 사로잡은 <혼모노> 성해나가 기담으로 여름 독자를 만난다. 기이하고 이상한 성해나의 세계엔 1944년 '야스쿠니신사 영현께 바치는 글'을 써 우등 상품으로 받은 벚나무 책상. 타인의 보잘 것 없는 삶을 매수하는 경매장, 옵티머스 안드로이드가 인간 대신 '고(蠱)'를 제조하며 저주를 감당하는 작업장이 있다.
사실적인 소재, 칼로 자른 듯 가차없는 전개, 문장의 낙차로 독자를 사로잡았던 작가는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의 '어제' 세 편,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의 '오늘' 세 편, 안심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일' 세 편을 세 토막으로 묶은 기담으로 우리가 '언캐니(Uncanny)'를 감지하는 순간. 그 밑바닥의 오싹함의 연원을 추적한다.
꺼슬꺼슬한 각양장 책을 열어 작가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 각 작품 말미의 작업 노트에서 멈추며 기이해하고 오싹해하며 작품집을 만끽했다. '역사는 대패질하듯 말끔히 깎아내거나, 모두가 함구한다고 해서 소거되지 않는다. 죄를 덮은 자리에는 꺼슬꺼슬한 흔적이 남는 법이다.'(25쪽)라고 말하며 작가가 내미는 것은 무엇이 고여있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항아리.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게 유물에 전승되는 저주일지, 새 시대의 폭주하는 기술일지 골똘히 생각하며 항아리 안쪽을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는 순간, 사로잡힌다.
<제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클레르 마랭의 신작. <제자리에 있다는 것>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이 문장의 리듬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운 입맛을 다신 독자라면 이 책에서 다시 그리웠던 읽기의 느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책에서 클레르 마랭은 '단절'을 주제로 존재와 삶에 대한 통찰을 돌돌 풀어낸다. 그가 주목하는 단절'들'은 다층적이다. 파괴적 사건이 벌어진 후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 과거의 나와의 단절, 나의 변화로 인한 가족과의 단절, 나와 삶을 공유해온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 망가져가는 세계의 생태적 단절... 그는 여러 종류의 단절들 사이를 매끄럽게 오가며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이 깃든 문장들을 쉼 없이 이어간다.
원서로는 <단절(들)>이 먼저 출간되었기에, 이 책 안에서 <제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연결되는 단상의 시초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읽다 보면 단절과 제자리라는 얼핏 상관없어 보이는 두 단어가 꽤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하게 된다. 두 책 중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괜찮다. 다만 한 권을 읽으면 반드시 다른 한 권 또한 망설임 없이 집어 들게 될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일수록 질문도 많아진다. 아이들의 엉뚱하고도 기발한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진땀을 흘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특히 몸에 관한 질문이라면 설명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몸속을 비춰봐!>는 놀이와 학습을 절묘하게 결합한 과학 그림책이다. 책의 안내에 따라 특정 페이지 아래에 손전등을 비추면 충치, 머릿속 모낭, 척추의 모양, 여자와 남자의 생식 기관, 지문 등이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난다. 충치는 왜 생기는지, 자세가 나쁘면 등이 왜 구부정해지는지,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나이가 들면 왜 주름이 생기는지, 부러진 뼈는 어떻게 다시 붙는지 등, 손전등 불빛을 따라가다 보면 인체의 신비로운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꼭 손전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핸드폰 플래시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아이는 직접 비춰 보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에게 건넨 책 한 권이 어느새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놀이가 되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차곡차곡 쌓인다. 놀이와 배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책은 아이와 어른 모두를 흥미진진한 인체 탐험의 세계로 이끈다.
한국소설의 '특이점' <고래> 천명관이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소설의 빌런으로 'AI'가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남산타워'가 세계인이 선망하는 장소로 떠오르는 이 시점. 천명관의 소설은 1950년대의 서울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선택해 우리가 너무 빨리 잊어버린 한 시절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전쟁과 이념이 할퀴고 간 자리에 어린 앵벌이들이 '도시의 유령'처럼 떠돌며 삶을 구걸하던 때로.
이 도시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 미국 본토에서 조선 최초로 학위를 따오신 '박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47쪽) 살 만한 세상이 온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의 말씀과 '구름탄'에 순종해 앵벌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주, 가여움과 울음소리와 노랫소리로 구걸을 한다. 그들은 얻어맞고 학대당하고 사기를 치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타고난 음감으로 엄마의 풍금소리에서 계명을 읽어내던 주인공 소년 '동이'는 연이의 죽은 할아버지가 쓰던 낡은 아코디언에 매혹되어 거리의 악사가 된다. 구슬프고 신명나게 팝송을 연주하는 소년은 미군부대의 화려한 조명에 홀려 점차 진정한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꿈을 꾸는 소년은 신화 속 인물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게 될 것이다.
천명관의 소설은 보기드문 하드보일드다. 잔인한 일을 겪은 아이들은 기꺼이 잔인해져 삶을 감행한다. 몰아치는 이야기가 기차의 속도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오직 삶을 향해 돌진하던 그 지독함이 서로를 돌아보는 순간, 그들은 진정한 '삶'을 손에 쥐게 된다.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독자의 삶도 새로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소설, 심장을 한껏 뜨겁게 하는 소설. 천명관이 돌아왔다.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선다. 2008년, 집값은 영원히 오를 것이라는 믿음 아래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상환 능력을 따지지 않고 대출을 내줬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그 흐름 속에서 '지금 이 길이 맞는가'를 묻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환경이 바뀌었다. 선택의 청구서는 전 세계가 함께 받아들었다. 비단 국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금리가 바닥이던 시절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이와 망설이다 멈춘 이, 달러 자산을 분산해 둔 이와 한 곳에 올인한 이, 그 선택의 순간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결과가 갈렸을 뿐이다. 문제는, 어느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당장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지정학적 분쟁과 K자 경제, 연준 의장 교체, AI 혁명, 달러 패권의 향방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다섯 가지 갈림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앞으로 부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저자는 단기적인 예측이나 유행하는 투자 기법 대신 거시경제의 연결고리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복잡한 경제 현상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는 특유의 스토리텔링은 여전하다. 갈림길은 피할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이정표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년 미륵의 어린 시절은 평온했다. 반년 터울의 사촌 형 수암과 함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고, 쉬는 시간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거나 제기도 차고 싸움박질도 벌였다. 나이가 조금 더 들자 신식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학문도 익혔다. 조상들이 그러했듯, 현명하고 지혜롭게 새 시대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어긋났다. 거리에는 일본군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임금이 물러난 뒤 나라는 일본에 합병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잠시 방황한 끝에 미륵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1일을 맞는다. 봉기에 가담했던 미륵은 군경의 단속을 피해 낙향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압록강을 넘어 상해를 거쳐 유럽을 향한다.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걸작이자 1946년 독일 문단이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작품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국내에서도 전혜린의 첫 번역 이후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다. 일제와 나치 독일이라는 두 제국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저자의 손에서 탄생한, 상실된 고향과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이라는 주제는 한 민족의 특수한 경험을 넘어 인간 보편에 가닿는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경계에서 탄생한, 이방의 언어로 벼려 문학사에 흔적을 남긴 인류의 유산.
'4세 고시'로 대표되는 조기교육 광풍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더 이른 나이에 학습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어린이 뇌 발달 전문가이자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원장 천근아 교수는 과도한 조기 교육은 아이의 뇌를 손상시킨다고 경고한다. 인간의 뇌는 DNA에 따라 순차적으로 발달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어린 아이를 책상 앞에 앉혀 장시간 공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을 거스르는 자극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유아기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 자극이 과도하게 주어지면 정서적 뇌의 성숙이 방해받게 되는데, 문제는 이 정서적 뇌가 이후 모든 뇌 발달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
건축물의 토대처럼, 정서적 뇌가 기초를 탄탄하게 받쳐주지 못하면 향후 고차원적인 뇌 발달과 학습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영유아기에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 정서적 뇌, 즉 변연계는 애착과 정서적 안정감이 형성될 때 왕성하게 발달한다. 결국 영유아기 뇌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극은 학습으로 얻는 인지적 자극이 아니라 부모와 친밀하게 교감하고 또래와 신나게 노는 과정에서 얻는 자극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손상된 뇌는 회복이 매우 어려우며, 특히 영유아기의 뇌 손상은 구조 자체가 손상되기 때문에 그대로 성인이 된다면 불완전한 뇌로 살게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30년간의 진료 현장에서 저자가 깨달은 사실은 너무나 많은 부모가 이 '불편한 진실'을 전혀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과 노력은 쏟아붓는데 아이는 아이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뇌도 불균형으로 발달하는 현실, 그러다가 빠르면 사춘기부터 그 후폭풍을 맞닥뜨리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이 책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아이들을 진료해 온 저자의 생생한 임상 경험과 뇌과학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허울뿐인 빠른 성취보다 건강한 성장에 주목하는 이 책은 흔들리는 부모에게 단단한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