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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023
  • 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은이), 김한영 (옮긴이) | 문학동네 | 2023년 5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우리 삶은 악몽이 된다.”

    "안 돼!" 비명이 동네의 모든 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밤이 끓어오른다. "그가 대통령이라니." 부글거리는 분노와 탄식. 1940년 미국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찰스 린드버그에게 패배한 것이다. 대서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성공해 미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부상한 린드버그는 미국이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기어이 당선됐다.

    나치 훈장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히틀러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온 린드버그. 그는 미국이 독일에 대항하는 것은 기필코 막겠다는 사명으로 고립주의와 친파시즘을 표방한다. 미국 사회는 우경화의 길로 내달리며 편을 갈라 극렬히 나뉘고, 숨어 있던 차별과 혐오가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국경일을 열심히 준수했고, 7월 4일의 불꽃놀이나 추수감사절의 칠면조 요리를 끔찍이 좋아한다고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나'의 일상도 그렇게 파괴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패배해 3선에 실패하고, 당시 미국 국민의 우상이었던 실존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는 가상의 설정에서 출발한 <미국을 노린 음모>. 미국 현대문학의 명실상부한 거장 필립 로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소설은 2004년에 쓰였지만 십여 년이 지난 후 뜨겁게 다시 읽혔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직후다. HBO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될 만큼 다시 큰 주목을 받았다. "어떻게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맡게 되었을까?"라는 처절한 물음.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도래할 현실의 얼굴을 하고 있는 소설이다.

  •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은이) | 은행나무 | 2023년 5월 "이 소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 머리털이 도망갔다는 걸 알아챈 건 작년 말의 일이었다. 먹고 사느라 존엄을 헐어 팔아버리면 머리털도 이 삶을 견디기 어려워 내게서 도망간다. 털이 빠진 내 눈엔 한동안 다른 사람들의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털이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들 각자의 슬픔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2021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이서수의 소설 <미조의 시대>에도 내가 지하철에서 마주쳤을 법한 여성, '수영'이 등장한다. 1970년대에 가발 공장이 있던 '구디'에서 2020년대의 직장여성 수영은 야하고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19금 웹툰을 그린다. '작업을 하다 엎드려 우는 동료도 있었고, 우울증 약을 먹는 동료도'(14쪽) 있지만 그 모두가 내일은 맑은 얼굴로 '약봉지를 흔들며'(희정의 <일할 자격> 중) 직장으로 걸어가야 한다.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20쪽)를 건너야 제 먹이값을 벌 수 있다.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시대야. (37쪽)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젊은 근희의 행진>은 서로 결이 다른 한 자매의 이야기이다. 노출의상을 입은 채 독서 유튜브 운영하는 동생 근희를 거북해할 자유가 문희에게 있듯, '정색하면서 안 그런척해서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몰라'라고 언니 문희를 속물이라고 말할 자유가 문희에게 있다. 참새도 민들레도 아니기에 머물 곳이 필요한 우리, 자산은 너무 먼 곳에 있고 하루는 고통스럽다. 꿈과 현실과 머물 곳 사이의 함수값을 오가며 엉킨 우리가 같지 않은 채로도,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함께 행진할 수 있다고 이 소설들은 말한다. 이서수의 소설처럼, 동시대를 함께 행진하는 소설을 앞으로도 많이 읽고 싶다. 소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같이 읽고 같이 얘기하자고 동시대의 소설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소설. 문장을 빌려 말하고 싶다. 이 소설, 많관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책이 사라진 세계에서
    댄 야카리노 (지은이), 김경연 (옮긴이) | 다봄 | 2023년 5월 "멀고도 가까운 디스토피아로부터"

    길을 걷거나 버스, 지하철을 이용할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핸드폰을 보면서 걷는 사람도 많고 자전거를 타면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도 보았다. 나조차도 핸드폰 없이 혼자 밥을 먹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광고를 오히려 기대할 때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에 많은 사용자들이 이끌려 다니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폭풍이 지나가고>의 작가 댄 야카리노가 이번에는 현실과 비슷한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선보인다. 주인공 빅스가 살고 있는 시대는 '눈'이 따라다니며 이도 닦아주고 옷도 입혀준다. 읽어야 할 텍스트도 골라주고 기계의 주인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닌다. 마치 지금의 핸드폰처럼.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빅스가 숨은 곳은 폐허가 된 지하의 도시. '눈'이 없는 그곳에서 도시를 탐방하다 도서관을 발견한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걸 읽는 자유를 느끼고 '예술과 동물과 우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자유와 앎의 기쁨. 책과 독서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이 시대에 알맞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

  • 엄살원
    안담, 한유리, 곽예인 (지은이) | 위고 | 2023년 5월 "이슬아, 양효실 추천"

    글은 언제나 일정 정도 이상의 선명도를 요구한다. 글이 글로서 완성도를 가지기 위해선 흐릿한 부분을 소거하고 중심부에 더 힘을 실어 날을 세워야 한다. 아쉬운 점은 흐릿한 부분에도 진실이 없지 않다는 데에 있다. 글의 주제가 되기엔 설익었거나 오독될 가능성이 너무 높거나, 충분한 생각이 모이지 않은 작은 이야깃거리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며, 가능성을 품은 작은 진실들. 말, 대담집, 인터뷰집의 매력은 꼿꼿한 글과 달리 이 자글자글한 회색 지대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이 고체의 특성을 지닌다면 말은 액체의 특성을 띈다. 굳지 않은 생각도 흘려낼 수 있다. 그리고 <엄살원>은 말의 이런 효용을 최대치로 활용하는 책이다.

    엄살원은 담, 유리, 예인, 3명의 호스트가 활동가 손님을 한 명씩 초대해 비건 만찬을 차려내는 곳이다. 초대받은 손님의 의무는 단 하나, 엄살을 부리는 것이다. 언제나 꿋꿋하고 강철 정신력으로 태어난 것만 같아 보이는 활동가들, "자기 일도 아닌 문제에 자기 일처럼 화를 내는 게 직업"이라 오히려 힘들다는 말을 쉽사리 할 수 없는 이들. 엄살원은 이들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낸다. 엄살을 부려달라 요청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이 힘든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듣고 한바탕 울고 웃고 화내고 함께 힘을 내본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엔 덜 걸러진 생각들이 뒤섞여 있다. 평소의 삶과 생활로부터 자연스럽게 끌려 나오는 이야기들, 딱딱한 글로는 차마 다 못 담았을 작은 진실들.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한 에너지가 나온다. 좋은 기획, 터지는 에너지, 재치있는 편집까지 온통 참신한 요소들이 모여 머리 속에서 생각의 축제가 열린다. 즐거운 독서였다.

6.62023
  • 마음의 지혜
    김경일 (지은이)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5월 "김경일이 전하는 생각의 지혜들"

    따뜻한 말들로 지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생각의 지혜를 전한다. 이번 책에서 그는 살면서 누구나 마주하는 불안과 고민들을 모아 사람, 행복, 일, 사랑, 돈, 성공, 죽음 7개의 키워드로 분류하여 답한다.

    김경일 교수의 특장점, 유쾌하고 친근한 위로와 조언은 이번 책에서도 빛난다. 수다 떨듯 늘어놓은 그의 경험과 재미있는 사례들을 편하게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명쾌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인생의 여러 기둥들이 흔들려서 에너지가 없을 때, 가볍게 힘을 내어보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 될 것 같다.

  • 얼굴 없는 중개자들
    하비에르 블라스, 잭 파시 (지은이), 김정혜 (옮긴이) | 알키 | 2023년 5월 "세계 경제의 보이지 않는 큰 손"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이라는 이름은 굳이 세상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미디어 등을 통해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각각 테슬라, 아마존, 구글을 창업한 혁신의 아이콘이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자산가이자 영향력 있는 기업가·경영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이름들은 어떠한가? 이반 글라센버그, 마크 리치, 그리고 글렌코어, 비톨, 카길. 물론 생소할 것이다. 이반 글라센버그는 글렌코어의 CEO, 마크 리치는 글렌코어의 전신인 마크리치앤드코의 창업자이자 ‘석유왕’으로 일컬어지는 전설적 중개자다. 이반 글라센버그의 글렌코어는 전기자동차의 필수 원자재인 코발트의 전 세계 공급량 가운데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톨과 카길은 각각 석유와 곡물 중개 시장의 선두 주자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세계 5대 석유 중개 업체의 일일 거래량은 전 세계 하루치 석유 수요의 25퍼센트에 맞먹고, 세계 7개 곡물 중개 업체는 전 세계 곡물과 유지작물 거래의 거의 절반을 책임진다.

    전 세계 경제는 원자재 가격의 등락에 따라 흔들리는데, 이를 좌우하는 이처럼 거대한 존재들에 대해 우리가 생소함을 느낀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부분의 원자재 중개 업체는 개인회사이며, 따라서 주식회사만큼 경영 정보를 공개할 의무가 없다. 20여 년간 원자재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약한 두 저자는 수많은 취재와 인터뷰, 비밀문서 분석 등을 통해 원자재 시장과 중개자들의 이면을 추적해야만 했다. 조세회피처를 통해 거래하고, 독재국가와 비밀 거래 등을 통해 철저히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려왔던 그들은, 근래에 서서히 음지로부터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오로지 이익을 위해 전쟁터를 비롯하여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원자재 중개상의 이야기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긴장감 넘치는 동시에, 그들의 이익이 전쟁과 쿠데타, 내정 불안 등 누군가의 어려움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오싹하다.

  • 풍수전쟁
    김진명 (지은이) | 이타북스 | 2023년 5월 "대한민국을 짓누르는 저주를 풀어라"

    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데뷔한 김진명이 2년 만에 발표한 신작 소설.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나이파 이한필베'라는 의문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대통령실 행정관 김은하수는 이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대학 시절 철학, 풍수 등을 섭렵한 괴짜 동기 이형연을 떠올린다. 합리적인 은하수는 무속을 더한 형연의 문제풀이를 납득하기 어려워하지만, 형연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의 답이 보이게 된다.

    2023년의 현대 한국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일제강점기,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나라의 땅 전체에 걸린 저주를 추적하는 과정이 시공을 넘나들며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인구절벽' 같은 시의적절한 주제를 더해 <황태자비 납치사건> 같은 김진명의 작품을 즐겨 읽은 독자가 만족스럽게 읽을 만한 호쾌한 소설이 읽는 손을 유혹한다.

  • 문제아
    존 조 (지은이), 오승민 (그림), 김선희 (옮긴이) | 도토리숲 | 2023년 6월 "존 조 배우 어린이 성장 동화"

    1992년 4월의 어느 날, LA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뉴스에서는 연신 속보라며 불타고 약탈 당하는 코리아타운의 상점을 보여준다. 12살 조던은 아버지가 가게를 지키기 위해 밖에 나간 것을 염려한다. 아버지와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소동 속으로 뛰어든다.

    LA 폭동은 한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며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완전히 잊힌 것처럼 보인다. <스타트렉>과 <서치>로 알려진 영화배우 존 조는 이 책을 쓰며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중대한 날에 대하여 한국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본국을 떠난 사람들의 성공을 향한 압박감, 정체성의 혼란을 사춘기 소년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 동화는 이야기가 전혀 다른 삶을 상상하고 이해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날 작은 아시아 소년이 겪었을 일들과 삶에 끼칠 영향들을 헤아려 보며 먼 곳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6.92023
  • 빨간머리앤 전집 세트 - 전8권 (완역본)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은이), 유보라 (그림), 오수원 (옮긴이) | 현대지성 | 2023년 6월 "앤의 일생을 담은 완역본"

    <빨간 머리 앤> 하면 우리의 마음을 밝히며 환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초록지붕집에 사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 그렇다면 <레드먼드의 앤>이나 <잉글사이드의 앤>은 어떨까.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들도 앤의 일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빨간 머리 앤>은 '빨간 머리 앤' 시리즈의 1권인 <초록지붕집의 앤>의 내용만을 담은 것이고, 실제 앤의 일대기는 8권에 걸쳐 펼쳐지기 때문이다.

    앤의 어린 시절부터 꿈을 키워가는 대학 생활, 직업인으로서의 열정, 결혼과 출산, 육아의 기쁨과 슬픔을 비롯해 앤의 생애를 담은 전집 <빨간 머리 앤 전집 세트>가 알라딘 북펀드를 통한 무수한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 속에서 드디어 출간되었다. 특히 8권 <잉글사이드의 릴라>는 미국 출판사들이 편집 과정에서 삭제한 부분까지 찾아내어 초판의 모습을 복원했다. 유보라 작가의 따스한 일러스트와 당대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 소설이 그리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해제 등을 수록하여 독서의 재미와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했다. “살아 있다는 게 참 기뻐요. 세상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웃음 짓던 소녀 앞에 담뿍 펼쳐지는 세상을 함께 만나보자.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지은이) | 문학동네 | 2023년 6월 "말하게 되는 그 순간에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고"

    <구관조 씻기기>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시집을 낸 황인찬의 신작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이후 4년 만에 시집을 엮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종종 우리는 말한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의 시 속 화자는 그 말을 떠올리며 소쇄원을 거닌다. '우리가 함께' 소쇄원에 갔다면 서로의 사진을, 꽃과 나무를 찍으며 '그게 이 시대의 아름다움이겠지'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도 없고 우리도 없고 사진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몇 장의 사진들 말고'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생활은 여름밤의 반딧불이 점멸하다 사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나게 된다' (<인화> 부분) 이 '갑작스럽게'를 한참 붙잡고 불현듯 끝나버린 것들이 남기고 간 자욱을 나 역시 떠올려 보았다. 그 자리를 더듬으며 시를 읽는 내내 마음이(황인찬의 시처럼 말한다면 내 마음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 저렸다.

    '사진 속에 남아 고정되고 기억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이미지들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하고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너무 좋아하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부분) 이 순간이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했을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이곳에 없다. '(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이미지 사진> 부분)만 괄호 속에 머물뿐. 이 부재한 자리에 놓인 것을 마음이라고 하면 어떨까. 머뭇대며 그것이 지나간 것인지, 흘러간 것일지, 옮겨간 것일지, 부재하는 것일지 생각하는 동안,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 변비 탐정 실룩 1
    이나영 (지은이), 박소연 (그림) | 북스그라운드 | 2023년 5월 "막힘없는 시원한 이야기의 시작"

    조용한 능금마을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소중한 사과 1박스가 사라졌다는 신고를 받은 탐정 실룩은 급히 자신의 조수 소소와 능금마을로 향한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능금마을에는 슬픈 과거가 있었고 사라진 사과를 찾기 위한 실룩의 추리가 시작된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인 <시간 가게>의 이나영 작가가 새로운 어린이 시리즈물을 시작한다. 사건을 해결하면 빨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토끼 탐정 실룩과 수다쟁이 참새 조수 소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박소연 작가는 이번 책을 통해 처음으로 어린이 독자를 접한다. 귀여운 캐릭터와 술술 읽히는 스토리는 읽기물을 접하는 어린이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할 것, '잘 보고, 잘 듣고, 잘 누자!'.

  • 더티 워크
    이얼 프레스 (지은이), 오윤성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마이클 샌델, 리베카 솔닛 추천"

    문명사회의 깨끗하고 선량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일들은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조용히 처리되고 있는가. 이 책은 청결한 권력이 취약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떠맡기는 더러운 일들에 대해 파헤친다.

    교도소 정신 병동의 교도관이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어떤 모습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살인 드론을 조종하는 드론 전투원이 일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1분에 65마리씩 닭을 죽이는 도살장 노동자의 고통도 모두 장막 너머에 가려져있다. 선량한 삶은 더러움을 외주로 맡기고서 그것에 대해 눈과 귀를 가리고 평생을 산다. 세상이 보지 않기로 작정한 일을 처리하는 노동자들은 인권과 노동권을 주장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한다.

    <더티 워크>는 이 불합리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파고들며 우리 모두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한다. 깨끗한 삶이 빚지고 있는 삶들에 관하여. 오랜만에 둔중한 충격을 주는 불편한 사회과학서가 나왔다. 마이클 샌델이 "깊이 있는 보도로 경종을 울리는 책"이라는 말로 추천했다.

6.132023
  • 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은이) | 문학동네 | 2023년 6월 "김금희, 식물 '하는' 마음에 대한 일기"

    발코니와 작업실 등 집안 곳곳에 수십 종의 식물을 반려 중인 소설가 김금희.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은 식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책이 가드닝 안내서는 아니다. 식물을 돌보는 일, 식물을 돌보면서 마음을 들여다본 일에 관한 단정하면서 사려 깊고, 또 세심한 일기다.

    산세비에리아, 동백, 괭이밥, 다정큼나무, 미스김라일락, 올리브.. 작가는 각양각색 식물의 생장을 지켜보면서 유년 시절의 상처와 마주하기도 하고, 지나간 시절에 감정적 서사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하고, 상처에 계속 갇히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리고, 식물을 기르고 실패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각자에게는 각자의 힘이 있다는 사실과, 삶을 낙관하고 치유하는 방법을 배운다.

    식물과 동고동락하는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가이자 '김금희'로서의 마음과 생각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식물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봐온 이야기를 읽는 동안, 지금 내 마음은 괜찮은 건가, 어디까지 가 있는 건가 살피게 되고, 밑줄 그은 많은 문장들에 기대어 위로받는다.

  • 종의 기원담
    김보영 (지은이) | 아작 | 2023년 6월 "전미도서상 후보작, 김보영 SF"

    2023년 진행될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비인간'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인간적 초상을 나란히 그려낸 점'을 높게 평가받으며 한국 SF 최초로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김보영의 소설이 (그는 2000년 즈음 이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23년 만에 시기적절하게 한 권의 이야기로 마침표를 찍는다. 2005년 발표된 '종의 기원' 시리즈에 신작 중편 '종의 기원담 :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더했다.

    김보영의 이야기는 반대편에서 (비인간 - 인간이 아닌 로봇 - 비로봇으로 대립항을 만든다면 어떨까.) 우리가 놓인 자리를 바라본다. 시점을 옮기면 세계가 낯설어진다. "어째서 로봇은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상상에서 안정을 얻지?"(14쪽)라는 질문에서 이야기가 발생한다. 인간이 진화했고 로봇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로봇이 진화했고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면? 이 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은 공장이고, 로봇을 위한 창세기가 암송되며, 힘의 신 뉴턴과 시간의 신 아인슈타인은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열등'한 네 자릿수 로봇 '케이'가 자신들의 종족의 기원을 찾아가는 활극은 유기생물인 우리가 비로봇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김보영은 '무기생명에 대한 내 개인적인 헌사며, 곧이곧대로 기계생명을 향한 찬가'라고 이 소설의 의미를 설명한다. '놀랍고 매력적이다. 한국어 원문을 읽고 싶다.'라고 말한 굿리즈의 리뷰어는 우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시기적절한 소설이 한국어로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마침내 도착했다.

  • 달콤 짭짤 코파츄 1
    다영 (지은이), 밤코 (그림) | 창비 | 2023년 6월 "만화보다 재밌고 교과서보다 알찬 과학동화의 탄생"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유튜버라고 한다. 자기만의 콘텐츠를 생성하여 널리 알리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은 어린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애정 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면 잘 알 테지만 특색이 있는 콘텐츠는 물론이고 일상을 전하는 브이로그도 있어야 쭉 구독을 하게 된다.

    구독자 100만 명의 초특급 과학 인플루언서 코파츄는 골드 버튼처럼 번뜩이는 과학 지식과 관찰력으로 바람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한다. 센스가 뛰어난 PD 버니는 코파츄와 함께 채널을 운영하며 소소하게 브이로그도 올려주니 실제 채널이 있다면 구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현직 과학 교사이자 EBS 교재 집필진인 다영 작가의 글과 밤코 작가의 그림은 어렵게 느껴지는 과학도 쉽게 풀어내준다. 앞으로의 코파츄와 바니의 활약이 기대된다.

  • 카디프, 바이 더 시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은이), 이은선 (옮긴이) | 하빌리스 | 2023년 5월 "조이스 캐롤 오츠 소설집, 트라우마가 잠식한 일상"

    폭우가 쏟아지던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가 일상에 구멍을 낸다. 클레어의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사람, 친할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변호사의 전화다. 클레어는 언제나 자신을 운 좋은 입양아라고 생각했고 미술사학자가 되어 사진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 호사라고 여겼지만,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착하게 굴지 않으면 파양될 수도 있다고 여기며 잠정적인 삶을 살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클레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유산으로 받게 될 집과 생물학적 가족들을 보기 위해 메인 주 카디프를 향한다. 그 길의 끝에 어떤 악몽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카디프, 바이 더 시> 속 네 편의 중편소설에는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생을 우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들의 일상에 스민 어둠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공포에 공포로 맞선다. 그렇게 공포의 방향을 전복시켜 족쇄가 되어버린 일상을 부수며 파괴적인 탈출을 시도한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6.162023
  • 토지 1~20 세트 - 전20권
    박경리 (지은이) | 다산책방 | 2023년 6월 "2023년의 감각, 10년 만의 개정 신판"

    1926년 12월 통영에서 박금이가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 여성은 해방되던 해 고등여학교를 졸업해 이듬해 결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엔 좌익으로 몰린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아는 작가 박경리는 이 이후 탄생한다. 1955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젊은작가'이던 시기 한 행사에서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겪어낸 혹독한 세월이 장구한 문학이 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토지>가 작가 타계 15주기 추모 특별판으로, 10년 만의 개정 신판으로 출간되었다. 토지라는 작품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산맥과 핏줄, 말라붙은 대지가 연상되는 책꼴에 '『토지』를 쓰던 세월' 서문을 최초 수록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19쪽)라고 말한 한 여성은 그의 주인공 '서희'처럼 새파란 분노를 깎아 문학의 꽃을 피웠다. 한편으론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고 말한 박경리. 그의 삶과 문학을 집대성한 책을 2023년의 감각으로 만난다.

  • 아는 만큼 보인다 :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은이) | 창비 | 2023년 6월 "답사기 하이라이트를 이 한 권에"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용어가 생소했던 시절에 출간되어 명실상부 한국 문화사의 기념비적 저술이 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답사기 편의 하이라이트를 모두 모아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답사기 시리즈를 읽고 싶다는 마음은 컸지만 그간 시리즈로 출간된 방대한 양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당연히 반가울 소식이다. 우리 국토의 대표적인 자연 명소와 한국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명작을 한데 담았으니,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기 위한 마중물로 적절하다. 기존 답사기의 원문을 그대로 싣지 않고 현황에 맞게 사실과 정보를 다듬었기에 재독을 하고 싶은 기존 독자들에게도 맞춤하다. 국내 여행과 K-컬처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는 지금, 우리의 뿌리를 조금 더 알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 호랑이가 눈뜰 때
    이윤하 (지은이), 송경아 (옮긴이) | 창비 | 2023년 5월 "한국 신화와 SF의 만남, 디즈니+ 영상화"

    가모장이 이끄는 용맹한 호랑이 부족의 열세 살 세빈은 인간과 호랑이 중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매일 무술 연습을 하는 세빈의 간절한 꿈은 존경하는 삼촌처럼 우주군에 들어가는 것이다. 몇 번의 지원 끝에 드디어 우주군 생도로 선발된 세빈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전함 선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던 삼촌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혼란에 빠진 세빈은 우선 입대를 위해 떠나지만, 그곳에서 삼촌을 둘러싼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다.

    한국계 작가 최초로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화제를 모은 이윤하 작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백인과 서양 문화 위주의 SF에 의문을 품어왔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 역사와 신화에 대해 SF를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공용어가 한국어이고 공식 의복이 한복이며, 호랑이 설화와 구미호 설화를 비롯한 한국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한 스페이스 오페라가 탄생했다. 미국에서 먼저 발표된 독특한 세계관의 소설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디즈니 플러스에서 영상화를 확정했다.

  •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백은선 (지은이) | 문학동네 | 2023년 6월 "비밀과 질문, 출렁이는 물속"

    시집 <가능세계>, <도움받는 기분>과 산문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등을 출간한 백은선의 시집. 2021년 문지문학상 수상작인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등의 시가 수록되었다. 상자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아직) 상자를 열지 않는 손이 있다. 그 사람들의 손은 이런식으로 묘사된다.

    매번 내 손등을 찰싹 때리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 38쪽, 「적심」 )
    그것이 정말인가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르고 삿대질을 하며 울던 줄곧 가지고 다닌 두 손 ( 45쪽,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
    그때는 두 손을 깊은 숲속에 묻고 돌아와 새 손이 돋아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을 수 없었습니다. (94쪽, 「사쿠라노 요루」)
    손을 놓는다는 게 영영 손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서 (109쪽, 「수지」)

    이 손을 시를 짓는 손, 날개를 빠는 손, 벽돌을 쌓는 손, 식사를 차리는 손이다. '마음이라는 이 좇같고 애매한 말!'(59쪽) 그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책속에 머리를 박고 활자를 중얼거리며 기차가 달리는 리듬으로'(44쪽) 헤매는 손. 손등 위로 물이 출렁거린다. 자신의 고통에 이토록 진실한 시, 삶이라는 고통에 이토록 정직한 시.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고픈 리듬이 백은선의 시에서 출렁인다.

6.202023
  • 한밤의 시간표
    정보라 (지은이)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저주토끼> 정보라의 환상 괴담"

    "무서운 이야기 좋아해요?"
    선배가 물었다. 처음 출근한 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49쪽)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가 폭풍 같은 2022년을 보내고 처음 창작한 소설들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귀신 이야기' 연작이다. 손수건과 운동화와 책 같은 것들.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관리하는 연구소에는 야간 근무를 하는 직원들이 있고, 이 직원들에게는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있다. 예를 들면 (나폴리탄 괴담 같은 규칙 괴담을 떠올려도 좋다.) 정체불명의 평범한 남자를 만나면 그의 지시를 따를 것, 돌아보지 말 것, 연구소의 소장품을 탐하지 말 것, 떠나야 할 때는 떠날 것, 같은 규칙들. 틀림없이 누군가가 금기를 어길 것이고, 무서운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손수건에 홀린 작은 아들의 눈, 연구소에서 훔친 운동화에서 웃고 있는 양이 내는 소리, 점사 일을 하던 부소장을 따라다니던 상처 입은 양의 피부. 손수건에 놓인 자수에서 도망치는 새의 날개짓, 햇빛을 쬐며 몸을 떠는 연구소의 소장품... 공포영화의 한 컷 같은 으스스한 이미지만 우리를 무섭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시당하고 차별당하고 학대당한 자녀가 품는 오랜 원한, 객사한 아버지를 찾아내지 못하면 물려받게 되는 채무, 공장일을 하다 절단된 손가락으로도 이어나가야 하는 생계... 집에서 도망치는 책만큼(정말 매번 어디로 가는 걸까?), 이번 폭염 후 받아들게 될 전기요금 고지서가 무서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 인생은 항상 이상했으니까...'(25쪽)라고 말하는, 배제의 대상이 된 연구소 직원은 기이한 사물보다 낮의 세계가 더 공포스럽기에 밤의 노동을 택한다.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법이고, 누구나 그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89쪽)라고 말하는 정보라의 괴담은 서늘하면서 품이 넓다. '누구나'의 범주를 넓히는 괴담, 일곱 편의 이야기가 뛰어노는 이 연구소라면, 사람 정도는 조금 언저리에 서도 좋을 것 같다.

  • 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은이), 송태욱 (옮긴이) | 복복서가 | 2023년 6월 "한 여성의 눈부신 자기 해방기"

    꿈은 위험하다. 삶은 꿈으로 빛나지만 꿈으로 가장 비참해지기도 한다. 고상하고도 아름답고 지적이며 예술을 향유하는 어떤 세계를 갈구하는 어머니의 꿈은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끈질긴 노력으로 원하던 세계에 '거의' 속했지만, '거의'라는 수식어 없이 모든 것을 타고난 이를 동경하느라 항상 불행했다. 더는 젊지 않고 회한에 가득 찬 채 병실에 갇힌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너무 완벽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꿈이 인생을 소진해버렸음을.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소설처럼 살길 바랐던 외할머니와 상류사회를 열망한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삶을 충실히 살아온 언니. '분수'에 맞지 않다거나, '분수'에 넘친다거나, '분수'를 모른다거나 하는 말들이 가족을 지배했다. 이들과는 다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자신의 삶 또한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미쓰키는 생각한다. 삼대에 걸친 꿈은 버거울 만큼 크고 무겁지만 동시에 거대한 허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그만두자고 결심한 미쓰키에게 다가온 세계는 새롭고 가뿐한 빛으로 반짝인다. 한 여성의 눈부신 자기 해방기.

  • 박태웅의 AI 강의
    박태웅 (지은이) | 한빛비즈 | 2023년 6월 "사람을 위한 인공지능"

    2022년 11월 30일, 오픈AI의 챗GPT가 공개되었다. 이후 일주일 만에 사용자는 100만 명이 넘었고, 두 달 만에 1억 명을 돌파하면서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제치고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사용자를 모은 서비스가 되었다. 챗GPT가 미국 변호사 시험과 의사 시험을 통과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서점가에는 챗GPT와 AI가 불러올 변화에 대한 전망서와 챗GPT를 잘 사용하기 위한 활용서, 인문학적 분석, 심지어 글쓰기와 주식 투자에 활용하는 방법까지 다양한 챗GPT 도서들이 넘쳐나고 있다. 불과 반년여 만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린 인공지능·챗GPT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희망과 인공지능에 대체되고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함께한다. 어느 쪽이든, 이제는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야 할 때다.

    하지만 컴퓨터공학 지식이 부족한 보통 사람에게 강화학습, 매개변수, 토큰, 플러그인, API 등 낯선 용어로 가득한 인공지능 이야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매일 같이 새로운 인공지능 오픈소스 프로젝트들이 쏟아지는 기술 진보의 시대에 AI 리터러시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기본 알고리듬과 챗GPT의 개념과 원리, 거대언어모델의 특징 등 인공지능의 다양한 측면을 두루 살피고, 그것이 가진 함의와 품고 있는 위험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짚었다. 인공지능의 대두로 인류가 사상 유례없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실험을 마주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이를 넘어서 사람을 위한 인공지능을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 모두의 연수
    김려령 (지은이) | 비룡소 | 2023년 5월 11년 만의 청소년 장편소설로 돌아오다

    어릴 적 나는 매일매일 집 앞에 있는 놀이터에 나가 놀곤 했다. 사실 집 앞 모든 골목이 놀이터였다. 눈을 뜨자마자 나가서 해가지면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밥시간이 되면 가까운 친구 집에 가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없고, 심지어 핸드폰 또한 없던 시절이었지만, 나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 진해 있나요?" 어울리던 친구 중 하나의 집에 전화를 하면 곧장 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집 앞 골목에서라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 '연수'도 명도단 골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각지대가 없는 이웃이라는 CCTV가 있었다.

    지방 변두리 바닷가 오래된 골목 명도단을 누비는 '모두의 연수'로 자라난 열다섯 연수의 이야기. 태어나자마자 부모 없이 어린 이모에게 맡겨진 연수, 명도단 골목 이웃들의 선의와 보살핌으로 열다섯이 된 연수의 머릿속 가장 큰 주제는 아이패드다. 따지자면 사돈어른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슈퍼에서 손수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마련하기로 한다. 학교 조별 과제로 인해 연수와 우연히 같은 조가 된 차민, 우상, 시영, 세 친구에게 슈퍼는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공간이 된다. 같이 영화를 보고, 라면을 끓여먹고, 별것 아닌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 거리는 시간들로 인해 연수의 일상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다. 그러나 자신의 생부라 주장하는 남자의 등장으로 연수의 편안한 일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모두의 연수>는 작가 김려령이 <가시고백>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청소년 장편소설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품고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작가의 진한 안부와 응원이 담겼다. 작가의 말을 전한다. "이 소설은 아직 아물지 않은, 혹은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지닌 분들에게 보내는 깊은 위로와 응원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함께 사는 당신들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또 만납시다."

6.232023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지은이) | 돌베개 | 2023년 6월 "유시민이 과학책을 통해 얻은 것들"

    이 낯선 조합, 유시민과 과학 책이라니. 문과와 이과. 한국 사회에 대표적으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드높은 문턱 아니던가. 문과적 지식인의 선봉장 유시민이 이 문턱을 훌쩍 넘어갔다. 이번 책에서 그는 저명한 과학 교양 도서들을 읽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 <침묵의 봄>, <엔드 오브 타임>, <원자폭탄 만들기>등, 그가 읽은 책들은 대체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목이다. 이 책들을 읽었거나 읽고 싶은 독자들에겐 유시민의 읽기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올 것 같다. 과학과 과학자에 대해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다"는 친근한 불편함으로 시작한 그의 독서는 과학의 세계를 만나며 새로운 질문을, 관점을 얻는다. 그의 깊은 문과적 소양은 이 책들을 받아들이며 인문학과 과학 사이에서 인간 존재, 세계,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한 생각을 여러 갈래로 피워낸다.

    무지를 드러내며 겸허하게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는 태도, 새로운 앎을 받아들이는 과정, 배움을 통해 변하게 된 마음과 관점까지, 독자들이 자극받을 지점이 많은 책이다. 올여름휴가의 책으로 한자리는 이미 선점된 듯하다.

  • [세트] 꿀벌의 예언 1~2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은이), 전미연 (옮긴이) | 열린책들 | 2023년 6월 "베르나르 베르베르, 사라진 꿀벌을 되살리기 위하여"

    꿀벌이 멸종했다. 식물의 수분을 담당하는 꿀벌이 사라지자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고, 지구 온난화로 지표면의 사막화와 물 부족이 심화되며 곡물 생산은 더욱 희귀해진다.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폭동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는 3차 세계대전으로 번져 인류는 멸종 한 걸음 앞에 다다랐다. 2053년 지구의 풍경. 최면을 통해 30년 후의 미래를 보고 온 2023년의 르네는 혼돈에 빠진다.

    르네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기로 한다. 시공간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해 내세의 자신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로 한 것이다. 미래의 르네는 11세기에 쓰인 <꿀벌의 예언>이라는 고서에 유일한 해답이 적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온 르네는 그 책이 1994년에 출간된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달음에 출판사로 찾아가 담당 편집자를 만난 르네는 또 한 번 혼돈 속에 남겨진다. <꿀벌의 예언>은 모종의 이유로 도서관 납본 물량을 포함해 시중에 유통되던 도서 전체를 회수해 폐기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그 책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던 르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비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초기 작품들을 연상케 하는 흡인력이 돋보이는 소설.

  • 연수
    장류진 (지은이) | 창비 | 2023년 6월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 장류진 소설집.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연수' 등 여섯 편의 소설을 실었다. 첫 소설 '연수'의 주인공 주연은 공인회계사 시험은 쉽게 합격하고서도 운전면허는 어렵게 딴 사람이다. 기능시험에 두번 낙방, 도로주행에 세번 낙방한, 타고나길 운전을 못하는 사람. 맘카페에서 소개받은 명강사에게 운전 연수를 받는 주연의 이야기에서 익숙함을 느낄 나 같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처음 운전면허 학원에 간 날 긴장해 어찌나 목에 힘을 주었는지 근육통이 와 사흘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적확한 응원을 장류진의 소설이 전한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사람에게는 여러 면이 있다. 주연의 운전강사인 50대 여성은 모든 초보는 갓난아기 같다고 말하는 유능한 강사면서, 주연을 O형이라는 혈액형으로 판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입사 면접에서 '빈티지'하면서도 '땡땡한' 느낌으로 밴드 연주를 해달라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인물 '이찬휘'는 여러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고루한 회사에서 여성인 나를 최초로 팀장으로 세운 비교적 '깨끗한' 인물인 상사가 내게 부적절한 '공모'를 제안하기도 한다. 사랑하기도 증오하기도 쉽지 않은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기쁨과 슬픔. 적확한 인식과 적확한 응원이 필요한 이들의 '계속 직진'에 필요한 적확한 소설이 도착했다.

  • 한성이 서울에게
    이현지 (지은이), 김규택 (그림) | 비룡소 | 2023년 6월 "제2회 비룡소 역사동화상 대상"

    죽은 오빠의 제사상에 놓인 치킨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 백제 귀신 성이. 선하고 바른 청년이었던 오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아가고 싶었던 울이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꼬마 귀신 성의 존재가 성가시고 귀찮지만 어느새 점차 귀 기울이게 된다. 도굴꾼들이 울이의 집 아래에 묻힌 유물을 탐내는 가운데, 성이는 자신이 깃든 물건이 온전히 발굴되어 박물관에 가야만 길잡이를 만나 저승으로 갈 수 있다.

    추리와 비밀 그리고 땅속과 땅 위를 오가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지는 한편, 오빠가 남긴 이야기와 성이가 몸소 보여 주는 희생을 통해 사랑이라는 커다란 메시지에 다가가는 울이의 모습이 아름답고 묵직한 감동을 준다. 제2회 비룡소 역사동화상 대상 수상작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유물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며 이야기의 풍부함을 더해 역사동화로서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6.272023
  • 매스커레이드 게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은이), 양윤옥 (옮긴이) | 현대문학 | 2023년 6월 "히가시노 게이고, 어느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크리스마스의 들뜬 공기가 거리를 떠도는 겨울밤.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특급 호텔 '코르테시아도쿄'도 몰려드는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설렘과 행복감을 물씬 풍기는 투숙객 사이에서 유독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잔뜩 긴장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호텔 직원으로 변장한 경찰들이다. 이전에 도쿄에서 발생한 세 건의 살인 사건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 숙박을 예약했다는 첩보를 받고 긴급히 출동한 이들의 목표는 크리스마스에 네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만은 반드시 막는다는 것이다.

    같은 호텔에서 개최했던 새해맞이 가면 무도회 '매스커레이드 나이트'에도 참석해 잠입 수사를 벌였던 형사 닛타가 재소환되어 호텔리어 야마기시와 다시 한번 긴밀히 호흡을 맞춘다. 객실의 굳게 잠긴 문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이고, 무수한 사연과 숨겨진 과거의 비밀이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며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생활 25주년 기념작 <매스커레이드 호텔>로 막을 연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5년 만의 신작이다. 한여름에 만나는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 최소한의 한국사
    최태성 (지은이) | 프런트페이지 | 2023년 6월 "최태성이 알려주는 최소한의 필수 역사 지식"

    학창시절 국사를 공부할 때 늘 난관을 겪은 지점은 디테일한 사건과 전체 역사의 흐름이 잘 매칭되지 않는 것이었다. 반만 년 역사의 내용이 방대하니 세부 사건을 파고 들다보면 전체 맥락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럴 때 도움이 됐던 방법은 주요 사건들만으로 구성되어 맥락과 흐름이 눈에 잘 보이는 책 한 권을 교과서 삼고, 거기에 이런 저런 살을 스스로 덧대어 보는 것이었다. 최태성의 이번 책은 그 탄탄한 교과서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다.

    <최소한의 한국사>라는 제목 답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필수 상식 위주로 구성한 이 책은 각 시대와 국가의 주요 사건, 특징, 배경에 방점을 땅땅 찍으며 속도감 있게 나아간다. 그의 강연을 그대로 옮긴 듯 입말투로 서술되어 읽기에 편하고 재미도 있다. 흥미와 재미, 신뢰를 모두 잡은 역사 교양 책, 머리 속에 한국사의 주요 뼈대를 단단히 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 개의 설계사
    단요 (지은이) | 아작 | 2023년 6월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2023년 3회 수상작을 출간한 문윤성 SF 문학상의 장편 부문 대상 수상작. 같은 해 2023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단요의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바닷가 소도시에 새로 사무실을 낸 감정형 인공지능 설계사의 사무실로 가출한 슈퍼스타 소녀가 찾아온다. 소녀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미등록 '개'를 설계사에게서 받아간다. 소녀는 약속대로 설계사의 사무실을 홍보해주었고, 설계사는 바쁘게 의뢰를 받는다. 성인이 된 슈퍼스타는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했고, 악명 높은 인플루언서와 열애설에 휩싸인다. 이 애인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후 슈퍼스타는 은둔하고 이제 인공지능 개가 설계사를 찾았다. 인플루언서 애인의 죽음과 슈퍼스타의 은퇴의 진실을 다룬 OTT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다큐멘터리의 전개에 맞추어 '일종의 심리 미스터리'가 설계된다.

    기본소득이 보편화된 세계관 속에서도 존재들은 '기본소득자 신세'가 되는 것을 두렵게 여기며 일을 가진 사람만 모여 사는 마을을 만들어 다시 경계짓는다.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런 상대를 만나면 지루해하거나 저의를 의심하고, 남에게 휘둘리면서도 은근한 기쁨을 느끼"(134쪽)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이 설계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뜻한 이야기나 다정한 위로에 행복감을 얻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긴장 속에 있다."(150쪽) 소설은 단언한다.

    어린이 슈퍼스타란 아동학대가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상품이니 말이다. (36쪽)
    스튜디오는 고해성사실이거나 노출증 환자들을 위한 특별구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 (104쪽)
    인간의 마음에는 아닌 척 하면서도 남의 불행을 가십처럼 즐기는 성질이 있어서 (115쪽)

    작가는 이 수상을 통해 “그렇게 써도 된다”는 확답을 받은 듯하다고 말했다. 같은 말도 좋게좋게 해야 하는 시대에 이런 문장을 적고, 그렇게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작가를 만난 것이 독자 역시 반갑다. 현대인으로서 적절하고 쾌적한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상시 세로토닌 복용이 필요한 나와 같은 나의 친구들, 우리의 어긋남을 '환대'하는 소설이 마침내 도착했다.

  • 수상한 이웃집 시노다 1
    도미야스 요코 (지은이), 오바 켄야 (그림), 송지현 (옮긴이) | 다산어린이 | 2023년 6월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있다."

    한 마리의 여우가 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여우인 엄마와 인간인 아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아이들.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을 가진 시노다 집안은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둘째치고 매일매일 야단법석이다.

    비단 여우인 걸 들키지 않으려고 생기는 사건뿐만 아니라 뱀으로 변하는 동생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동네에 나타난 용도 해결해야 한다. 어쩐지 시노다네 집의 친구라면 너무 재밌을 것 같은 일만 벌어진다. 절대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을 알고 싶다면 아무래도 책을 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만의 정말 재미있는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6.302023
  •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은이) | 레제 | 2023년 6월 "당신의 이야기도 다시 쓰일 수 있다"

    김연수의 짧은 소설. 20편의 소설에 공간과 음악의 이야기가 함께 엮였다. '작가의 말'에는 이 소설이 처음 움튼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팬데믹으로 낭독회가 취소되거나 제한적으로 열리던 2021년 10월, 가파도 레지던시에 머물던 작가는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열게 되었다. 눈을 감고 낭독의 흐름을 듣는 관객의 얼굴을 보며 작가는 "그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했다."(297쪽)고 생각했다. 이 에피파니(epiphany) 같은 순간을 경험한 후 작가는 새로 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관객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계속해 가졌다. 낭독회는 2021년의 제주와 고양, 2022년의 광주와 진주, 2023년의 파주와 창원의 도서관과 서점에서 이어졌다. 소설은 그렇게 읽히고 들렸고, 서로 나눈 이야기가 더해져 다시 쓰였다.

    활자화된 소설은 사로잡혀 이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들에는 어쩐히 마침표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은 다시 읽히고 다시 쓰일 것이며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자연소멸한 사랑이든, 사별한 부모이든, 풍화한 감각이든, 바다에 가라앉은 사회적인 죽음이든, 사건은 끝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밤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아침을 향해 몸을 일으키게 하는 힘, 아래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김연수의 '다음 걸음'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뀌어가고, 마음이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34쪽. <여름의 마지막 숨결>)
    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57쪽, <첫여름>)
    그녀는 지금도 양양행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 언니와 손을 맞잡았을 때, 미래가 달라졌다고 믿고 있다 했다. (166쪽 <관계성의 물>)

    유튜브에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 플레이 리스트를 검색해 ( https://www.youtube.com/watch?v=cgrVdZelaFA&list=PLrss0YcayW9whwY0zwpUoq00ALPUGTXRG ) 소설과 연결된 음악을 들으며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적는다. 300쪽의 음악 목록과 301쪽의 낭독회가 열린 장소들의 이름 역시 이 소설의 한 요소. 소설의 문장에 당신의 이야기를 더해 재생하는 순간, 당신의 여름 역시 소설이 될 것이다.

  • 누구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
    데이비드 고긴스 (지은이), 이영래 (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6월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인생은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달리기 대회라는 ‘배드워터 135’는 해수면보다 86m 낮은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에서 시작해 해발 2,548m의 위트니 포털까지 거리 217km, 누적 상승 고도 4,000m를 돌파해야 하는 ‘죽음의 레이스’다. 2006년 7월 22일, 인명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엄선된 100명 남짓의 선수들에게만 참가를 허가하는 이 대회에 출전한 한 선수는 전문 마라톤 복장이 아닌 찢어지고 구멍 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고긴스, 전직 네이비 실 요원이자 미국 육·해·공 특수부대 지옥 훈련을 모두 완수한 그는 작전 중 전사한 동료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사한 동료가 마지막 순간 입었던 티셔츠를 입고 이 죽음의 레이스에 나선 것이었다.

    고긴스는 배드워터 135 외에도 계속해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수많은 대회에 참가하고 기록을 경신하여 약 200명의 전사자 자녀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때는 136kg의 거구에 400m도 뛰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계속되는 가정폭력과 학대,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는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 속 훈련받는 네이비 실 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네이비 실에 입대한 그는, 극한의 훈련을 수차례 마주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은 최선을 다한 그 순간에도 고작 40%의 잠재력만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만든 한계에 속지 말고, 내면에 숨겨진 남은 60%를 찾아내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수천억대의 자산을 모은 것도 아니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한계를 부수고 극한의 상황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그의 삶에는 분명한 울림이 있다.

  • 그 책은
    요시타케 신스케, 마타요시 나오키 (지은이), 양지연 (옮긴이) | 김영사 | 2023년 6월 "요시타케 신스케와 마타요시 나오키, 두 작가의 기발한 책 여행"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마타요시 나오키. 두 작가의 특별한 만남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통통 튀는 다수의 그림책과 에세이로 국내 어른 독자와 어린이 독자를 두루 섭렵해온 요시타케 신스케의 신작이자, 소설 <불꽃>만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마타요시 나오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은다.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왕이 나이가 들어 더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두 남자에게 경비를 쥐어주며 세상의 진귀한 책 이야기를 수집하여 오라고 명한다. 길을 떠난 두 남자는 1년 뒤 다시 왕에게 돌아와 13일 동안 밤마다 52권의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 어린 시절에만 읽고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책, 책갈피를 먹고 자라는 책, 꿈속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 악마를 가둬두는 책, 남의 험담만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리는 책. 진귀한 책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에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의 귀여운 그림들이 등장하여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두 남자의 마지막 반전 이야기에서 또 한 번 큰 웃음을 선사한다. <있으려나 서점>과 함께 읽는다면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 다정한 말이 똑똑한 말을 이깁니다
    이재은 (지은이) | 더퀘스트 | 2023년 6월 "다정하고 조용한 말은 힘이 있다"

    세상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나의 필요를 발견하여 지갑을 열 수밖에 없게 하는 점원,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과 피드백으로 부족한 점과 개선 방향을 보여주는 동료, 명확한 목표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바탕으로 조직의 선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 자신이 최근 본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이야기를 마치 옛 무성영화 시절 변사처럼 실감 나게 설명하며 ‘입덕’ 시키는 친구까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

    '뉴스데스크' 앵커이자 아나운서인 저자는 10년 넘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또 만나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의 화법이 따로 있음을, 그런 사람은 바로 ‘똑똑한 말’이 아닌 ‘다정한 말’로 소통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처음 만났지만 친근하고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알고 지냈어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 실력이 뛰어나도 함께 일하기 싫은 동료가 있는가 하면, ‘다음에도 같이 일하고 싶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두 유형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 즉 말투와 태도의 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말하는 ‘다정한 말’이 무조건 순하거나 모든 걸 양보하고 포용하는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주의 깊은 경청과 적절한 리액션,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요청과 거절을 건네는 말하기의 기술과 태도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