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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022
  • 인생의 역사
    신형철 (지은이) | 난다 | 2022년 10월 "신형철 4년 만의 신작, 삶으로 시를 겪고 읽는 일"

    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후 4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다.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신형철은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 시가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인생과 같다고 말하며, 이번 책에서 삶으로 겪고 읽은 시의 이야기를 깊이 있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풀어낸다.

    신형철은 ‘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라고도 하고,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라고도 한다. 상고시가 「공무도하가」로 시작하여 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 이영광 「사랑의 발명」, 메리 올리버 「기러기」를 거쳐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까지. 우리 곁의 시를 스스로의 삶으로 겪고 읽어 내려가면서 대단하고 특별한 순간을 몇 번이고 만들어낸다. 신형철의 시화詩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알던 시도 새롭게 다시 겪게 된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이 책 곳곳에서 그런 문장들을 조우하게 될 것이다.

  • 오, 윌리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은이), 정연희 (옮긴이)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022 부커상 최종후보작"

    지나간 사랑의 모습은 일상과 단절된 기억 속에 유물처럼 자리 잡고 때때로 미화된 광채를 내뿜기 마련이다. 그러나 루시 버튼이 그리는 과거의 사랑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결혼해서 20년을 함께 살았고, 헤어진 후 각자 재혼했지만 두 딸을 함께 키우며 일상을 공유해온 존재. 이제 일흔에 접어든 전 남편 윌리엄에 대해, 루시는 쓴다. 수십 년을 뉴욕에 함께 살았지만 "맞춤 정장을 입듯" 맨해튼 한복판의 생활에 착 맞춰들어가 “어떤 것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태도로 삶을 대해온 윌리엄에 비해, 스스로 "밑바닥 출신"이라 여겨온 루시는 단 한 번도 뉴욕에서 "진짜로 살았던" 것 같지 않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 주고 있다는 안정감으로 충만했었던 마음과, 서로의 치부를 가장 예리한 말로 공격하다 남은 깊은 상처를 회상한다. 남편이 내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잠시 모든 갈등을 묻어버리던 순간도 있었다. 마침내 이혼을 결심했을 때에는, 헤어짐의 고통과 그에 따를 책임이 죽을 만큼 두려웠지만 또 생은 계속되었다. 과거의 인연이기에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과, 그와 동시에 엄습하는 더 이상 그와 함께이지 않다는 것에 감사하며 안도하는 마음. 그렇게 윌리엄은 루시에게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리고 노년의 윌리엄과 함께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루시는 그에 대해 반드시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고 마음먹는다. 일순간에 풀린 미스터리가 루시에게 진정한 해방감을 선사했기에.

  • 요나단의 목소리 1~3 세트 - 전3권 (완결)
    정해나 (지은이) | | 2022년 10월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쳤던 그 사랑과 슬픔에 대하여"

    누군가를 깊게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있다. 들뜸, 기대, 후회, 그리고 슬픔들. 어느새 멋없는 어른이 되어 무뎌진 이 감정들은, 그러나 다시 소환이 되기도 하는데 이 책 <요나단의 목소리>는 바로 그 시절의 소중했던 마음들을 환기시키는 이야기다.

    한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의 기숙사에서 목회자 아버지를 둔 선우와, 그의 룸메이트 의영이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열심히 공부만 하면서, 매주 학교 채플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모범생 선우는 어딘가 모르게 냉소적이다.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기독교 학교에 진학한 의영은 이 학교의 모든 것들이 낯설지만 어쩐지 노래하는 선우의 목소리는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평소와는 다르게 노래를 하기 싫다며 조용히 울기 시작한 선우, 의영은 선우가 가지고 있는 깊은 상처에 다가서게 된다.

    명백히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는 만화지만 관찰자인 의영의 눈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래서 충분한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윗가슴을 짧게 쥐어짜고, 긴 슬픔을 남기는' 진짜 통증을 나도 함께 느끼며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책을 읽었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이야기, 당신이 오래 사랑하고 기억할 이야기가 바로 여기 있다.

  •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장석준, 김민섭 (지은이) | 갈라파고스 | 2022년 10월 "장석준, 김민섭. 한국의 능력주의에 관하여"

    이어지는 능력주의 담론. 이번엔 장석준과 김민섭이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해 말한다.

    장석준은 계급에 주목하여 능력주의 세계관을 풀어간다. 그는 '지식 중간계급'의 탄생과 이에 대한 하위 계급의 열망으로부터 능력주의가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현상은 공교육의 확대라는 배경에서 탄생했는데, 공교육 시스템 속에서 모두가 '지능'이라는 하나의 기준 아래 줄 세워지는 경험을 하며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계급'의 패배감을 키우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가 데이터 비교를 통해 한국에서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가 엮인 현실을 파악하고 날선 비판을 했다면, 장석준의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는 능력주의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살피고 현재 한국 능력주의의 계급적 특성에 집중하여 문제의 해결법에 접근한다.

    김민섭은 <유령들의 패자부활전>이라는 픽션으로 사회과학적 분석이 미처 담지 못하는 현실의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지방대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계급의 경계에서 능력주의 세계관의 아찔한 사다리를 선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장석준의 논픽션과 김민섭의 픽션이 합쳐진 독특한 구성을 통해 책은 한국적 능력주의의 현실을 포괄적이고도 날카롭게 보여준다. 능력주의 디스토피아의 현재,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있나.

11.42022
  • 랑과 나의 사막
    천선란 (지은이)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천 개의 파랑> 천선란의 소설적 애도"

    어떤 책은 우연하고도 적절하게 소설적인 시점에 우리를 찾는다. 전쟁시대였을 2844년에 만들어져 사막에 정지되어 있던 로봇 고고는 인간인 '랑'에 의해 전원이 켜져 생명을 다시 얻었다. 랑은 인간답게 어느날 엔진이 꺼지듯 심장이 멎었고, 이제 고고는 '랑'이 가고 싶어 했던 과거의 바다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랑에 대한 애도를 시도한다. 이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고고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의 고원 등지에서 조장鳥葬이 시작된 것은 것은 물과 공기가 부족한 환경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티베트에선 인간의 영을 하늘에 전달하기에 새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고고는 인간인 랑이 다른 인간에게 했던 것처럼 랑의 몸을 사막에 묻었고, 인간의 그리움을 복사해 랑의 감정을 따라해보려 시도한다. 과거로 돌아가 푸르게 잎을 피운 나무를 보고 싶다는 인간적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도 랑이 보고 싶어했다는 이유만으로 과거를 향해 모래바람을 걷는 '나'. 애도의 여정에서 만난 인간과 로봇과 외계 생명체와 대화하며 고고는 그들의 사막과 나의 사막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10월은 이유 없이 갔다. 존엄한 작별에 대한 적절한 우화를 읽기에 적당한 11월의 첫 주, 천선란의 소설을 소개한다.

  •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김윤영 (지은이) | 후마니타스 | 2022년 10월 "조문영, 박경석 추천. 아픈 서울 이야기"

    활동가분들이 쓴 책은 바로 펴지 않고 책상 위에 잠시간이라도 둔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농도 짙은 경험에서 나온 좋은 문장을 맞이할 준비와 마음 아픈 진실들을 마주할 준비. 13년차 반빈곤활동가 김윤영이 쓴 이번 책 역시 깊고 아린다.

    경의선 숲길, 도원동 삼성래미안 아파트,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 마포 래미안 푸르지오 아파트... 길고 복잡한 이름을 단 번쩍이는 건물들을 지날 때, 그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개발의 이름 아래 폭력적으로 몰려난 목숨, 생계, 온정, 삶... 삶. 김윤영은 미디어에서 늘 폭력적인 패배자로 그려지는 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른다. 이름으로 불려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이웃이다. 그는 밝은 애정을 담은 눈으로 이들이 얼마나 보통의 삶을 살았었는지, 삶의 터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현장에서의 기억을 기록한다. 그리고 국가는 돈의 테두리 밖에 있는 국민을 얼마나 야만적으로 삶에서 몰아냈는지.

    하나의 챕터에 하나의 장소, 챕터가 끝나는 장엔 과거나 현재 그 장소의 흑백사진이 크게 실려있다. 사진들이 나올 때마다 별안간 오디오가 차단된 듯 마음에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밀려오는 설움. 이 적막을 느낀 후로 서울은 보이는 대로의 서울이 아닐 것이다. 멋진 건물을 볼 때는 그 아래 깔린 삶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간의 욕망이 어쩐지 징그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 기소영의 친구들
    정은주 (지은이), 해랑 (그림) | 사계절 | 2022년 10월 "슬픔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국영수 공부 열심히 했지만 살면서 진짜 필요한 정보는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침에 잘 일어나는 법, 설거지를 물 튀지 않게 하는 법, 전월세 계약하는 법, 알맞은 생일 선물 고르는 법 같은 소소하지만 삶이 달라지는 정보 같은 것. 나아가 이별을 잘 받아들이는 법, 더구나 불의의 사고로 친구 또는 가족을 떠나보냈을 때 닥칠 일과 감정들에 대해선 질문조차 금기다.

    지독한 방귀 냄새를 무기 삼아 남자애들을 공격했던, 유기견을 친구 집에서 대신 기르며 보살폈던, 행주 기 씨 무슨 파 종손 기소영은 없다. 이별이 너무나 기이하게 당도했다. 기소영의 친구들-채린, 영진, 연화, 나리, 호준-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장례식에 갈 수 없는지, 책상 위 국화꽃은 언제까지 두어야 하는지, 교실에서 기소영의 흔적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지, 왜 아무도 '기소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지.

    애도하는 법에 대해 알고자 한 적도 배움 받은 적도 없다. 그저 눈물을 흘리는 슬픔만이 애도의 전형이라 강요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지 않음이 애도라 생각한 게 부끄럽다. 기소영의 친구들은 소영이를 추억하며 웃고 싶다. 소영이와 보낸 빛나는 순간들을 즐거움으로 남기고 싶다. 애도는 '무엇이든 하지 않음'이 아니라 추억하고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형태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슬픔이 전염병처럼 퍼진 세상에서 '기소영의 친구들'이 말해준다. "잘 보내줄 기회가 있으면 미안함보다 좋은 기억이 커질 수도 있"다고.

  • 이상한 집
    우케쓰 (지은이), 김은모 (옮긴이) | 리드비 | 2022년 10월 "SNS를 휩쓴 부동산 괴담의 전말"

    이 거대한 이야기는 도쿄에 집을 마련하려는 지인의 상담에서 시작됐다. 매매하려는 단독주택의 평면도에 이상한 공간이 있어 찜찜하다는 것이다. 괴담을 사랑하는 오컬트 전문 작가 '우케쓰'는 즉각적인 호기심을 느껴 한 건축 설계사에게 주택 평면도를 보여준다. 그는 불안해하며 수수께끼의 공간 외에도 집 구조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말한다.

    문이 없는 공간, 이중문, 창문이 없는 아이 방, 비효율적인 구조.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설계사는 한 가지 가설을 내놓는다. 그것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였다. 우케쓰는 이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SNS에 올렸고, 이는 2020년 일본과 한국 커뮤니티를 휩쓸었다. 그리고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어 2021년 일본 호러 미스터리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우케쓰가 올린 동영상을 보고 연락해온 수수께끼의 여인, 도쿄의 '이상한 집'을 꼭 닮은 다른 지역의 집들, 이웃 주민들의 목격담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전에 공개됐던 이야기는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뿐이다.

11.82022
  • 회복력 시대
    제러미 리프킨 (지은이), 안진환 (옮긴이) | 민음사 | 2022년 11월 "제러미 리프킨. 전 세계 동시 출간"

    우리가 알던 세계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개발하고 확장하고 뻗어 나가는 것이 곧 옮음이라 믿던 진보의 시대는 파국을 불러왔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경제,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한다. 적응과 어우러짐, 생명애 의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회복력의 시대다.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의 구체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는 우리가 그간 가져온 세계에 대한 상을 산산이 부숴 근본부터 다시 세우길 제안한다. 자연과 문명의 관계, 자본의 작동 방식, 소유권의 주체 등 모든 방면에서의 전면적 변화만이 이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늦었어도 포기할 수 없다. 좌절이 일상이 된 세계에 희망을 눌러 담은 로드맵이 도착했다.

  •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은이) | 스위밍꿀 | 2022년 10월 "시간과 마음의 연결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산책을"

    2018년 <사랑하는 개>에서 출발한 박솔뫼 소설. 동면하는 사람에 대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성기게 짠 목도리의 무늬처럼 이어진다. 첫 이야기 <여름의 끝으로>를 시작하는 것은 동면을 결정한 친구 허은을 돕는 나의 이야기. 인생의 어떤 시기에 겨울잠을 선택해 약물을 이용해 한 달씩 자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나, 허은, 태식, 태인, 시온이라는 인물들을 징검다리처럼 건너 다섯 번째 이야기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로 물흐르듯 이어진다. 산책이 꼭 필요한, 인생의 어떤 시기를 겪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그림자 개와 달리는 시온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온의 말을 들어 본다. "나에게 이런 존재가 나타나다니,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132쪽)

    인물의 연쇄가 이야기의 겹을 부풀게 한다. 첫 이야기의 고양이 차미를 보면 박솔뫼의 소설과 꾸준히 걸어온 독자에겐 <고요함 동물>의 '어느날 불현듯 탐정이 되기로 한' 그 고양이가 떠오를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허은과 같은 숙소를 쓰는 고양이 차미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온양에서 온천을 하고, 대전으로 기차를 타고 가 두부 두루치기와 빵을 포장하고, 헌책방을 다니고, 기차역을 걸어다니다 다시 귀가하는 동면 가이드 '나'가 자리를 비운 숙소에서 보낼 차미의 하루를.

    별스럽지 않게 보낸 여행지에서의 한 시기가 떠오르는 그런 소설. 개와 함께 달리는 정도의 속도로 슬픔이 흘러가길 기대해보며 소설을 읽었다. "슬픈 일은 사라지지 않고 대신 우리는 다른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길 기다리며 손을 뻗고 밥을 먹고 아이를 낳"(18쪽)는 것이 삶의 한 풍경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의 발걸음처럼 일정한 리듬감으로, 시간 - 마음을 연결하는 한 사랑스러운 세계가 지나간다.

  • 우중괴담
    미쓰다 신조 (지은이), 현정수 (옮긴이) | 북로드 | 2022년 11월 "미쓰다 신조 괴담집"

    어려서부터 집과 관련된 괴담에 매혹된 '나'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건축 도서를 기획하기도 하고, 주택 평면도를 보고 상상에 잠겨보기도 하다가 결국 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게 된다. <호러 작가가 사는 집>이라는 장편소설 데뷔작을 발표하고 <화가>에서 <마가>로 이어지는 '집 시리즈'를 쓰는 호러 작가가 된 '나'에게는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을 털어놓고 상담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렇다. 작중 화자 '나'는 미쓰다 신조와 거의 일치하기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의 이상한 경험담을 모은 이 책도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흐리며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결계가 쳐진 낯선 저택에 당도해 일곱 가지 금기 사항을 지키며 무시무시한 밤을 보내야 했던 소년의 이야기 '은거의 집', 순진무구한 아이가 무의식중에 그린 그림 속에서 큰 불행이 암시되는 '예고화', 한 무명작가가 신흥종교 신자들의 시설에서 야간 경비를 하며 목격한 괴이한 일을 다룬 '모 시설의 야간 경비', 할머니의 부탁으로 찾아간 타지의 집에서 무서운 것을 불러내고 만 '부르러 오는 것', 비 오는 산책로에 차례로 나타나 괴담을 들려주는 사람들을 목격한 북디자이너의 고백 '우중괴담'. 다섯 개의 괴담에 순식간에 빨려 들며 긴장하는 사이, 작가의 소회가 훅 덮친다. "그것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이상한 사건을 소설로 쓴 작가, 혹은 이 작품을 본 편집자나 독자가 있는 곳으로 그것이 찾아가는 일은 없을까."

  • 유난한 도전
    정경화 (지은이) | 북스톤 | 2022년 11월 "자주 실패하고 간혹 성공하는 이야기"

    네카라쿠배당토. 듣고 있자면 어쩐지 수인을 맺거나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려야 할 것 같은 이 단어는 현재 MZ세대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IT기업 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한 이 단어 가운데 '토'를 담당하고 있는 토스는, 무간지옥 같았던 액티브X와 공인인증서, 각종 보안프로그램 반복 설치로부터 우리를 해방한 간편 송금 서비스에서 시작하여 뱅킹, 증권, 보험, 결제 등을 아우르는 종합 금융 플랫폼으로 성장해왔다. 이 책은 토스를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토스팀, 비바리퍼블리카의 11년 도전사이다.

    30대 치과의사가 '앱 하나만 만들어보자'며 시작한 이래, 토스는 11년 동안 부끄러운 실패, 절체절명의 위기, 돌아보니 중차대했던 결정, 짜릿한 성공의 순간을 거쳐 2,000명의 공동체로 성장해왔다. 2020년 토스팀에 합류한 콘텐츠 매니저인 저자는 전현직 토스팀원 35명의 인터뷰와 이메일, 슬랙 메시지, 언론 기사나 영상 등 안팎의 자료를 망라하여 토스의 유난한 도전사를 정리했다. 이 이야기는 내부자의 손으로 쓰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이 이야기는 성공적인 창업 지침서나 핀테크 경영서라기보다는, 한 편의 모험 활극처럼 보는 이를 흥분시키고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아직 엔딩을 보지 못한, 현재 진행형이다.

11.112022
  • 아기를 부르는 그림
    미야베 미유키 (지은이), 이규원 (옮긴이) | 북스피어 | 2022년 11월 "미야베 미유키, 기타기타 시리즈 신작"

    여름에는 금붕어와 부채, 물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불꽃놀이를 비롯한 계절의 분위기를 담뿍 머금은 그림을 그려넣은 '붉은 술 문고'. 절기의 풍류를 밑천으로 하는 장사답게 에도 사람들의 구미에 잘 맞춘 상품으로 성업 중이다. 멜대 가득 문고를 메고 거리를 다니는 행상 기타이치는 각종 소문과 수수께끼도 덤으로 듣게 된다.

    주류 도매상을 하는 겐에몬이 매년 단골 손님들에게 직접 그려주는 칠복신 그림에 아기를 점지해주는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에도 저잣거리에 파다했다. 수년간 간절히 아이를 원했던 한 부부도 겐에몬을 찾아 그림을 받았고, 역시 길몽과 함께 소원을 이뤘다. 그런데 그 아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깊은 슬픔 속에서 예전에 받았던 그림을 다시 꺼내본 부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림에서 칠복신이 사라진 것이다. 신이 노해서 아기를 저승으로 데려간 것일까. 이 괴이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한 문고상 기타이치의 활약이 시작된다. 미야베 미유키가 필생의 과업이라 칭한 '기타기타 시리즈' 신작.

  • 미술관 읽는 시간
    정우철 (지은이)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도슨트 정우철과 이중섭의 서귀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미술관으로 여행지를 기억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꽃으로 뉴욕을, 바티칸 시국의 '천지창조'로 로마를 기억하며 지금 이 삶과는 다른 삶을 꿈꾸던 그 순간을 삶의 기쁨으로 간직한다. 한 화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맥락에 맞추어 그에게 헌정된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도 여행의 기쁨이다. 고흐를 만나려면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것. 고흐와 모네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우리 작가에게 돌려보는 건 어떨까? 미술관의 '피리 부는 사나이', EBS 클래스e '미술극장'으로 알려진 도슨트 정우철이 미술관 산책을 권한다. '머리에 바다를 이고' 이중섭이 내내 보고 있었을 서귀포의 먼 바다와 함께, 이중섭 미술관이 제주에 있다. 이중섭은 자신이 잡아먹은 게와 조개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렸다고 한다. 도슨트의 해석과 함께 거니는 미술관. '맑은 바다를 배경으로 벌거벗은 사람들과 새들'이 뛰노는 <해변의 가족>의 풍경과 함께 이중섭이 그린 제주를 따라 걷는다.

    정우철이 권하는 대로 미술관을 유람하며 새해를 기획해보면 어떨까. 실물이 관람자를 압도하는 이응노의 <군상>을 만나러 대전으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은근한 색의 번짐을 골똘히 마주하러 서울시 부암동으로. 김환기, 장욱진, 김창열, 이중섭, 박수근, 나혜석, 이응노를 만나러, 책 한 권을 들고 타박타박 걸어 본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은이), 윤진 (옮긴이) | 엘리 | 2022년 11월 "2021 공쿠르상 수상작, 사라진 작가를 찾아서"

    T. C. 엘리만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발표했을 때 프랑스 문단은 환호를 보냈다. "흑인 랭보의 탄생", "프랑스에서 본 적 없는 책", "성스러운 책"이라는 찬사 속에 비상하던 그의 날개는 단번에 꺾이고 만다. 어느 아프리카 민족학 교수가 세네갈의 한 부족 신화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쏟아지는 모욕 속에서 엘리만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고 출판사는 책을 전량 회수해 폐기했다. 그렇게 그는 증발해버렸다.

    세네갈에서 시인의 꿈을 안고 파리로 온 디에간은 우연히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읽고 충격을 금치 못한다. 언제나 "한 권만 쓰면 다른 책은 필요 없어지는 책"이자 "나를 문학에서 해방시켜줄" 단 한 권의 책을 쓰고자 고군분투했던 디에간에게 엘리만의 책은 바로 그런 책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작품을 쓰고 침묵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었을까. 디에간은 엘리만의 삶에 이끌려 생사가 불분명한 그의 자취를 좇게 된다.

    2021년 공쿠르상은 큰 화제를 모았다. 사상 최초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출신 작가가 수상했다는 것과, 이 책이 프랑스 문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아프리카인 작가로서 유럽에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하여. 짙은 이국의 향을 풍기는 "아프리카인이 되라고, 하지만 너무 많이 되지는 말라는" 양립 불가능한 요구를 받고, 문학상을 수상해도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영예를 나눠준" 것은 아닐지 의심하는 것이다. 소설 속 엘리만의 말이 같은 슬픈 역사를 지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파고든다. "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 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거야."

  • 멘탈리티
    팀 그로버, 샤리 웽크 (지은이), 서종기 (옮긴이) | 푸른숲 | 2022년 11월 "악착같을 것, 그리고 대가를 치를 것."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이들은 모두 세계 최고의 무대 NBA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쳐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환희, 영감을 안겨준 슈퍼 스타 플레이어다. 그들 모두는 여러 차례의 NBA 파이널에서 팀의 중심에 있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최고의 활약을 펼쳐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한 사람의 트레이너에게 트레이닝을 받은 경험이 있다. 팀 그로버, ‘챔피언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트레이너이자 멘탈 코칭 전문가다.

    그 어느 곳보다 경쟁적인 영역인 엘리트 스포츠의 영역에서 최고의 챔피언들과 함께 일해 온 저자는 성공의 순간에도 언제나 그다음 목표만을 바라보고 끝없이 정진하는 ‘악착같음’을 가진 사람들, 절대 만족하지 않고 늘 더욱더 높은 곳을 향해 자신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보상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좋으니까. 이는 비단 스포츠의 영역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학업 등 우리가 성취를 얻고자 하는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들이 공유하는 강력한 멘탈의 특징을 열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그중에 행운 같은 것은 없다.

11.152022
  •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레이먼드 카버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레이먼드 카버 단편집"

    새벽 세시에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잘못 걸려온 전화에 부부는 잠이 달아나버리고, 잠이 깬 김에 담배에 불을 붙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전화기가 울렸을 때 꾸고 있었던 꿈, 뉴스에서 본 끔찍한 사건에서 지금까지 서로에게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시곗바늘은 세시에서 일곱시로 흘러간다. 어느덧 현실의 햇빛 아래 출근할 시간. "작고 해로울 것 없는 꿈과 잠에 겨운 새벽의 이야기"가 이끈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면서도 어쩐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장소로 와버린 듯한 느낌이다.

    삶에서 어떤 어긋남을 눈치채는 순간들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치는 마음. 작가의 시선은 그 작지만 거대한 순간을 향한다. “그냥 이걸 견디며 살 거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미 견디고 살았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면을. 표제작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부터, 레이먼드 카버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내게 그토록 큰 의미였던 작가에게 오마주를 바칠 기회를 얻었다."라고 언급한 안톤 체호프의 죽음에 대해 쓴 생애 마지막 단편 '심부름'까지. 국내 초역작과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던 카버의 단편소설 11편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 ‘한 번 더’의 힘
    에드 마일렛 (지은이), 박병화 (옮긴이) | 토네이도 | 2022년 11월 "매일 남보다 1%를 더 쌓아가는 사람의 기적"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닝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트레이너들은 왜 한 세트에 열다섯 개 한다고 해놓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전신을 부들거리며 마지막 한 개를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를 외치는가. 처음부터 하기로 정한 만큼만 하자고 불평해보지만, 트레이너는 단호하다. "회원님, 못하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이후부터 하는 것만큼이 운동 되는 겁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한계치에서 한 번씩 더 기구를 들어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바벨이 가볍게 느껴지며 근력이 붙어가는 것을 실감하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트레이너는 기뻐하며 바벨에 중량판을 추가해준다.

    결혼 후 신혼집 전기요금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게 살다가 십수 년 만에 세계 최고의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에드 마일렛의 성공 비결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다. "남들보다 딱 1퍼센트만 더한다고 생각하라. 모두가 멈추는 곳에서, 딱 한 걸음만 더 나가라." 남들보다 한 번 더 전화하고, 한 번 더 찾아가고, 한 번 더 설득하며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폭발적인 티핑포인트를 통과하며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싶은 지점에서 '한 번 더' 시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일이든, 학업이든, 운동이든, 이 책이 우리가 성취를 얻고자 하는 영역에서 개인 트레이너처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를 외쳐줄 것이다.

  • 수학의 위로
    마이클 프레임 (지은이), 이한음 (옮긴이) | 디플롯 | 2022년 11월 "허준이 교수, 김겨울, 하재영 작가 추천"

    저자 마이클 프레임은 노년의 수학자다. 짐작건대 평생 수학의 체계를 발견해온 사람, 그 체계로 세상을 해석해온 사람, 그는 삶의 결정적인 감정마저 수학으로 이해해 보려 시도한다. 이를테면 '비탄' 같은 감정을.

    프레임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상실감을 다스리는 도구로 기하학을 이용한다. 수학과 멀찌감치 떨어진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다소 낯선 이야기지만, 삶의 여러 요소들을 그래프로 구성하고 사랑하는 이의 존재와 부재를 그 위에서 바라보는 그의 노력을 읽다 보니 시점의 전환을 말하는 그만의 방식임이 와닿는다. 그는 자신이 수학을 통해 위로받았지만 다른 이들은 또 다른 곳에서 비탄의 폭력을 잠재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

    닫혀버린 세계, 그리고 원치 않게 열린 새로운 세계, 영원히 달라진 곳에서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고통을 다스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가 위무를 찾아낸 방법을, 시선의 전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의 안정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 경청
    김혜진 (지은이) | 민음사 | 2022년 10월 "<딸에 대하여> 김혜진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김혜진의 신작 장편소설은 임해수라는 인물이 쓴 편지로 시작된다. 이성목 기자에게 그는 '살아 있는 척하기, 죽은 채로 살아가기, 살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8쪽)라며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다. 내담자들에게 자신있게 조언을 하던 상담 전문가 임해수, 그는 노력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어오고 말해오던 사람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 당신은 호감을 가질 수 있는가?) 한 연예인의 돌발적 행동에 대해 방송에서 한 날카로운 코멘트 이후 그는 더이상 이 세상에서 청취되지 않는다.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휴직과 퇴사를 통보 받았다. 아직도 임해수의 이름을 악명으로 매체를 떠돈다.

    임해수는 자신의 사죄와 반성을 바라는 세상에 부치지 못할 편지를 반복해 적는다. 그런 임해수가 병든 길고양이 순무와 고양이를 돌보는 초등학생 황세이를 만나 다시 세상을 듣기 시작한다. 김혜진은 연민하는 대신 질문하며, 단단하게 짠 문장으로 임해수의 삶의 한 시기를 본다. 임해수는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일까? 세상의 모든 말 대신 부당한 책임을 지게 된 피해자일까? 김혜진의 문장은 임해수를 변명하지도, 동정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적어 내려가는 편지를 따라 적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세이의 진실과 소리의 진실은 각자 다른 방향에서 날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233쪽)라고 해수가 깨닫는 순간, 그는 드디어 '경청'할 준비를 하고 자신을 둘러싼 소음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다. 자신이 실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308쪽)

11.182022
  • 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은이), 정은귀 (옮긴이) | 시공사 | 2022년 11월 "2020 노벨문학상, 루이즈 글릭 대표작"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마침내 한국어 독자를 만난다. 한국외대 정은귀 교수의 번역으로 퓰리처상과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패터슨>이 사랑하던 바로 그 시인이다.) 시 협회상 수상작 <야생 붓꽃>, PEN 뉴잉글랜드 어워즈 수상작 <아베르노>, 전미도서상 수상작 <신실하고 고결한 밤> 세 권이 함께 출간되었다. 신형철과 김소연과 나희덕이 미리 읽고 추천한 세 권의 시집 중 이 계절에 어울리는 <야생 붓꽃>을 집어 든다. '인간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들어야만 하는 말'이 들려온다는 신형철의 감상과 함께 '새로운 세상의 맵찬 바람(in the raw wind of the new world)'을 느끼기 위해 정원으로 떠나 본다.

    차례를 시처럼 읽으며 어떤 정원사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야생 붓꽃, 아침 기도, 아침 기도, 연령초, 광대수염꽃, 눈풀꽃, 맑은 아침, 봄 눈, 겨울의 끝, 아침 기도로 다시 이어지는 시의 배열. 세계는 아름답고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나는 부서져 있다. 그리하여 목소리는 여러 겹의 물감을 덧바른 캔버스처럼 번진다. '실은 쪼개진 나무 몸통에 동그마니 웅크려, 평화로울 정도야.', '반면에 행복한 마음은 / 정원을 배회한다고,' (13쪽)라고 적은 첫 아침 기도의 시처럼, 세계는 맵차고 비통하고 평화롭고 고요하다. 꽃을 관찰하는 일과 시를 읽는 일은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꽃잎을 향해 무릎을 꿇은 이는 저녁 기도를 올린다. 헐벗은 그에게도 빛이 쏟아진다.

    꽃이 품고 있는 자양분으로가 아니라
    헐벗은 나무를 통과하는 눈부신 빛처럼. (<저녁 기도>, 68쪽)

  • 나중에
    스티븐 킹 (지은이), 진서희 (옮긴이)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스티븐 킹 신작, 유령과 대화하는 소년"

    여섯 살 난 제이미에겐 비밀이 있다. 죽은 직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령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 때문에 몇 번이나 어머니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 어머니의 삶은 이미 너무도 만만치 않다. 출판 저작권 대리인으로 일하며 어떻게든 팔아야 할 책들 생각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 혼자 힘으로 '미쳐버린'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제이미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실을 고백하지만, 어머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더욱 불안해한다.

    마침내 제이미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순간이 찾아온다. 어머니의 희망이자 "왕관의 보석"인 베스트셀러 작가 리지스 토머스가 필생의 역작 '로아노크' 시리즈의 완결편을 서른 장 남짓 써놓고 책상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자, 어머니는 제이미의 도움을 요청한다. 스티븐 킹이 2021년 발표한 신작 소설로 <그것>과 연결된 세계관을 담은 소설로 현지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제이슨 블룸 제작, 루시 리우 주연의 TV 드라마로 제작 중에 있다.

  • 11월 13일의 불꽃
    윤자명 (지은이), 김규택 (그림) | 풀빛 | 2022년 11월 "근현대사 100년 동화, 청년 전태일의 꿈"

    열세 살 순옥은 돈을 벌기 위해 봉제 공장의 미싱사 보조인 '시다'로 취직을 한다. 봉제 공장에는 많은 십 대 여자아이들이 일을 하고 있다. 매캐한 먼지 날리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해도 살아내기에 충분한 돈을 받지는 못한다.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공장에서 쫓겨 나기에 고통을 숨기고 일하는 사람도 태반이다. 순옥은 이런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시골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태일 재단사는 이런 열악한 노동 시스템을 고치고 싶어 한다. 근로 기준법을 공부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구상한다. 노동청과 서울시청에 진정서를 내고 언론에 부당한 노동환경을 고발한다. 그 이후 선의로 똘똘 뭉친 청년 전태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어린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본다. 경찰관, 의사, 피아니스트, 선생님……. 물어본 숫자만큼의 대답들이 열릴 테다. 블루칼라니 화이트칼라니 하는 구분은 잠시 내려놓자.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자는 모두 노동자다. 전태일 열사가 닦아 놓은 길 위로 수많은 꿈들이 걸어 다닌다.

  • 도토리 문화센터 1
    난다 (지은이)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난다 작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 멋진 세계"

    일상 만화 <어쿠스틱 라이프>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난다 작가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편 스토리 만화이다. '유니버스그룹'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꼭 파괴해야만 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도토리 문화센터'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졌지만, 취미 활동이라는 공통분모로 이곳에 모인 회원들 중 4명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미션이 바로 유니버스그룹의 워커홀릭 부장, 고두리에게 있다. 도토리 문화센터에 회원으로 잠입하여 타깃 4명의 동태를 살피기로 한 고두리 부장과 조력자 오소운 사원은 과연 이곳에서 무사히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타고난 스토리텔링 능력과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독특한 감수성, 그리고 개그감까지 완벽하게 갖춘 난다 작가의 재능이 이 장편 만화에 유감 없이 발휘된다. (왜 이제껏 일상 만화만 그렸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 정도이다.) 취미는 인간을 아둔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하는 고두리 부장이 취미 활동을 통해 점차 성장해가는 과정과, 타깃 4명이 각기 처한 현실을 멋지게 타개해나가는 이야기들이 에피소드 별로 실려있다.
    난다 작가가 그려낸 이 '도토리 유니버스'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다정한 동시에 매우 현실적이다. <어쿠스틱 라이프>를 사랑했던 기존의 팬들도, 이 책으로 처음 난다 작가를 만나는 새로운 독자들도 모두 만족시킬만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11.222022
  • 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은이) | 창비 | 2022년 11월 "모두의 겨울에 평화가 있기를, 김금희 연작소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김금희의 연작소설 속 사람들은 그의 소설 <경애의 마음>의 아름다운 문장처럼 '조금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은'채 각자의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첫 소설 <은하의 밤> 속 방송작가 은하는 항암치료를 하며 '마음이 지옥처럼 어두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13쪽) 끝없이 기도를 하는 고독한 밤을 보냈다. 쿠바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며 은하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세 번째 소설 <월계동 옥주>의 옥주는 남자친구 현우와 이별 후 떠난 중국 어학연수에서 크리스마스엔 중국에서 사과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지막 소설 <크리스마스에는>에서 은하와 같이 일하는 피디 지민은 음식 사진으로 가게를 맞히는 '맛집 알파고'를 취재하기 위해 전 남자친구인 현우를 눈 오는 크리스마스, 부산에서 만난다.

    해명되지 않는 많은 장면들이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다.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물음에 기꺼이 호의로 답하는 사람들. 호숫물로 등잔을 밝힐 수도 있다는 얘기를 기꺼이 믿는 사람들. 한번 준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의 평안을 비는 사람들에게 올해도 한 해의 끝이 다가왔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중국어로 핑안예(平安夜)라고 한다. 잘 모르는 나라의 말로 각자의 고요한 밤을 기원하게 되는 김금희의 소설의 겨울 정경. 모두가 모두의 행복을 비는 박애주의의 날이 있다는 것(305쪽)은 희박하지만 기쁜 일이다.

  • 빈곤 과정
    조문영 (지은이)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빈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기초수급자', '차상위계층' 등 물질적 결핍에 대한 차가운 기준에 익숙한 한국의 시민들은 '빈곤'의 계량화가 간단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회/정치적으로 합의된 빈곤의 기준은 없다. 빈곤 개념은 사회마다, 학자마다 사뭇 다르게 사용되며 그렇기에 국가별 빈곤대책도 천차만별이다. 오랫동안 빈곤의 지형을 탐구해온 인류학자 조문영은 빈곤을 '과정'으로 본다.

    과정이라는 말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흐릿한 경계. 가진 자본이나 수입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은 빈곤을 불안해하는 동시에 그 실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혼란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 조문영은 빈곤에 대해 단정적으로 정의 내리길 거부하고 개념의 외연을 확장해나간다. 개별적 빈곤 서사, 그리고 그 서사를 이용한 국가 통치, 빈곤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글로벌 빈곤의 세계를 대하는 청년들의 실존 빈곤으로 확장되고, 이어 비인간을 착취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논의까지 뻗어간다.

    빈곤이 곧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 속에서 취약한 존재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분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지구상의 누구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빈곤에 맞선 비판, 저항과 함께(同) 머무르며 살아가는(居) 감각과 의식을 키울 수밖에. 빈곤 연구 20년, 조문영이 오래 숙성시켜 내놓은 이 책은 빈곤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한다.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 (지은이), 황미숙 (옮긴이)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작품 감상에서 콘텐츠 소비로"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서비스나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 서비스들은 ‘빠른 배속’과 ‘스킵’ 기능을 제공한다. 영상을 1.25배속이나 1.5배속으로 빠르게 재생해주거나 한 번 클릭으로 10초씩 건너뛰며 감상할 수 있는 이 기능 덕분에, 영상을 시청하는 와중에 지루하거나 관심 없는 부분을 빠르게 넘어간다. 그 와중에 유튜브 알고리즘은 2시간짜리 영화나 플레이타임 50시간 분량의 게임 스토리를 10분에 요약해주는 영상들을 추천해준다. 빨리 감기로 보고, 건너뛰며 보고, 요약된 영상을 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민방위 사이버교육도, 직장 법정의무교육 온라인 수강도 아니고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저자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빨리 감기’의 이면에 콘텐츠의 공급 과잉,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친절해지는 대사가 있다고 지적하며 빨리 감기라는 현상 이면에 숨은 거대한 변화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치트키’를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실패하면 안 된다’라는 압박 속에서 사람들은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사람들에게 ‘빨리 감기’는 가성비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저자는 2021년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 칼럼을 기반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해 보인다.

  • 호텔 이야기
    임경선 (지은이) | 토스트 | 2022년 11월 "임경선이 스케치한 그라프 호텔의 마지막 계절"

    서울 남산 둘레길에 위치한 그라프 호텔은 2022년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할 예정이다. 이 호텔의 오너였던 고미술상 이유한씨가 '본질을 흐트러트릴 바에야 차라리 없애겠다.'(182쪽)는 유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여러모로 효율적이지가 않다. 7층 본관과 5층 별관과 잔디밭과 야외 수영장이 다인 이 호텔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도 쉽지가 않다. 층고가 높은 공간 안으로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풍성한 꽃장식과 고풍스러운 벨벳 가구가 손님을 맞는다. 단체 관광객 유치와 식음료 판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적당히 한적한 호텔엔 "과거의 영광과 자존심은 여전히 포기 못 하면서도 이제는 끝을 받아들인 자들이 가지는 어떤 숙연한 공기" (22쪽)가 흐른다. 임경선의 신작 소설 <호텔 이야기>는 이 '그라프 호텔'이라는 공간을 눈에 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호텔 영업 종료를 앞둔 마지막 육개월, '바깥 세상과 다른 속도로 시간이'(29쪽) 흐르는 이 공간에서라면 소설처럼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적한 호텔에서 한 달을 머물며 자기 작품 대신 다른 이의 작품을 각색하는 영화감독, '대실' 상품을 판매하는 호텔에서 비밀스럽게 연인을 만나는 '프랑스 소설'같은 하루를 보내는 남자, 하우스키핑이라는 직업을 얻은 후 비로소 삶의 평화를 찾은 메이드. 언젠가 호텔에서 마주쳤을 법한 스쳐지나가는 이들의 삶에 각자의 소설이 있다. 가장 자신다운 공간으로 남기 위해 이별을 준비하는 호텔이 나다운 삶을 골똘히 바라보는 각자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며 마지막 계절을 맞이한다.

11.252022
  • 나를 위한 노래
    이석원 (지은이) | 마음산책 | 2022년 11월 "이석원,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

    이석원 작가는 수년간 지속되어 온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중, 마음산책으로부터 강연 제의를 받는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제안을 수락했던 처음과 다르게 세 번의 강연은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 책은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자, 이석원만이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이다.

    총 세 번에 걸쳐 진행된 각 강연의 주제는 ‘관계의 고통과 자유로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선택들’ ‘나는 왜 쓰고 만드는가’이다. 타인과 갈등을 빚고, 타인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법,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올바르고 정확한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과 선택의 결과에 대한 마음가짐, 음악가로서 작가로서 창작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작가다운 솔직함과 위트로 명쾌하게 들려준다.

    각각의 주제로 진행된 강연이지만, 관통하는 핵심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깨달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도 여전히 답을 찾아가는 중이며 단지 이 책은 그 과정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질의응답까지 꼼꼼하게 정리, 수록하여 현장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이 책이, 관계와 선택, 창작으로 길을 헤매고 있을 누군가에게 작은 힌트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 도시의 생존
    에드워드 글레이저, 데이비드 커틀러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1월 “도시는 죽을 수 있다”

    “도시도 다른 생명체처럼 수명이 다해서 죽을 수 있다. 또한 도시가 나이 들어 쇠퇴하는 일도 흔하다. 도시의 승리나 성공은 영원하지 않다.” 2011년 출간한 전작 <도시의 승리>(국내 출간 2021년)에서 도시를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으로 말하며 도시의 번영에 대한 자신감에 넘치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10여 년 만의 새 책에서 도시의 번영이 끝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시가 쇠퇴하는 원인이 대부분 탈산업화에서 비롯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팬데믹이 도시와 도시의 시민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고, 이는 그가 전작에서 도시 혁신의 원천으로 지목했던 도시의 인접성과 혼잡함이 오히려 도시를 무너뜨리는 위험 요인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도 현대 도시에는 높은 주거 비용, 일자리 간 격차, 재난과 재해에 취약한 기반 시설, 부실한 건강보험제도, 낮아진 상향 이동의 가능성, 젠트리피케이션, 안전과 자유 사이의 딜레마 등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건, 빈곤, 교육 등 다방면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제언을 위해 이 책은 보건경제학 전문가이자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브레인’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커틀러 교수와 공동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2500년 도시의 역사를 넘나들며 저자들은 도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공중 보건 시스템과 책임감 있는 공공 부문의 행정 역량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 세계 인구의 76%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오늘날, 도시의 생존에 대한 고민을 더 미룰 수는 없다.

  •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은이)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그럼 너희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어"

    데뷔작 <하긴>으로 2019년 젊은작가상을 수상,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해 소개하는 '소설 보다' 시리즈에 세 계절 이름을 올리고 2022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이미상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라는 '자전적'(작가 역시 방학철 가톨릭계 성지순례를 경험했다고 한다.) 소설의 인상적인 문장으로 이 소설집 읽기를 시작해본다. "맞아, 어른들은 나쁜 짓을 해. 너희의 가슴을 찢어놔. 하지만 슬퍼 마. 억울해 마." 동유럽의 시골마을 M에서 (종교적 광인으로 보이는 인물인) 율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위로라고 받아들인 그 말은 이렇게 시간차 공격을 가한다. "너희는 클 거야. 자랄 거야. 그럼 너희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어." (233쪽) 아이들은 이 말처럼 상심한 채 어른이 된다. '남이 나에게 한 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234쪽)하는 어른으로, '병자를 고치시는 청동 예수님'의 사진을 지갑에(228쪽) 넣어다니는 환자로. 이 상심한 이들에게 세상은 이렇게 펼쳐진다.

    <그친구>의 586 운동권 부부 규와 김은 재산분할을 할 에너지가 없어 이혼하지 않고 산다. 아내인 규를 '그친구'라고 부르는 남편 김, 그는 "아내를 그친구라고 부르는 자기 자신을 사랑"(69쪽)하며 산다. 딸의 이름을 '한겨레신문'을 지지한 것처럼 순 우리말 보미나래로 지은 <하긴>의 아버지는 좀처럼 느린 딸을 '학종'으로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대안학교에 보낸다. 이 아버지가 질투하던, 삭발-자퇴-등단-국립예술대 루트를 밟은 친구 딸 초롱은 <이중 작가 초롱>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초기작이 발굴되어 사이버불링을 당한다. 누군가에게 가슴을 찢기고 또 이젠 가슴을 찢는 사람들. 자주 '씹혀왔던' 인물들의 구체적인 얼굴을 이미상은 현란한 솜씨로 그려 낸다. 어떤 인간을 조롱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멈추든, 그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얼굴에서 내 흉터를 발견하든, 이야기는 당신에게 선택지를 열어둔 채 펼쳐져 있다. 소설가 강화길, 작가 김하나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고 불가사의한 이 소설집을 추천했다.

  • 아기 다람쥐의 크리스마스
    도요후쿠 마키코 (지은이), 김소연 (옮긴이) | 천개의바람 | 2022년 11월 "산타도 선물이 갖고 싶을지 몰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나의 마음이 받는 이의 미소로 옮겨 가는 모습을 볼 때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곤 한다. 비록 나 자신의 위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존재'에서 '주는 존재'로 변하였지만, 선물을 줄 상대방이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는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소개한다.

    머나먼 북쪽 나라, 산타는 매일매일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다. 그 옆에 살고 있는 아기 다람쥐는 산타를 바라보는 게 일상이다. 크리스마스 준비를 끝내자 산타는 선물을 싣고 떠난다. "산타에게는 선물이 없는 걸까? 산타에게도 선물을 주면 좋을 텐데. 그래, 없다면 내가 준비하자!" 산타도 선물을 받으면 분명 기쁠 거라고 생각하는 아기 다람쥐는 산타를 생각하며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데...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 12월 한 달만은 절대 울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머리맡에 놓인 선물을 풀어헤치는 손 위로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나의 산타'는 분명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선물의 진정한 가치는 선물을 준비하는 이의 마음 그 자체에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 <아기 다람쥐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한번 펼쳐본다.

11.292022
  •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이민진 (지은이), 유소영 (옮긴이)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파친코> 이민진,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의 시작점"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 강렬한 첫문장이 뉴욕의 한국계 미국인 여성 케이시의 삶을 관통한다. 이민 1세대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희생해온 부모는 프린스턴을 갓 졸업한 케이시에게 어서 변호사가 되고 한국계 남자와 결혼하여 자신들의 기를 세워주길 바란다. "법률, 경영, 의대라는 세속적인 삼위일체"가 유일신으로 치부되는 곳. 그 견고한 성공의 길을 이탈하여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케이시에게 세상은 "돈 많은 백인처럼 굴고 있다."는 빈정거림만을 돌려준다.

    이민자 여학생이 감히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려는 것은 오만한 짓일까. 결국 '금융의 성전'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에 영업 보조로 취업한 케이시는 자기 의심 속에서 매 순간 고통받는다. 그가 마음속 소리를 좇을수록 부모와의 갈등은 격화되고, 백인인 연인과 친구들이 건네는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나가기 나름"이라는 위로의 말은 그저 공허하게 흩어진다. "좋은 의도와 분명한 대화로 모든 상처를 덮을 수 없는" 문화권에 속한 것이 한스럽지만, 그 모든 것을 은근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결정권이라는 이상"과 미국식 낙관주의에도 넌더리가 난다.

    무수한 상처를 딛고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케이시와 동생 티나, 그리고 케이시가 언제나 동경해온 친구 엘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동시대를 견뎌내는 세 여성을 중심으로, 각양각색으로 뉴욕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시대를 생생히 기록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이민진 작가가 구상한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의 첫 번째 책이다. 작가는 현재 3부작의 두 번째 소설 <파친코>에 이은 마지막 작품, 한국인의 교육열과 세계의 한국 학원을 소재로 한 <아메리칸 학원>을 집필 중에 있다.

  • 절연
    정세랑, 무라타 사야카, 알피안 사아트, 하오징팡, 위왓 럿위왓웡사, 홍라이추, 라샴자, 응우옌 응옥 뚜, 롄밍웨이 (지은이), 홍은주 (옮긴이)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정세랑 기획, 아시아 젊은 작가들이 마주한 절연"

    이 작품집은 소설가 정세랑의 기획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과 문학 안에서 교류하며 “우정의 범위를 살짝 더 넓혀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꿈이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아의 작가들이 머문 자리는 '절연'이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 각자의 방식으로 끊어진 실타래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점이 묘하다. 한때는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믿던 작가 정세랑은 "회복도 치유도 불가능한, 분열과 파멸만 남는 갈등도 있겠구나 인식"(401쪽)하게 되었다고 무라타 사야카와의 대담에서 밝히기도 했다. 긴 팬데믹과 갈등사회의 골과 비트코인 광풍과 마주하며 팬데믹 시대에 '손절'이라는 단어가 대중화된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 몇 년간을 뒤돌아보니 오래 알았던 사람들, 좋아했던 사람들, 따랐던 사람들과도 헤어지는 시기"(390쪽)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 건 꼭 작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편의점 인간>으로 익숙한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와(엄마-딸의 관계가, 모든 연결이 '무'가 되는 절연 이야기를 썼다.) <고독 깊은 곳>으로 휴고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하오징팡(오직 긍정적인 감정만을 품어야 해서 자신의 감정과 절연하는 '긍정 도시'를 상상한다.) 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싱가포르에서 무슬림으로 사는 소수자인 작가 알피안 사아트의 '마이너 필링스'와 대도시 베이징에서 라사(티베트 자치구)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한 티베트인 고학력 저임금 노동자의 마음을 따라잡는 라샴자의 소설 등이 무척 새롭다. 이 소설집으로 더 많은 아시아 작가를 번역물로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보며, 끊어짐을 말하는 이 소설들로 인해 이루어질 새로운 만남을 고대해 본다.

  • 엉뚱한 기자 김방구
    주봄 (지은이), 한승무 (그림) | 비룡소 | 2022년 11월 "제1회 리틀 스토리킹 수상작"

    나, 김방구... 아니 김병구. 최고로 유익한 신문 '병구일보'를 만들고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내가 방구로 불리게 된 이유는... 실수로 이름을 잘못 말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주 강력한 방귀를 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귀로 달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힘으로 더 멋진 병구일보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다만 내 목에 살고 있는 두꺼비를 먼저 취재하고 나서!

    저학년 어린이 독자들이 직접 선정한 <엉뚱한 기자 김방구>는 당연하게도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방귀, 트름 같은 소재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과 유머를 제공한다. 발표 공포증을 목에 살고 있는 두꺼비로 비유하여 공감표까지 얻어낸다. 독자들은 방구, 아니 병구의 기자 생활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 기대되는 리틀 스토리킹 1회 수상작.

  •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리 매킨타이어 (지은이), 노윤기 (옮긴이)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1월 "혼돈의 시대.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덜컹대면서 나마 이어지던 대화를 일순간 멈추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퇴장하게 만드는 말들이 있다. "기후 위기는 거짓이다.", "여성이 구조적 약자라는 데이터들은 모두 조작이다",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잠시 어리둥절해지며 농담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곧이어 상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지금이 비극의 타이밍임을 깨닫는다. 우리에겐 최소한의 상식 체계가 다른 타인과 대화를 이어나갈 만한 의지도 이유도 없다.

    이 책의 제목이 끌린다면, 상식의 토대가 다른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으로 대화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 대단한 일을 실제로 해낸다. 그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평평한 지구 국제 학회"에 참석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고, 논쟁하고, 이들의 삶을 듣는다. 그의 도전은 이어지는데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친환경 에너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석탄 광부들과 만나고, GMO를 불신하는 오랜 친구들과도 논쟁한다.

    상상만 해도 녹초가 되는 이 험난한 도전을 통해 저자가 알아낸 것은 뭘까? 그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들의 입장을 존중하며 따뜻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잘못된 정보를 교정해 주려는 노력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그렇게 해서 과학 부정론자들의 생각을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대화를 그만두지 않을 의지도 이유도 충분하다. 책엔 이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이 재미나게 담겨있다. 인류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잃고 싶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