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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 속의 한 장면. 옆집과 우리집 사이엔 어림잡아 삼천 평은 되는 것 같은 무성한 옥수수밭이 있다. 이웃과의 거리는 그 옥수수밭의 면적만큼 멀다. 옥황상제를 모셔야 한다는 전도사와 이런 골짜기 외딴집은 위험성 측면에서 단독주택이 아니라 길거리로 보는 편이 낫다고 비싼 가격의 보안 용품 설치를 권유하는 보안 업체 직원들이 가끔 이 집을 찾는다. "아아악." (<어쩌면 스무 번> 20쪽) 고즈넉한 교외의 풍경을 깨트리는, 느닷없이 내질러진 비명처럼 그렇게 서스펜스는 존재한다. 조금 더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은 편혜영이라는 숲의 풍경. <홀>로 셜리잭슨상을 수상하기도 한 편혜영의 여섯번째 소설집.
정교하고 경제적인 문장은 한 단락만으로도 우리를 그 숲으로 초대한다. "어찌보면 나는 줄곧 그런 사람한테 끌렸던 것 같아요.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 지금의 삶이 힘들어서 다른 삶으로 건너가려는 사람들." (소설가 손보미와의 인터뷰 <어쩌면, 편혜영> 中) 이라고 말하는 작가 편혜영은 부정하고 불의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린 후 '시골' 같은 낯선 곳에서 또 다시 삶을 세우려는 사람들을 선택해 그들의 앞에 갈림길을 내민다. 각 단편이 마무리되는 순간, 그 가차없는 마지막 문장 이후 남은 뒷맛을 바로 보내기가 아쉬워 몇 번이나 쉬어가며 소설집을 아껴 읽었다. 그들의 삶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제 편혜영의 서스펜스는 죽음의 공포가 아닌 삶의 영속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지독한 그 일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