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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 김인숙이 '소현'을 썼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운명'이다. 소현세자가 아무리 조선을 사랑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중자애하고 머리를 굴려도, 그가 조선에 돌아온지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욕망뿐이다." 이미 정해진 역사가 압도적 서사로 작용하는 이 소설은, 따라서 장면과 인물에 집중한다.
적의 땅에 끌려가 9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적의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세자. 그는 그저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침묵하고, 살아남기 위해 말을 고르고, 주변인에 대한 애정도 덮어둔 채 "다만 조선의 앞날을 생각한다." 세자뿐이 아니다. 권력의 정점에 선 구왕 도르곤도, 조선의 노비였다 청의 역관이 된 만상 역시도 오직 살아남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긴 자도 진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결국 모두 죽는다. 살기 위해 생각하고, 살기 위해 남을 해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들을 시간은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세월이 흔히 강물이나 바람에 비유되는 것은 그것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 김인숙은 그 세월의 한 자락, 역사의 한 장면을 잡아내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 환멸과 두려움을 그려낸 것이다.
하여 작가가 빚어낸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선하고 모두 고독하다.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앞에 인간은 지워지고 역할과 목숨만 남아, 이야기는 그저 쓸쓸하다. 수년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돌아눕는 아비-아니 임금의 모습처럼, 내어 말하지 못한 것들과 쓰지 못한 세상의 모든 말들이 소설 속에 가득하여 읽고 나면 다만 가슴이 먹먹하다.
정밀한 문장과 세심한 심리묘사, 말로 붙잡기 어려운 아득한 슬픔과 고독의 정서를 온전히 담아낸 작가의 언어가 돋보인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위로할 수도 대신 변명할 수도 없으므로, 그의 삶과 죽음을 있는 힘을 다해 이해할 뿐"이었다 고백한 작가의 말처럼, 홀로 운명과 마주했던 한 인간의 고독한 내면에 접근함에 있어 작가의 정성과 노력에 부족함이 없다. '소현'을 다룬 여러 역사소설 중, 근래 보기 드물게 잘 씌여진 수작. - 박하영(201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