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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023
  • 올빼미 기사
    크리스토퍼 데니스 (지은이), 노은정 (옮긴이) | 비룡소 | 2023년 4월 "꼬마 올빼미의 '진짜 기사' 되기 대작전"

    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어떤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론 내가 처음 '꿈', 아니 적어도 '뭐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을 한건 취준생 때 이력서에 적은'좋은 아빠'였던 것 같다. 어느 누군가는 꿈은 무엇인가 되고 싶고, 스스로가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스스로의 꿈은 아직 찾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첫 번째 꿈은 '좋은 아빠'이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나의 꿈을 생각해 본다.

    알을 깨고 나온 그날부터 줄곧 올빼미의 꿈은 하나, 바로 기사가 되는 것!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기사가 되는 상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무시무시한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기사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기사 학교에서는 기사를 모집하게 된다. 올빼미는 지원서를 내어 기사 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열심히 수련하여 마침내 기사의 꿈을 이루게 된다. 주어진 업무는 '밤에 성벽 지키기', 올빼미 기사에겐 딱 알맞은 일이다. 어느 깊은 밤, 평소와 같이 성벽을 지키는 올빼미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데...과연 올빼미 기사는 성벽을 지켜내고 진짜 기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올빼미 기사>는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랑스런 꼬마 올빼미를 유쾌하고 코믹하게 그려낸 그림책이다. 주인공 올빼미는 '기사의 꿈'을 향한 매일매일의 상상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를 명확히 하며 하루하루 노력한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친구가 많은 기사'. 위험에 봉착했을 때, 두렵지만 용감하고 지혜롭게 평소 자기가 꿈꾸는 모습으로써 위기를 돌파한다. 꼬마 올빼미처럼 우리 아이들도 꿈을 꾸고 그 찬란한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어린이날을 맞이하길 바라본다. 2023 칼데콧 명예상 수상작.

  • 이끼숲
    천선란 (지은이)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유별난 슬픔으로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나태함과 무기력함, 게으름과 우울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143쪽)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가 있다. 풍요로운 지상이 절멸한 이후 지하 도시로 추방된 인류는 지상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위해 효율적으로 노동하며 세계를 위해 복무한다. 평정을 유지하며 노동하기 위해 약물을 섭취하고, 열등하게도 감정을 느끼는 인간은 정신재활원에 가서 갱생해야 한다. '네'가 사라지면 너의 클론이 너의 쓸모를 대신하면 되는 세계. 이 세계에서 슬픔은 유별난 것으로 취급된다. "다 유별나게 억울하고 슬프면 도대체 일은 누가 해?"(231쪽) 이 건조한 대사들에 마음을 다친다면, 아직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있다.

    <천 개의 파랑>에서 <랑과 나의 사막>까지, 사라지고 부서진 존재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로 독자의 손을 잡아온 천선란의 연작 소설. 지하 도시의 여섯 친구들의 이야기를 엮어 사랑과 우정, 애도와 환대라는 낱말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인생의 역사>에 신형철이 인용한 대로,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은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난 것으로 헤아려야 마땅하다. '너'는 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대행자로 대체될 수 없다고, 너만의 고유함이 있는 너는 'T7-033구역 지반 붕괴로 노동자 한 명 사망'(230쪽)이라는 건조한 문장에 갇힐 수 없다고 외치는 목소리. 가장 낮은 곳에서, 축축한 틈 곳곳에서 멸종되지 않고 머무르는 이끼들처럼 존재하는 마음이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그 유별난 슬픔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비효율적인 마음들이 서로를 구할 것이다.

  •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최인아 (지은이) | 해냄 | 2023년 4월 "애쓰고 애쓴 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수십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됐다고 합시다. 더 이상 생계나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일을 계속하실까요, 아니면 그만두실까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질문이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선택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소위 ‘파이어족’이 되어 경제적 자유를 기반으로 한 빠른 은퇴 후 여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보통의 사람들에게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빨리 돈 벌고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겠다는 사람에게, 일은 과연 무엇인가?

    ‘애쓰지 말고 열심히 하지 말자’는 주장이 대세가 된 시대다. 30여 년간 크리에이티브의 최전선인 광고업계에서 자기만의 색깔로 인정받고 성과를 냈던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첫 일터에서 스스로 물러나 8년째 자신의 이름을 딴 ‘최인아 책방’을 운영하는 지금까지 그의 관심은 일에 대한 의미와 태도, ‘왜 일하는가’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맞닿아 있다. 저자의 결론은 결국 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희소하고도 귀한 자원이었고, 시간을 대하는 맞춤한 태도는 결국 ‘열심’이라는 것이었다. 자칫 ‘꼰대같이’ 들릴까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세상에 맞추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곧 자기답게 사는 일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일에 대한 질문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은이), 서제인 (옮긴이),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죽은 약자는 영웅이 된다"

    타인을 영웅으로 숭배하는 일은 훨씬 쉽다. 나의 너저분한 속내를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현실을 바꾸는 일에 비해. 그래서 더 이상의 "과격한" 요구를 할 수 없는 죽은 소수자들은 자주 영웅이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하나도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그토록 신경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저자는 열두 편의 논픽션을 통해 지배 문화가 유대인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살아있는 유대인에게서 죽은 유대인만 보기를 원하는 분위기에 대해, 유대인이 특정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만을 바라는 문화에 대해, 분노를 담아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소수자에 대한 미묘한 혐오의 작동 방식에 대해 지적이고 풍성한 글들이 이어진다. 정희진이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지배 문화가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고전이 될 만한 작품"이라며 추천했다.

5.92023
  •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지은이), 김하현 (옮긴이) | 어크로스 | 2023년 4월 "당신의 집중력, 안녕한가요"

    수험생 땐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니며 집중해서 공부한 시간만 재기도 했다. 딴 생각이 들거나 멍해질 땐 주저 없이 STOP을 눌렀다. 매일 잠들기 전 워치에 기록된 시간을 보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하루 집중 시간이 궁금하지 않다. 사실 적극적으로 모르고 싶다. 시계로 재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지난 세월 동안 내게 있던 집중력을 탈탈 털렸음이... 마주하기 두려운 진실이다.

    저자는 현대인의 집중력 도둑을 찾아 나서는 사냥꾼을 자처한다.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몰입을 되찾아보고, 세계의 전문과들과 인터뷰를 통해 무엇이 우리의 집중력을 해치는지 연구한다. 그는 집중력 도둑을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들'과 '너무 적어서 문제인 것들'로 나눈다. 전자는 멀티태스킹, 테크 기업의 감시와 조작, 과각성 상태 등이고 후자는 수면 시간, 소설 읽기, 영양가 있는 음식 등이다. 그가 문제를 하나하나 밝혀내고 근거를 들 때마다 눈이 번쩍번쩍 뜨인다. '이게 바로 내 얘기다!' 싶다.

    집중력의 위기가 곧 재앙인 이유와 집중력을 훔쳐 가는 도둑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책은 우리의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향한다. 저자의 제안은 대담하게 사회 전체의 구조를 저격한다. "주 4일제가 필요하다." 맥락 없이 들으면 의아한 해결책이지만 책을 집중력 있게 읽었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이 놀라운 결론을 함께 주장하기 위해, 쇼츠와 톡과 타임라인에 중독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메피스토
    루리 (지은이) | 비룡소 | 2023년 4월 "루리 작가 신작, 우리가 새로 그린 하루들"

    여기 떠돌이 개의 모습을 한 악마가 있다. 그리고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소녀. 기댈 곳 없던 두 존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소원 한 번 이뤄진 적 없는" 소녀와 "별 볼 일 없는 악마" 검은 개는 지루한 하루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보낸다. 어쩌면 지루하기보다 끔찍했을 하루들. 둘만의 못된 짓은 그런 매일매일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준다. 소녀가 나이가 들어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기 전까지.

    전작 <긴긴밤>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로 많은 사랑을 받은 루리 작가의 최신작인 <메피스토>는 독자들의 기다림을 단번에 녹여주기에 충분하다. 단단한 스토리와 그림책-그래픽노블을 넘나드는 형식은 이야기의 힘을 사랑하는 독자와 그림책의 함축적인 형식을 탐하는 독자 모두에게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그들만의 이야기로 새로 꾸린 하루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 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은이) | 문학동네 | 2023년 5월 "각각의 계절을 위한 각각의 힘을"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사슴벌레처럼 의젓한 말투로, 호젓한 밤 문답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에 등장하는 네 친구는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다. 매사에 회피하는 편이던 나(는 필연적으로 알코올 의존증을 얻었다.)와 시원시원한 리더 부영, 상냥하고 고지식한 정원과 인내심이 강하고 자신의 벽이 있던 경애. 이 서로 다른 친구들은 꼭 한번 강촌으로 충동적인 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이들은 필연적으로 '어떻게든 이렇게' 됐다.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가 이 소설의 첫 문장. 정원은 죽었고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권여선의 소설을 읽노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더듬더듬 삶의 다른 계절로 나아가봤자 그곳은 '모르는 영역'(2020년 출간된 그의 전작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의 수록작 제목이기도 하다.)이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40쪽)는 매서운 문장을 앞에 두고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77쪽) 앙앙거려도 삶은 내게 다른 것을 주지 않는다. 왜 그가 이 세상을 버렸는지, 선한 그 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왜 우리 부모는 이혼했는지, 내 친구가 무슨 이유로 나를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 각각의 계절에 걸맞은 각각의 새로운 힘을 더듬더듬 손에 쥐고, 모르면서 그저 산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가 않구나 우리는......" (114쪽) 삶의 말미에 이 정도라도 알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탄식하며.

    사슴벌레 문답을 나누던, 한때 친구일 수 있었던 네 여성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36쪽) 끄덕이며 각각의 그 계절을 또 견딜 것이다.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지독한 문장들.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고(241쪽) 이 삶에 가장 알맞은 소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권여선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 하얀 마물의 탑
    미쓰다 신조 (지은이), 민경욱 (옮긴이) | 비채 | 2023년 4월 "미쓰다 신조, 역사와 공포와 추리의 하모니"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본. 명문 대학을 다니다 징병되어 전쟁을 몸소 겪은 모토로이 하야타는 환멸에 휩싸여 있다. 한때 믿었던 모든 것이 조국의 침략 야욕이었음을 깨달았고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거대한 물음표가 되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한 하야타이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읽고 광산 노동자가 되기 위해 향한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가 출몰하는 기괴한 사건을 겪고 겨우 탈출했다.

    하야타가 두 번째로 향한 곳은 해운의 중심이자 근대화의 상징인 등대다. 그가 탄 배를 산산조각 낼 것만 같은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 기암괴석 사이 하얀 등대가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등대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달라는 하야타의 부탁에 어부는 뭔가 숨기는 듯한 표정으로 도저히 안되겠다며 여관으로 데려다준다. 신임 등대지기로서 늦지 않게 도착하고 싶은 하야타가 걸어서라도 등대로 가겠다고 하자, 어부와 여관 주인 모두 한사코 말린다. 해가 진 후에는 절대로 혼자서 숲을 통과해선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이들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하야타는 탄광에서 느낀 불길하고 꺼림칙한 예감이 되살아나는 것을 감지한다. 미쓰다 신조가 "‘도조 겐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모토로이 하야타’를 탄생시켰다."고 말한 '방랑하는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최신간. 철저한 고증으로 생생하게 재탄생한 역사와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 치밀하게 쌓아 올린 추리의 하모니에 몸을 맡겨보자.

5.122023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김상욱 (지은이) | 바다출판사 | 2023년 5월 "물리학자 김상욱 5년 만의 신작"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물리학자가 되길 꿈꿨던 소년이 있었다. 뜻대로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게 된 그는 한때 스스로를 '물리제국주의자'라 여겼다. 물리학만 이해하면 세상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물리학자가 된 그가 무수한 연구의 세월 끝에 도달한 결론은 그 반대편을 향했고, 그것이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물리는 인간적이지 않기에 인간을 배제해야 물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작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본뜬 이 책의 제목에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저자 김상욱의 마음이 담겨있다. '하늘'에는 우주와 법칙을, '바람'에는 시간과 공간을, '별'에는 물질과 에너지를 담았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더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모든 주제를 함축하고자 했다. 원자에서부터 출발해, 원자가 별, 지구, 생명, 그리고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경계를 넘은 물리학자의 좌충우돌 여행기이자,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한 지도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 탄생했다.

  • 열세 살의 걷기 클럽
    김혜정 (지은이), 김연제 (그림) | 사계절 | 2023년 4월 "손가락 하나의 힘처럼"

    고등학교 때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을 하염없이 걸었다. 손에는 음료수 또는 과자 봉지를 들고 짝을 이뤄 한 바퀴, 두 바퀴 걷다 보면 점심은 소화가 다 되고 5교시를 준비해야 했다. 그 시절 했던 유일한 운동이다. 이야기 속 아이들도 걷기 시작했다. 걷기 클럽에 가입한 이유도 가지각색. 운동을 위해서 걷기 클럽에 가입한 건 재희밖에 없다. 계기가 가지각색인 만큼 4명의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도 다 다르다. 아이들은 호수를 빙글빙글 돌면서 꽁꽁 숨겨두었던 마음의 상자를 조심스레 풀어낸다.

    걷기는 별 것 아닌 운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걷기 지칠 때 뒤에서 손가락 하나로 등을 밀어준 강은의 말처럼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도움이 된다." 고작 손가락 하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누가 앞서가는지가 중요한 경쟁이 아닌 함께에 초점이 맞춰진 걷기 클럽 안에서 아이들은 친구가 된다. 나아질 수 없을 줄 알았던 각자의 응어리도 서서히 녹아내린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양, 열세 살을 넘어 열네 살을 기대하게 만든다.

    <헌터걸>, <오백 년째 열다섯> 등을 집필한 김혜정 작가는 자신의 걷기 경험을 녹여내 어린이 독자에게 말을 건다. 손가락 하나의 힘처럼 작은 움직임이 꽤 많은 걸 괜찮게 만들어 줄 거라고. 오늘은 나도 힘차게 걸어볼까 한다.

  • 없음의 대명사
    오은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5월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명사를 기억해내는 일이 갈수록 쉽지가 않다. 엄마 우리 저번에 그곳 어디였지? 아 거기 사과 산 데 있잖아. 그... 대명사와 명사 사이에서 헤메며 시니피앙으로 시니피에를 맞추려 과녁을 겨누어 화살을 쏘는 우리의 말들. 5년 만에 출간된 오은의 여섯번째 시집 <없음의 대명사>는 '그' 놀이에서 시작된다. 목차 1장의 그곳 - 그것들 - 그것 - 이것. 2장의 그들 - 그 - 우리 - 너 - 나로 이어지는 시의 제목들을 훑어보면서 말이 입에 머무르는 순간, 이미 시적이다.

    11쪽에 실린 <그곳>을 구성하는 단어들. 여기저기, 이곳저곳, 이리저리, 이냥저냥, 이만저만, 이러저러, 이럭저럭, 이러쿵저러쿵, 이심전심, 울레줄레 고민과 체면과 사연과 미련이 오가는 동안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의미가 범람한다. 노래이자 장단인 시가 덜그럭거리면서 '그곳'에서 시작한 시가 '나'에게 온다. 그렇게 슬픔이 범람하다 마침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볼꼴이 사나운 것처럼'(135쪽 <나>) 웃음이 터져버리는 시. 오은처럼 소리 내어 읽는 이 순간, 볼품없고 안쓰러운 이 순간, 말이 시가 된다.

  • 디베이터
    서보현 (지은이), 정혜윤 (옮긴이) | 문학동네 | 2023년 4월 "토론이 무섭다면"

    토론은 무섭다. 내 생각을 조리 있게 정리하는 데 드는 에너지도 큰데, 나와 정반대의 신념을 가진 상대방의 확신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를 정면으로 받아낼 때는 오싹한 외로움까지 느껴야 한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역시 논쟁을 피하는 편이 효율적이라 느끼게 된다. 신념이 어긋나는 대화에서 아리송한 미소로 시간을 잠시 멈춘 뒤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며 '좋은 시간에 굳이 설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 생각하는 나는 어른스러웠나, 아님 비겁했나. 이 책을 제대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서문의 다음 문장 때문이었다. "시드니에서 보낸 유년기 몇 년 동안 나는 내 삶에서 논쟁을 몰아내고 오로지 사람들과 합의하려고 애썼다. 그 경험 덕분에 이견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맞장구만 치는 삶에는 옹색한 점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삶을 지속하려면 타협과 자기 배신을 너무 많이 해야 한다."

    재치 있는 티키타카에 끼어들 영어 실력이 없어 끄덕이는 삶을 살던 저자는 더 이상의 자기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토론을 시작했다. 여느 성공담처럼 드라마틱한 갈등과 발전 끝에 저자 서보현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 토론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을 거머쥔 디베이팅 챔피언이 되었다. 세계 최우수 토론팀인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까지 역임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배운, 공부한, 느낀 논리적 사유와 합리적 말하기의 기술을 아낌없이 펼쳐 놓는다. 무엇에 대해 말할지, 무엇을 위해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그가 내놓는 전략들은 날카롭고도 실용적이다.

    대학을 준비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크게 도움 될 것이다. 그러나 '토론이란 무엇인가', '좋은 토론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가'와 같은 스스로의 질문에 저자가 내놓은 묵직한 답변을 읽으면, 단지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들만을 위한 책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논쟁은 우리가 몸으로 싸우거나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경우와는 달리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세상과 갈등할 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게 무엇인지의 경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경계를 발견하기 전에, 우리는 사회에서 들리는 가장 큰 목소리가 내 목소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무서운 일일지도.

5.162023
  • 태양 왕 수바: 수박의 전설
    이지은 (지은이), 이지선 (북디자이너) | 웅진주니어 | 2023년 5월 "이번엔 수박의 전설이다"

    어릴 적 여름이면 우리 집은 계곡에 놀러 가곤 했는데, 계곡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바로 수박을 계곡물에 넣어 놓는 일. 역시 수박은 시원해야 제맛이다. 수박을 자르기 전에 '통통' 두드려 확인해 보는 절차도 잊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통통 두드리는 담당은 나였다. 청명한 소리가 나길 기대하면서. 여기 다른 이유로 수박을 통통 두드리는 할머니가 있다.

    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귀가가 늦은 팥 할머니. "엥, 저게 뭐여. 돼지여?" 데굴데굴 구르기 좋은 모양새로 나타난 수바는 원래 태양을 비추어 하늘나라의 생명을 보살피는 용이었다. 수바의 날개와 태양 빛을 탐내던 둘 머리 용에 의해 날개를 뺏긴 채 도망치다 할머니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수바는 자신의 날개를 찾기만 하면 '용의 보물'을 주겠다며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할머니의 뛰어난 활약으로 둘 머리 용에게서 날개를 찾은 수바는 약속대로 할머니에게 '용의 보물'을 주고 하늘로 돌아가는데... 과연 '용의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태양 왕 수바: 수박의 전설>은 이지은 작가의 전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수박'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이다. 할머니는 전작에서와 같이 여전히 인정 많고 털털하다. 새로운 캐릭터인 '수바'가 등장하는데, 작가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 듯, 귀엽고 사랑스러운 '용'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작가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맺는다. "제가 어릴 땐 수박을 통통 두드리면 100개 중 1개는 수바였어요. 여름 내내 놀다가 쌀쌀해지면 하늘로 가곤 했는데, 요즘은 아무리 수박을 두드려도 수바가 나오질 않아요. "수바야, 잘 지내니? 우리 또 만나서 '퉤퉤퉤퉤.'하고 놀자. 보고싶다."

  •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정아은 (지은이)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그는 왜 단죄받지 않았나"

    학살의 주동자. 악인으로 살다가 악인으로 죽었다. 한 번의 사과 없이 윤택한 노후를 보냈다. 죽고 나서도 논란은 이어진다. 단죄 받지 않은 학살자, 학살자를 찬양하는 세력, 고통받는 피해자, 사죄하는 손주... 이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때에 가장 적절한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인간 전두환을 뜯어본다. 그는 어떤 인간형이었나. 어떤 영광과 모순을 가졌나. 그의 악함은 어떤 배경과 만나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을 탄생시켰나. 책은 영광, 모순, 몰락, 그리고 악의 기원이라는 네 가지 큰 틀로 나누어 전두환을 분석하고 한국 정치사의 맥락을 짚어본다. 촘촘한 고증과 깔끔한 정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펼친 책장이 잘 넘어가도록 돕는다.

    저자 정아은은 "제대로 규정되지 않은 '악'은 물리적 생명력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남아 현재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악의 영향력을 끊는 첫 단계를 그는 악인의 모습을 샅샅이 살펴,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박힌 그의 파편을 인식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목적을 매 문장 유념하며 읽어보길 권한다.

  • 암컷들
    루시 쿡 (지은이), 조은영 (옮긴이), 이지선 (북디자이너)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암컷은 어떻게 생존을 위한 투사로 살아가는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제자로 동물학을 전공하던 루시 쿡은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다.", "암컷은 수줍음이 많다.", "수컷은 효율성과 적극성을, 암컷은 수동성을 상징한다." 등의 문장이 도킨스와 다윈, 아리스토텔레스 등 진화론의 경전으로 통하는 책에서 출몰하자 거대한 의문을 마주한다. 쿡은 이를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당대 진화생물학의 한계로 보고, 학계를 떠나 편견 없는 자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이겠다는 신념으로 영국의 대표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제작자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그가 마다가스카르섬의 정글, 케냐의 평원, 하와이와 캐나다의 바다 등 세계 각지에서 직접 만난 동물들은 연구실의 책 속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암컷 알바트로스 커플, 늙은 암컷이 사냥 집단을 이끄는 범고래 사회, 수컷을 지배하는 여우원숭이 암컷, 수컷의 도움 없이 오직 복제만으로 번식하는 도마뱀을 비롯해, 개방적이고 경쟁심이 강하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이었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생존을 위한 투사로 살아가는 암컷들의 초상은 너무도 생생하고 다채로웠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이분법, 모성 본능이라는 신화, 가부장적 편견을 깨뜨리며 프린스턴대학교,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등 세계 주요 대학의 교재로 선정되었다.

  •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크리스 밀러 (지은이), 노정태 (옮긴이) | 부키 | 2023년 5월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는 누구인가"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비유되곤 한다. TV,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첨단 전자기기의 필수적인 부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일본,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도체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한 경제학자는 “감자칩과 컴퓨터 칩이 뭐가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저임금 공장 노동자를 찾던 미국 기업가들이 동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에 매력을 느꼈고, 이 지역 정부와 기업은 실리콘밸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생산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그 결과 오늘날 대만에서 생산하는 칩은 매년 세계가 소비하는 새로운 연산력의 37퍼센트를 제공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두 기업은 세계 메모리 칩의 44%를 생산하고 있다. 그 어떤 산업 분야보다도 극소수 특정 지역, 특정 회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역이 바로 반도체 생산 분야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오늘날 세계 반도체 공급을 위험에 빠뜨리는 가장 심각한 지정학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이 패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면서 양국은 모두 산업과 안보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 반도체를 통제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대만, 그리고 TSMC가 있다. 대만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TSMC의 최신 반도체 제작 설비를 향한 중국의 단 한 발의 미사일 공격만으로도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자동차, 통신망 등 현대 사회의 첨단 기술 전반에 걸쳐 수천억 달러를 훌쩍 넘는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적 갈등 상황에 글로벌 경제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현시점에서, 반도체 산업의 태동부터 미·중 패권 대결, 한국과 대만, 일본, 실리콘밸리의 치열한 기술 경쟁과 미래 전략까지 반도체 산업의 70년 역사를 담아낸 논픽션 역사서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관점에서 반도체 산업과 패권전쟁을 조망하며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정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어느 쪽이 되리라 속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5.192023
  • 돈은, 너로부터다
    김종봉, 제갈현열 (지은이) | 다산북스 | 2023년 5월 "부자의 시간에 숨겨진 돈의 시스템"

    천억 자산가 인선의 강연회에서 ‘커피 한잔’ 이벤트에 당첨된 두 사람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성실하지만 손에 쥐는 돈은 적은 세차장 직원 인우와 용돈으로 코인 투자에 성공한 금수저 배상. 두 사람은 “그래서, 제게 무엇이 궁금하세요?”라는 인선의 물음에 각기 다른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의 배움이 궁금합니다.”라는 인우, 그리고 “돈을 끌어모으는 당신만의 방식”이 궁금하다는 배상. 인선과의 대화 이후 이들은 10년 동안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밀과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가 하나씩 드러난다.

    전작 <돈 공부는 처음이라>에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돈에 대한 상식을 짚어주고, <돈의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투자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김종봉, 제갈현열 저자가 이번에는 ‘돈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을 소설 형식으로 전달한다. 유튜버 김작가, 부읽남, 안대장, 전업투자자 보컬, 개그맨 황현희, 조조칼국수 김승현 대표 등 수많은 젊은 부자들이 “부자가 되기 위한 시간을 견디게 하는 책이다.”, “부의 길에서 갈피를 잃고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흙수저에서 스스로 일어난 저자의 노하우가 담겨있다.”라며 추천했다.

  • 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은이), 이운경 (옮긴이) | 황금가지 | 2023년 4월 "폐기물 더미에서 발견된 충격적인 책 한 권"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소각 예정이던 폐기물 더미에서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충격적인 책 한 권을 입수한다.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맥캔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이라는 다소 평범한 제목의 기록물에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고드윈이라는 천재 의사가 죽은 자를 뇌 이식을 통해 살려냈다는 것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이한 일화다.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그레이는 여러 도서관과 대학교의 기록 보관소를 찾아 면밀히 조사를 진행했고, 책 속 이야기가 완전히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이 문건이 다시 인쇄되어야 마땅한 '잊힌 걸작'이라 여긴 그레이는 실제 텍스트와 삽화를 원본 그대로 보존하고 책 제목만 <가여운 것들>이라고 바꾸어 출간한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찾은 기록 보관소의 다양한 문헌과, 저자 맥캔들리스의 부인이자 의학박사인 빅토리아가 남긴 강력한 비판조의 편지도 첨부했다. 이 이야기는 빅토리아의 말대로 “단연코 가장 병적인 세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존재한 모든 병적인 것들의 냄새”를 풍기는 거짓말일까, 시대의 명암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걸작일까. 판단은 <가여운 것들>을 손에 든 독자의 몫이다. 영화 '더 랍스터'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제작하고 엠마 스톤, 윌렘 데포, 마크 러팔로가 출연하는 영화로 만들어져 9월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오싹오싹 편의점
    김영진 (지은이) | 책읽는곰 | 2023년 5월 "오싹오싹 짜릿한 편의점의 마법"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19:56:57, 거래금액 2,700원, OO편의점, 잔액 47,850원' 아이 학원의 쉬는 시간인가 보다. 오늘도 어김이 없다. 아이들에게 이제 편의점은 더 이상 단순히 간식이나 문구류를 사기 위한 '가게'가 아닌 듯하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식당으로, 기다림의 장소로... 편의점은 아이들의 만남의 장소, 내 아이도 예외는 아니다. 편의점은 아이들의 '참새 방앗간'이다.

    미니몬빵을 사고 싶은 민철이, 몇 군데 편의점을 돌아다녀 보지만 매번 허탕이다. "잠깐, 저 편의점에서 미니몬빵을 파나 봐!" 민철이는 후다닥 들어가 보지만, 길게 늘어선 줄에 새치기를 하게 되고, 마지막 미니몬빵을 손에 넣는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게임 아이템을 사고 싶은 성주, 안 된다는 엄마의 말에 화가 잔뜩 나 있다. 곧 다가오는 생일, 기프트 카드를 원하지만 이 또한 엄마는 안된다고 한다. '엄마 미워!' 그때 편의점 앞에서 우연히 만 원을 줍게 되고, 성주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기프트 카드를 보는 순간 마음이 달라져 기프트 카드를 사게 되는데...
    엄마랑 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한 보영이, 편의점에서 왕꿈틀이를 사고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그때 마침 보영이 눈에 들어온 우산 하나, 집어들고 학원 앞으로 가서 엄마를 기다린다. "입구를 막고 서 있으면 어떡해! 저리 비켜!" 보영이에게 핀잔을 주는 한 아이, 그런데 얼굴이 좀 이상하다.

    세 친구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전작 <두근두근 편의점>에서 어린이들의 일상 공간중 하나인 편의점을 배경으로 어린이들의 속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던 김영진 작가가 이번엔 <오싹오싹 편의점>을 통해 어린이의 불편한 마음속 풍경을 비추는 마법을 선보인다. 위로와 치유의 힘을 발휘했던 '간식'은 이번엔 마음의 중심이 흔들린 어린이의 내면을 비추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기울어진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어린이의 등을 슬쩍 떠밀어준다. 어린이의 일상에 빛을 비추는 작가 김영진이 그리는 편의점 두 번째 이야기.

    다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19:59:07, 거래금액 3,000원, OO문구점, 잔액 44,850원' 이번엔 문구점?!

  •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지은이)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진실은 겉껍질 아래에 있다"

    알라딘 서점 인근 서울시립미술관은 최근 열린 호퍼전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연일 붐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옛 건물을 보존한 고풍스러운 건물 앞에서 관람객들은 건물 위쪽을 올려다 보며 이 미술관에서 만나게 될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한다. 높은 천장, 대리석 바닥, 주광색 조명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화이트 큐브의 권위가 있다. 그러나 김선지의 신작 <뜻밖의 미술관>의 표지를 들추면 만날 수 있는 그림인 캉탱 마시의 <추한 공작부인>처럼, 이 공간의 이면을 들추면 추악하고 불편한 이 세상의 진면모가 보인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그림 속 천문학>의 저자인 예술 칼럼니스트 김선지가 한국일보에 연재중인 '뜻밖의 미술사'가 단행본으로 독자를 만난다. 소수자에 대한 배제는 미술관에도 존재한다. 시대를 앞서간 르네상스인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릭'에 열광하며 '괴물같은 얼굴들'을 흥미 중심으로 수집했다는 것을, 남성의 육체가 우수하고 아름답다는 그리스의 미학에 탐닉한 미켈란젤로가 여성의 몸도 남성처럼 묘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 호퍼 역시 아름다움과 취약함을 모두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예술가도 결국 그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한 인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그른 것들을 살펴보며 우리 시대의 미학의 기준을 다시 세워보는 경험, 뜻밖이지만 새롭다.

5.232023
  • 불확실성의 시대
    토비아스 휘터 (지은이), 배명자 (옮긴이) | 흐름출판 | 2023년 5월 "20세기 과학의 풍경, 그 찬란한 빛과 어둠"

    1900년 유럽의 중심이 되려는 야망에 휩싸인 베를린, 막스 플랑크가 양자의 존재를 발표한다. 후대 과학사에 "양자물리학의 탄생 시간"으로 길이 남을 이 순간, 그는 양자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이 발견이 가져올 파괴력을 최초로 알아차린 것은 베른의 한 특허청 직원이었다. 박사학위 취득에 실패하고 시간강사 자리에도 탈락한 후 겨우 취직해 밥벌이에 만족하던 그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발 딛고 서 있을 단단한 땅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는 소회와 함께 그는 오래도록 간직한 자신의 이론을 봉투에 담아 물리학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가슴에 품고 출근길에 오른다.

    고전물리학이라는 단단한 벽을 깨부수고 과학의 영토를 넓혀나간 시대, 지성의 빛으로 가장 찬란한 광채를 발하다 전쟁의 참화로 가장 어둡게 저물어간 시대. 20세기의 초입을 살아간 과학자들을 비추는 이 책의 목차는 1900년의 베를린과 1903년의 파리에서 시작해 1945년의 영국에서 끝나기까지, 연도와 장소로 구성되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당대 과학자들이 남긴 편지, 메모, 논문, 저서 등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현대물리학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오늘의 세계에서 영원한 진리로 통하는 과학사의 위대한 개념들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의 지적 환희와 고뇌의 무게.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공감과 논쟁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과학의 토대를 쌓아나간 이들의 면면이 아름답다.

  • 우정 도둑
    유지혜 (지은이) | | 2023년 5월 "삼십 대의 이야기로 돌아온 <쉬운 천국> 유지혜 작가"

    여행자로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특유의 감각 넘치는 글로 20대 독자층을 사로잡았던 <쉬운 천국>의 유지혜 작가. 이십 대를 지나 무게감을 더한 삼십 대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작가에게 우정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유대를 넘어, 보다 넓은 세계와의 연결을 뜻한다. 이번 책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결핍을 채우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눈을 뜬 세계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이미 있는 것을 아끼고 길러내는 걸로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방향을 틀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메우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사랑보다 훨씬 오래가는,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는 우정을 선택했다. 뉴욕과 독일의 거리, 여름, 책, 여행, 친구, 욕망, 고독. 그 모든 것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경험하고 깨치며, 자기 자신을 다듬어온 시간이 빼곡히 담겨 있다. 이전 작품과는 다른 느낌의 산문들을 만나볼 수 있다.

  • 미드나잇 뮤지엄 : 파리
    박송이 (지은이) | 빅피시 | 2023년 5월 "미술관의 도시 파리에서 일주일을"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주인공은 창문을 열면 에펠탑이 보이고 택시를 타면 개선문을 지날 수 있는 도시인 파리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파티에서 그가 받은 첫 질문은 '무슨 복이 터져서 파리에 오게 됐어요?' 모퉁이를 돌면 그곳이 유적지인 파리, 즐길 것이 많은 이 도시에서 미술관으로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다면 파리의 문화해설사는 어떤 방식으로 여행할까? 저자 박송이는 '7일 간 파리의 미술관 여행을 한다면?'이라는 질문에 파리에서 그가 보낸 12년의 시간 동안 지치고 외로울 때 가장 많은 시간 보낸 공간, 작품들을 선정해 40개의 작품을 답으로 적었다.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 세계사적 의미, 기법 및 작가의 생애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관을 거닌다. 1장에서 하루를 보내기 좋은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오랑주리 미술관, 로댕 미술관 같은 큰 미술관을 소개하고 2장에서는 반나절을 보내기 좋은, 상대적으로 한적한 미술관을 소개한다. 모네를 가장 많이 소장했다는 마르모탕 미술관, 화가의 집이기도 한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전시하는 프티 팔레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등에 관해 읽으며 가보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가보지 않을 미술관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오르세에서 만나는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부터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만나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까지, 상상만으로도 파리의 밤은 짧다.

  • 미스터 체어맨
    폴 볼커, 크리스틴 하퍼 (지은이), 남민호 (옮긴이) | 글항아리 | 2023년 5월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 회고록"

    호메이니가 미국이 지지하는 이란 국왕을 몰아냈던 1979년 초 이후 석유파동과 달러화 약세로 인해 물가가 1년 만에 무려 13퍼센트나 오르는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미국을 휩쓸었다. 1979년 7월,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이던 폴 볼커는 카터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약국 처방전에 끄적인 세 가지를 말했다. “저는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밀러 의장이 유지해 온 통화정책 기조보다 더 긴축적인 기조를 지지합니다.” 대통령과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볼커는 친구들에게 “연준 의장이 될 가능성을 날려버렸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볼커는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연준 의장에 임명되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의 등장이었다.

    그는 연준 의장 취임 후 곧바로 강력한 금리 인상, 통화 공급 억제 정책으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시중금리는 21.5%라는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주택담보대출 금리 역시 18%를 상회하는 등 미국 금융 역사에서 가장 높은 금리를 기록하였다. 높은 금리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무장한 남성이 연준 건물에 난입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볼커는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위협과 저항, 그리고 경기침체 우려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이어갔고, 마침내 승리하면서 한 가지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중앙은행의 신뢰성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힘들다는 것. 강경한 전략을 철회하면 신뢰성을 읽어버리고, 더 큰 부정적 결과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 볼커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변동환율 제도로 바뀌게 되는 ‘닉슨 쇼크’ 등 지난 세기 중후반 세계 경제가 요동치던 현장 속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고록인 만큼 화자인 볼커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경제사의 주요 순간들, 경제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기획되고 실행되며 정치와 상호작용하는지,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과 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볼커의 관점 등 인플레이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지금 이 시점에 읽을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넘치는 책이다.

5.262023
  •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은이) | 문학동네 | 2023년 5월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는 마음에게"

    나아졌다는 것에 놀라는 날이 있다. 절대 회복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청신한 나뭇가지의 빛깔이 어느새 눈에 들어오는 날. 그토록 참혹한 상실을 겪고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신이 만든 찬란한 빛깔 앞에서 울고 싶어'(163쪽)지는 날이면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109쪽)라고 묻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데뷔 후 12년 만에 출간된 백수린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의 주인공 이해미는 그런 순간이면 사고로 잃은 언니에게 말을 건다. 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언니가 사망한 후 엄마와 해미, 동생 해나는 폭격 맞은 마음을 안은 채 독일에서 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법을 배운 소녀는 가족을 위해 이주 노동자로 독일에 간 친이모인 행자 이모, 자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해 떠난 마리아 이모, 첫사랑을 잊지 못한 조용한 선자 이모 같은 파독간호사들의 너른 품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가 찾던, 일기 속 첫사랑 K.H.를 추적하던 추리소설 같은 나날은 IMF로 급하게 독일을 떠나게 되며 또 잃어버렸다. 상실에 익숙해진 해미는 자신을 잘 숨기는 어른이 되었고, 이제 그 시절 아래에 감추어둔 것을 다시 만나려 한다.

    어른이 된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다시 읽으며 어린 해미가 그때는 미처 몰라봤던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루이제 린저의 문학작품부터 대학의 입시 제도 같은 지식, 상식, 규칙 같은 것들에 익숙해져일 수도 있고 삶을 소화할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늘어서일 수도 있다. 슬픔의 터널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엔 어디서부터 빛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틀림없이 미래의 빛이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아직 그 믿음을 잃지 않은 슬프고 복된 사람들에게 선자 이모가 일기에 적어두었던 루이제 린저의 문장을 함께 건네고 싶다.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 (지은이) | 마음산책 | 2023년 5월 "임경선 신작, '나다움'에 관한 이야기"

    <태도에 관하여>를 임경선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지만, <자유로울 것> <엄마와 연애할 때> 등, 다수의 에세이 작품도 놓칠 수 없다. 에두르지 않음, 담백함, 선명함.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마주하는 감각이 이번 책에도 오롯이 드러난다.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더욱 깊이, 더욱 확장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지난 몇 년간 다음 세 가지 화두에 관해 깊이 고민했다. 나이 들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조건, 지속 가능한 글쓰기를 위한 근력, 그리고 나다운 삶을 이루는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그 세 가지 주제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한 시간과 답이 담겨 있다. 관계, 일, 나이 듦, 나다움을 두고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 있다면 이 책과 함께 나아가는 걸음걸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 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은이) | 김영사 | 2023년 5월 "이적이 고른 101개의 낱말, 위트가 돋보이는 산문"

    첫 페이지부터 읽지 않아도 되는 책,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공감되는 책, 짧지만 강렬한 한 방으로 사로잡는 책. 싱어송라이터이자 타고난 이야기꾼 이적의 생애 첫 산문집이 바로 그렇다. ‘이적의 단어들’에는 인생, 스타, 홍어, 상처, 고수, 창작, 욕심, 투표, 삼시 세끼, 고스톱 총 101개의 낱말이 있다. 이적이 고른 각 낱말은 이적만의 창작의 언어와 위트가 더해져 101편의 단편들로 탄생했다.

    "그저 매일 골고루 먹고 마시고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탐닉하듯, 이것저것 듣고 보고 읽고 겪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작품의 세포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지." 책은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듣고 보고 읽고 겪은 것들을 산문이라는 창작물로 선보이는 것이다. 군더더기 없고 번쩍이는 유머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순간을 쉼 없이 만나게 된다.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은이), 허진 (옮긴이) | 다산책방 | 2023년 4월 "어느 찬란한 여름날의 추억"

    "단번에 읽어 내려간 뒤에는 이 새로운 전율을 표현할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김금희 작가의 독서 후기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정수를 펼친다."는 김보라 감독의 상찬. 그리고 "모든 문장이 문체와 감정을 어떻게 완벽하게 배치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라는 힐러리 맨틀의 추천사부터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나간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부러움 섞인 말까지. 무수한 찬사가 이 104쪽의 얇은 소설에 쏟아졌다.

    소설은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았다.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무심한 부모와 지내던 그가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진 어느 여름.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해주고, 넘어질까 걱정하며 손을 잡고 걸어주는 따뜻한 어른을 처음 만나본 소녀는 생각한다.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배려 속에서 소녀의 세상은 이제껏 없던 밝은 빛으로 채워진다. 불순물을 날리며 졸이고 또 졸인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과 여백이 자아내는 그 여름의 찬란한 풍경이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자리한다. 영화 '말없는 소녀'로 영상화되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5.302023
  • 폭탄
    오승호 (지은이), 이연승 (옮긴이)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5월 "2023 일본 미스터리 랭킹 1위 석권"

    "10시 정각. 아키하바라 쪽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술에 취해 자판기를 훼손해 인근 경찰서로 붙잡혀온 남자가 왠지 촉이 온다며 내뱉은 이 말에 귀 기울인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술이 덜 깼나?" 하는 비아냥은 10시 정각에 폭발 사고 신고가 들어오며 서늘한 공포로 변한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을 잇는다. "제 촉대로라면 지금부터 총 3회, 이다음에는 한 시간 후에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가벼운 상해 사건이었던 이 건은 금세 최우선 순위로 격상되고, 본청 형사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친다. 베테랑 형사들을 앞에 두고 남자는 선문답을 연상케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아홉 개의 꼬리'라는 퀴즈 게임을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제한 시간을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절박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 경찰. 허술한 주취자로 생각했던 남자가 "하지만 폭발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 없지 않나요?" 하며 싱글벙글거리고, 사건의 전모가 예상을 가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밝혀지며 취조실에는 오싹함이 감돈다. 이들은 폭발을 막을 수 있을까.

    "한 번 '있다'고 생각하면 '없다'고 증명될 때까지 공포에 떨어야" 하는 시한폭탄의 속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강렬한 긴박감 속에서, 인간 본성과 타인의 범위에 대한 깊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 "인간의 본성은 흑과 백이 아니라 흑색과 회색이다."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수작이다. 2023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1위, '미스터리가 읽고 싶어!' 1위를 비롯해 미스터리 랭킹을 석권하며 일본 추리소설계를 뒤흔들고 국내에서도 출간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던 <폭탄>. 그 긴박한 추리 게임으로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은이), 전미연 (옮긴이) | 열린책들 | 2023년 5월 "베르나르 베르베르, 삶과 글쓰기에 관한 자기 고백"

    창작의 원천, 상상력을 촉발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고양이의 세계를 기록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 두 권의 에세이를 선보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처음으로 자기 고백의 이야기를 펴냈다.

    첫 단편소설 「벼룩의 추억」을 쓴 유년기부터 <개미>로 데뷔한 신인 시절을 거쳐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3천만 부 판매, 35개 언어 출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어떻게 이어올 수 있었는지, 이 책에서 그 답을 찾는다. 작가는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삶이 곧 소설이고, 소설이 곧 삶이 되어온 날들과, 작가만이 지켜온 글쓰기의 비밀을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성실하게 글쓰기에 매진해온 삶의 과정이 소설처럼 유려하게 이어진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글을 쓸 힘이 있는 한, 내 책을 읽어 줄 독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 쓸 것이라 고백한다. 앞으로 진화해 나갈 그의 작품 세계가 기대된다.

  •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은이)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영감을 주는 30개의 건축물"

    건축가 유현준이 감명받거나 영감을 얻은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한다. 건축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독자들에겐 기초 교양으로 적절하여, 저자의 팬들에겐 취향의 핵심을 엿볼 기회라 반가운 책이다.

    책은 건축 기행이라는 콘셉트에 맞추어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저명한 건축물들인 만큼 완전히 낯선 이름들은 아니지만 건축가에 대한 소개와 건축 배경과 특징들에 대한 설명을 함께 읽으면 역시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유현준은 “재미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은 기분으로 이 건축물들을 소개했다고 하는데, 마음에서 우러난 추천은 실패가 없는 법이다. 이 들뜬 마음을 넘겨받아 즐겁게 읽다가 현실로 경험해 보고 싶은 건축물들의 목록을 만들어 여행을 계획해 봐도 좋겠다.

  • 인생 연구
    정지돈 (지은이) | 창비 | 2023년 5월 "비인간이 인생을 맞닥뜨린다면"

    오노레 드 발자크는 1800년대의 인간들이 자신이 처한 삶을 연기하는, 우스꽝스럽고 애처로운 풍경을 '인간 희극'이라는 세계관으로 구현했다. 2000년대의 소설가 정지돈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어딘가 뒤틀리거나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소설집 <인생 연구>를 보며 나는 어쩐지 발자크가 시도한 풍속 연구를 떠올렸다. 소설집을 여는 첫 소설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에서 주인공인 '나'는 한때 나와 같은 집에 살았던 '안젤라'와 걸으면서 그녀와 함께할 수도 있었던, 라라랜드적인 순간을 상상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피의 한 장면처럼 보편적인 일생(21쪽)은 울고 말하고 똥싸고... 등등의 풍경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같은 쪽)는 문장이 '죽음'의 이미지에 겹쳐진다. 우리는 필멸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닮아있는 것 같다고'(29쪽) 말하는 안젤라의 말이 귀에 잘 녹아드는 것은, 결국 우리 다수의 삶이 제 방식으로 뒤틀렸다는 점에서 뻔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소설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는 ChatGPT와의 '협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지돈은 자신의 소설이 '비인간적'이라는 맥락으로 읽히며 동료들 사이에서 인구(인간 구글)이라고 놀림받았던 2016년의 경험을 끌어와 2023년의 감각으로 ChatGPT에게 질문하며 소설을 창작했다. '정보와 지식의 영역에서, 재조합, 배치, 조립의 방식'으로 소설을 써온 인간 소설가와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라는 설정의 문장을 반복해 학습하며 조금 다른 버전의 문장을 뱉어내는 인공지능은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미노타우로스의 미궁과 지금 우리가 선 자리는 얼마나 다른가. 내가 맞닥뜨린 이 버전의 인생을 연기하며, 나 역시 이 소설과 함께 내 인생을 연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