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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을 다 읽고 나면 타박타박 끊어지는 여러 개의 단편을 읽었다기보다 단락별로 나뉘어진 하나의 장편을 읽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소재가 비슷하다거나 내용이 한결같다는 말은 아니다. <도마뱀>에 실린 글들은 모종의 일정한 분위기를 지니기 때문이다.
단편 모두를 하나로 몽동그리는 분위기에서 가파른 모서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삶과 투쟁하지도 않거니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대신, 이제까지 그렇게 견뎌왔던 것처럼 서로의 자리를 지키면서 흐르는 대로 맡겨두라는 것. 바나나의 글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닿아 있다.
이런 느낌은 돌연 깨달음을 얻은 한순간의 변화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자근자근한 깨알 같은 깨달음들이 모여서 마지막에 커다란 하나의 변화를 이룬다. 바나나는 산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 동굴을 뚫는 법이 없다. 산은 산대로 두고 자신은 기슭을 빙그르 돌아가는 것이다. 읽는이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고 다사롭게 감싸안을 줄 아는 필법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때로 이런 느낌들은 책읽기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일어문장의 신선함이라든지(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바나나가 가진 특유의 문체들 때문에 글이 스러지지 않고 살아난다. <키친>과 함께 아기자기한 단편의 매력을 담뿍 느낄 수 있는 책이다. - 임지호(1999-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