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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가 81세에 발표한 장편소설 <여름의 끝>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피어난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사랑은 갑작스럽게 찾아와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듯이 끝난다. 연인들 자신조차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그들 자신마저 놀래킨 만남이었다. 끝을 향해 걸어가는 사랑은 모두 슬프다. 그런데 <여름의 끝>은 결별을 향해 다가가는 와중에도 감정에 파묻히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속도를 유지한다. 이 슬프고도 담담한 산보에서 만나는 풍경은 아련함 속에서 빛난다. 시골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제된 문장으로 그려지고, 특별할 것 없었던 어느 해 여름의 풍경이 그들의 뒤에서, 위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그 해가 몇 년이냐고 묻는다면 애써 기억을 되짚어야 할 평범한 날들이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과 사람들이 평생 반복해 일구어 온 일과들은 금방 잊혀질 일들이다. 이 소설에서 피어난 작은 사랑도 그 일들에 둘러싸여 함께 망각 속으로 빠져들 듯하다. 영원을 얘기하는 순간조차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여름의 끝>은 그 사라져 갈 일들을 슬픔과 아련함 속에 머물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그게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윌리엄 트레버는 기억과 망각의 중간지대로 빠져드는 수많은 일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보통의 시간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보여준다. 종내에 삶은 거의 다 잊혀지는 것, 그러나 그 순간들은 자신들이 곧 잊혀질 것임을 알면서도 매 순간 망설임 없이 반짝인다는 것이다. 사라지지만 빛나기. 사라짐으로써 빛나기. 노년의 작가는 이렇게 삶을 찬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