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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은 목적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이 소설집이 다다르는 곳이기도 하다. 어린 개의 귀를 접었다 폈다 하는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시작점, 리듬감 있는 문장은 상황을 반복해 변주하고, 논리를 건너 뛰며 말을 이어나간다. 자신의 낭독회에 아무도 오지 않길 바라는 작가가 나 자신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었지만 내가 나를 들어 던질 수는 없어 나 대신 내 소설책을 내던질 때. (<개의 귀>) 혹은 순전히 재미로, 앞으로, 전혀 살고 싶지 않아서 혹은 너무도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겠어서 자살했거나, 아직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장차 자살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한 작가들의 작품들만 번역하는 것을 계획할 때. (<유형지 X에서>) 이 비극의 세계는 지극히 어두워서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
<어떤 작위의 세계>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정영문이 발표한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말하기가 나선이 되어 이어진다. 그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덧 독자 역시 '영영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따라서 중얼거리며, 어지럽고 복잡하고 매혹적인 산책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