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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저 절로 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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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화엄의 바다에 갈매기처럼 내려앉아
    -통도사 화엄산림법회

    복사꽃을 본 뒤로 다시는 의심치 않았다
    -송광사 인석 스님

    젊음의 분기점에서 고원의 금빛 절로
    -해인사 혜인 행자

    우리는 곧 떨어질 꽃처럼 살고 있다
    -상좌 성안을 범패로 떠나보낸 동주 스님

    너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화운사 주지 선일 스님

    붓은 고기같이 걸림이 없고
    -통도사 불모 송천 스님

    해인사는 액션이다
    -해인사 학인 스님들의 하안거

    자연이 절이다
    -몽골 유목민들

    우주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재가 불자 자연과학자 박문호

    절망적으로 갈구한다면 깨달음을 얻으리
    -화공 스님

    두 스님 사이에 피어난 법연의 만다라
    -덕민 스님과 종표 스님

    산문에 들어서면 소나무가 늘어선 오솔길이 시야에 다가선다. 개울을 끼고 차도와 인도로 갈라지는데 무풍한송림舞風寒松林이란 푯말이 서 있다. 통도사의 팔경 중 첫 번째라는 "휘몰아치는 겨울 눈바람을 맞는 찬 소나무"를 가리킨다. 장엄한 겨울 풍경을 상상하며 눈 오는 날 다시 이 길을 걸으리라. 강원 공부를 마치고 떠난 스님들도 이 소나무 길을 그리워한다지.
    (/ p.23)

    화엄산림법회에 영가를 청했다. 동생 은경과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최인호 선생과 지인의 위패까지 함께 올렸다. 글로 자신을 소진시키고 원대로 원고지 위에 못 박혀 스러진 작가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둠의 포대기에 질식해 서둘러 이승을 떠났지만 결벽한 흰 뼈로 우리가 죄인임을 가르쳐준 동생 무거운 생의 짐을 바둑판 위에서 조용히 풀려 했던 아버지 이들은 벌써 땅의 매듭을 풀고 하늘에서 안식하고 있을 테지만 화엄의 바다에 갈매기처럼 잠시 내려앉아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여타의 경전들이 산이라면 온갖 산들이 수미봉을 향해 붙어 있는 것과 같고 수만 갈래 강이라면 그 강이 흘러드는 바다와 같다는 대방광불화엄경에.
    (/ p.23)

    금빛 절의 품으로 들어서면 다른 세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신성한 숲’ 사찰 산책


    저자는 한 절기를 보내는 의식처럼 때가 되면 ‘내 마음의 절’로 향한다. 먼저 통도사에 간다. 아만我慢의 산을 무너뜨리고 공덕의 숲을 키운다는 뜻의 화엄산림법회에서 덩실덩실 어깨춤 추며 송년 의식을 치르고 동지에는 팥죽 새알심을 빚으러 조계산 송광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송광사의 장엄한 예불은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열락의 광경"을 보여준다. 흐트러짐 없는 기강에서 나오는 유장한 리듬을 듣기 위해 저자는 깜깜한 새벽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저 절로 간다.
    ‘빛나는 구름’ 화운사에서 깨달음의 꽃비를 맞으며 환희심을 느끼고 해인사 앞자락 홍류동 계곡에서 세속을 등진 최치원의 시를 읊는다. 그러고 나서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판전으로 간다. 춘분과 추분 오후 3시쯤 장경판전의 통로에는 연꽃 그림자가 나타나는데 1년에 두 시기 햇빛이 연꽃을 피우는 장경판전은 불교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저자는 부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엿보며 불성을 상징하는 연꽃을 응시한다.
    그리고 저자가 매료되어 "연을 맺은 땅" 경주 불국사에서 "법연의 만다라를 화폭에 그려보고 싶다"며 새해를 맞이한다.

    캄캄한 한밤에 천지를 흔들듯 울리던 법고 소리 태양처럼 존엄하나 자비의 눈길로 굽어보는 부처님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수없이 엎드려 지고한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과 세속에서 박차 오르는 듯한 염불 소리는 환희심을 주었고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열락의 광경은 그날부터 내 의식에 붙박였다.
    (/ '책머리에' 중에서)

    관람객이 빠져나가면 판전은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텅 빈 충만이라고 할까 성안 스님은 진정 가득 참을 느끼는 고요의 시간을 사랑했다. 3년 전 겨울에 보름달이 판전에 비치는 것을 촬영한다고 하여 늦은 저녁과 새벽 예불 후 판전에 있었다. 보름달이 살창을 통하여 판전 바닥을 비출 때 낮과 다른 묘한 느낌이었다. 고려의 달빛 같았다. 경판 한 장을 새길 때마다 합장했다는 고려인들의 불심이 비추이는 것 같았다. 법보전의 통로를 걷다 보면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 헌신한 선조들의 숨결과 에너지가 판전을 에워 감싸는 것 같았다.
    (/ p.101)

    깨달음과 진리에 대한 갈망 고요의 시간
    명징한 언어로 탐색하는 삶의 고苦


    새하얀 눈 덮인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절로 온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말씀하신 정우 스님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앉아서 팔리어로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던 선일 스님 서호주 탐사 사이사이 법성게를 강연하는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 자연을 절 삼은 몽골 유목민들까지.... 저자가 책에 담은 성과 속을 넘나드는 인연은 "상처와 번뇌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을 차분히 말한다. "부처님은 고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셨다. 범부들에게 고는 인생의 영원한 숙제 같다." 투명한 문장에 담긴 본질을 통렬하게 꿰뚫는 시선은 "회한도 기쁨도 다 무상無常으로 돌아보게" 한다.
    새벽 2시 50분 기상. 2시 56분 30초까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장삼에 가사를 걸친다. 3시 정각에 "기러기가 외줄로 날아가듯" 법당을 향한다. 새벽 별을 보며 일어나 분초까지 나누어 긴장 속에 생활하는 해인사 학인 스님들의 치열한 여름. "법당에 울리는 힘찬 게송을 들으며 해인사를 에워싼 산릉선을 바라보니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저자는 이 여름에도 "해인총림의 꽃이 무더위 속에서 만개할 것"을 기대하며 해인사를 나선다.
    수행과 믿음 등 본연의 삶이 녹아든 불화를 그리는 통도사의 불모 송천 스님. 스님은 17년의 세월 동안 476개 사찰과 14개 박물관에 소장된 불화 3156점을 직접 찍고 책에 담은 50억 원이 투입된 큰 사업 [한국의 불화] 40권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예술가의 눈으로 장대한 작업을 바라보고 그림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송천 스님의 열정과 불심에 두 손 모아 합장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가장 가슴 아파한 만남은 상좌 성안을 먼저 떠나보낸 동주 스님의 이야기다. 동주 스님은 장엄한 범패 의식과 절절한 초혼의 소리로 상좌를 부처님 품에 보냈다. 저자는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픔을 느끼며 확인하는 건 사랑이고 유한한 삶에 대한 연민이며 자비"라며 성안 스님을 기리는 숙연한 마음을 담았다.
    저자는 가슴 한 모퉁이에 향수鄕愁 같은 환희를 준 새벽 도량에 울리는 독경 소리를 들으며 세속에 내려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하산해야 하리." 너무나 다양한 이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절은 그야말로 "승이되 승을 사절하고 속이되 속을 넘어선" 절묘한 차원이다.

    장삼에 가사를 걸친 스님이 법고 한가운데 서서 천지를 진동시키듯 북채로 두드리고 두 팔을 뻗어 원을 그리듯 가장자리를 쳐 내려가는 모습이 자유자재했다. 겨울 추위에도 장삼 자락을 날리며 좌우상하로 북채를 놀리는 모습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 p.161)

    부모가 돌아가실 때도 울지 않았지만 우리 스님이 돌아가실 땐 울었어요. 나고 죽음이 없으니 무상하다는 건 알지만 정이란 게 고약스러워. 이치는 알지만 상좌를 떠나보내니 육신을 가진 마음이 미어져요. 논리적으론 불생불멸이나 가슴이 아프고 허전한 정.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도 산천초목이 울었고 오백아라한이 슬피 울었어요. 이치만 알아서는 냉혈이 돼요. 이치도 알고 감정이 풍부해야 자비가 생겨요.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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