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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흩어진 구슬 꿰기 _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와 후지쓰카 구장서 목록 후지쓰카 구장서의 형태적 특징 | 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 | 분큐도 도서 목록과 일본출판무역주식회사 스티커 | 후지쓰카 구장서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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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미완의 꿈 문예공화국 _에필로그 후손 찾기 | 기록이 있었다 | 접점에서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 | 문화는 선이다
주
만남이 만남을 낳고 책이 책을 부르던 아름다운 문예공화국의 시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18세기 동아시아 지성계의 찬란한 문화지도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의 여섯번째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13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총 40회에 걸쳐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서 진행되었던 연재의 결과물이다. 열정적인 자료 탐구와 남다른 지식 생산력을 통해 펴내는 책마다 화제를 모으는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2012년 8월부터 1년간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 옌칭도서관 선본실에서 20세기 초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1879~1948)의 구장(舊藏) 도서를 다수 발견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자로서 자신이 소장하던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까지 찾아와 100일 가까이 머물며 양도를 간청하던 소전(素) 손재형(孫在馨)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준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청조의 고증학단에 대해 연구하던 중 청조 지식인들과 교유했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 청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를 평생 연구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전후 일본에서 생계를 위해 선친이 중국과 조선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수집한 책들을 적잖이 처분했고 그 책들의 일부가 우여곡절 끝에 하버드 옌칭도서관으로 흘러들어왔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2006년 타계 직전 후지쓰카 지카시가 소장했던 추사 관련 자료 1만 4000여 점을 과천시에 일괄 기증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60여 년 동안 옌칭도서관 선본실 서가에 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정민 교수는 그곳에서 우연히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한 권의 책을 만난 것을 계기로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본격적으로 그의 컬렉션 발굴에 뛰어들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청조 문화의 조선 전래(傳來)를 연구했던 후지쓰카의 컬렉션을 통해 세밀하게 복원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사다.
문예공화국 상상 속의 지적 커뮤니티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의 지식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문학자들이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매개로 편지와 책을 통해 소통하던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의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예공화국 안에서 글이 오가며 지식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싹텄고 이는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공통 문어는 고전 중국어 즉 한문이었다. 집적 만나서는 필담을 떨어져 있을 때는 편지로써 한중일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리고 18세기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의 중심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행사와 통신사로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 지식인 그룹과 소통하며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갔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한중 지식인 네트워크의 시초를 연 사람은 바로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이다.
홍대용 문예공화국의 초석을 놓다
홍대용이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에 간 것은 1765년의 일이다. 그가 그곳에서 한족 지식인인 엄성(嚴誠 1732~1767) 육비(陸飛 1719~?) 반정균(潘庭筠 1742~?)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은 유명한 일화는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홍대용과 엄성의 우정은 엄성이 홍대용과 만나고 불과 몇 년 후 풍토병에 걸려 홍대용이 선물한 먹을 가슴에 품고 그 향을 맡으며 죽었다고 하여 무척 유명하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 지카시가 자신의 전용 원고지에 베껴 쓴 엄성의 [철교전집鐵橋全集]과 엄성 육비 반정균 세 사람의 향시(鄕試) 답안지를 따로 모아 묶은 [절강향시주권浙江試卷]을 우연히 발견하며 조선과 청조 지식인의 교류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홍대용은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연행 기록은 [담헌일기湛軒日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항전척독抗傳尺讀] 등 이른바 ‘연행 3부작’으로 남았다. 홍대용이 연행에서 돌아와 내놓은 연행 기록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덕무 박제가 등 연암 그룹의 후배들은 홍대용이 북경에서 그곳 문인들과 천애지기를 맺고 돌아온 일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언젠가 중국의 지식인들과 만나 역량을 펼쳐 보이고 그들과 우정을 맺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엄연한 국시(國是)는 북벌(北伐)이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청나라에 대한 조선 주류 지식인들의 반감은 청이 들어선 지 100년 넘은 당시에도 여전히 완고했다. 홍대용이 선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빡빡머리’ 한족 거인(擧人)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글로 써내기까지 한 데 대해 노장 학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홍대용은 특히 스승 김원행(金元行)의 동문인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날선 비판을 받아야 했다. 김종후는 청나라를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이라 일컬으며 애초부터 홍대용의 연행을 반대했었다. 홍대용은 망한 지 100년이 넘은 명에 대한 의리를 들어 새로운 왕조를 더러운 원수라 배척하는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에 숨막혀했다. 그는 청조의 한족 지식인들이 "도량이 넓고 기운이 시원스러워" 자신은 그들과 사귄 일이 부끄럽지 않으며 더구나 청은 100년간 태평을 누리고 있다며 김종후의 예봉에 맞섰다. 논쟁은 도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주위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김종후와 홍대용 두 사람은 끝내 상대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대용의 이러한 의지는 박제가 등에게로 이어지며 북학(北學)의 기틀이 되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 퍼져나가는 만남
1776년 11월 유금(柳琴 1741~1788)이 연행길에 올랐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네 사람의 시를 모은 [건연집巾衍集]을 들고 나섰다. 이들은 연암 그룹의 문인들로 ‘백탑시파(白塔詩派)’로 불렸다. 북경에 도착한 유금은 청 조정의 이부원외랑 이조원(李調元 1734~1803)을 만나 [건연집]을 소개하며 서문과 비평을 부탁한다. 이조원은 홍대용이 우정을 맺은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고 두 사람은 기꺼이 조선 문인 네 사람의 시집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각각의 시에 정성껏 비평을 써주었다. 그런데 유금이 이조원에게 접근해 만남을 가졌던 데에는 [건연집] 건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5020책을 입수해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조원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흠정고금도서집성] 거질을 조선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유금이 [건연집]에 이조원과 선배 홍대용의 벗인 반정균의 비평까지 받아서 돌아오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은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의 신실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이들은 북경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조선에서 느꼈던 그동안의 소외감과 답답함을 훌훌 털고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특히 박제가는 이조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객건연집]에 평점한 말을 보니 폐부를 찌르는 합당한 말뿐이어서 곧장 넋이 연경으로 날아가 얼굴을 뵙고 향을 사른 후 큰절을 하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778년 3월 드디어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행에 오르면서 박제가와 이조원의 만남이 성사된다. 물론 그때까지 이들은 이조원 반정균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제가 문예공화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경에서 이조원의 동생 이정원(李鼎元)과 반정균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당대 북경 문단의 명류들과 연이어 만남을 가졌다. 반정균이 이덕무의 생일상을 차려주었을 만큼 이들은 무척 가깝고 깊게 교유하고 있었다.
두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이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외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감이 더욱 높아만 갔다. 특히 박제가의 경우 정도가 지나쳐 오만하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바람에 선배인 연암 박지원이 그에게 자중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1790년 박제가와 유득공은 2차 연행을 떠난다. 이 두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5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뛰어난 시와 글씨로 북경 문인들 사이에서 금세 명성을 얻었다. 박제가에게 시 한 수쯤 받지 못하고는 학계와 예단(藝壇)에 발조차 들이밀지 못할 정도였다. 두번째 세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중국의 유명 지식인들과 폭넓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말 그대로 북경의 명사가 되었다. 기윤(紀 1724~1805)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 등 청대 학술계의 거목들과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이때다. 특히 1790년 8월에는 북경에서 당대 사림의 종장(宗匠)이자 예부상서였던 기윤과 박제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윤과 박제가 유득공 두 사람의의 교류는 두 사람의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심지어 기윤은 조선 사신 편에 정조에게 편지를 보내 박제가를 "화국(華國)의 인재"라 칭찬하며 그를 다시 북경으로 파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청이 받아들여졌는지 1801년에 박제가와 유득공은 네번째 연행을 떠나 78세의 기윤과 해후한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박제가와 화가 나빙(羅聘 1733~1799)의 만남이었다. 박제가는 나빙의 대표작 [귀취도권鬼趣圖卷]에 두 차례나 제발(題跋)을 남길 만큼 그와 가깝게 지냈고 나빙 또한 박제가와 유득공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만큼 그들을 마음속 깊이 좋아했다. 이 책의 표지 그림과 글씨가 바로 나빙이 박제가를 위해 그리고 써준 초상화와 시다.
삼천 리 밖의 사람 서로 마주하여서 相對三千里外人 좋은 선비 만남 기뻐 그 모습을 그려보네. 欣逢佳士寫來 그대의 미쁜 운치 무엇에다 비할거나 愛君將何比 매화 변해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知是梅花化作身
어인 일 그댈 만나 문득 친해졌더니 何事逢君便與親 날 떠난단 말 들으니 그 얘기 시고 맵다. 忽聞別我話酸辛 이제부턴 가사(佳士) 봐도 그저 담담하리니 從今淡漠看佳士 이별 정이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일세. 唯有離情最愴神
이 초상화와 시의 원본은 후지쓰가 지카시가 소장했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개인 수장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것은 후지쓰카가 촬영해둔 유리 건판 사진이다.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실질적인 주인공 박제가는 네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뒤 대비 김씨와 심환지(沈煥之) 비방 벽보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형장을 받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5년 한양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인 4월 2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홍대용이 기틀을 다지고 박제가가 선봉에 서서 이룩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그렇게 마감되고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후지쓰카 지카시 몸으로 하는 공부
이 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인물 후지쓰카 지카시는 일본에서는 주로 우편을 통해 북경 유리창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그러다가 1921~1923년 북경 주재 해외 연구자로 파견 생활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유리창의 고서점에서 본격적으로 청대의 원간본(原刊本) 서적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북경에서 수집한 청대 원간본은 수만 권에 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지쓰카는 조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또한 당시 일본 학자들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을 빼고 나면 조선 500년 문화에는 남는 게 없다며 대놓고 조선을 무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잠시 서울에 들러 경학원(經學院)과 규장각 도서관 총독부와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 등을 둘러본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조선을 청조학의 본질로 들어가는 우주정거장과 같은 위치로 규정"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지쓰카가 194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조선에서 수집한 것은 서적 수천 권 서간 서화 탁본 1000여 점이나 된다. 그는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으로 청조 문화가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악착같이 모아나갔다. 그 가운데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은 국보급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은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 대학의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도쿄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의 자택 방공호(이 방공호는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이 만들어주고 온 것이다)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만 천행으로 살아남았다. 후지쓰카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그의 컬렉션을 한 권 한 권 발견하여 검토할 때마다 그의 방대한 독서와 꼼꼼한 메모에 감탄을 거듭했다. 후지쓰카는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몸으로 공부한 학자였다.
1년간 후지쓰카 지카시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그의 컬렉션을 통해 18세기에 우리와 중국의 지식인들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며 대를 이어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던 아름다운 광경들을 이 책에서 되살려냈다. 사방이 분쟁과 갈등뿐인 이 시대에 이 책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폭넓은 소통과 "고등한 문화 교류" 나아가 상생과 화해의 한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