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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교수의 밤 옮긴이의 말
현대 노르웨이 문학의 거장 ‘작가들의 작가’ 다그 솔스타의 역작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나라이지만 헨리크 입센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욘 포세 등 쟁쟁한 문학계의 거물들을 배출한 노르웨이의 거장 다그 솔스타 그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소설가 극작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30여 권의 책을 낸 솔스타의 작품은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북유럽의 주요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그는 노르웨이 문학비평가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아네 파르세토스는 솔스타가 "노르웨이의 필립 로스"라며 극찬한 바 있고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솔스타의 작품은 아주 기묘하면서도 매우 진지하다"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으며 그의 작품을 일본어로 직접 번역하기까지 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솔스타의 언어가 "새롭고도 고풍스러운 우아함으로 빛나며 독창성과 생동감이 넘치는 독특한 광채를 내뿜는다"면서 "이 언어는 배울 수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다"고 썼고 페터 한트케는 솔스타에게 "깊이"와 "품격"이 있다고 극찬했다. 북유럽에서 이미 ‘작가들의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그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우연히 목격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 한 남자의 치열한 존재론적 분투
[안데르센 교수의 밤]은 북유럽의 도시 오슬로에서 쉰다섯의 문학 교수 안데르센이 자택에서 홀로 크리스마스이브를 축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중년’ ‘독신’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 등의 묘사와는 달리 우울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안데르센은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의 조명을 밝히고 넓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정장까지 차려입고 손수 만든 전통 음식으로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는 중이다. 좋은 술과 음식으로 흡족해진 그는 창가에 서서 이웃의 명절 풍경을 정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느닷없이 아늑한 취중의 감상을 순식간에 증발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한 남자가 젊은 여인을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이렇게 [안데르센 교수의 밤]은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이후의 전개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는다. 살인을 목격하고도 어쩔 줄 몰라하기만 할 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안데르센 교수는 자신이 개입하지 않고도 정의가 저절로 실현되기를 기대하며 두 달이 넘도록 건너편 아파트를 감시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리라 믿었던 그 사건은 그의 삶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는 오십여 년 평생의 삶을 반추하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새해가 시작되고 일상으로 돌아가 잠시 평정을 되찾은 듯하던 안데르센 교수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연히 동네 일본 음식점에 갔다가 옆자리에 바로 그 살인자가 앉아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통성명을 한다. 살인자가 안데르센 교수에게 젓가락 사용이 능숙하지 않다고 지적하여 안데르센 교수가 마음 상해하는 우스운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들은 교수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경마장에 가자는 약속까지 잡는다. 살인자가 건너편 집으로 돌아간 후 안데르센 교수는 다시금 불안에 빠져 스스로를 해명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고민하기만 하는 그의 햄릿 같은 태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신고를 해야 했어.’ 그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신고를 했을 거야. 단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창가에 있던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지금은 죽은 여자. 왜 그 여자를 죽였을까?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실종 신고를 하지 않을까? 정말로 다시 옷을 입고 곧장 마요르스투아 경찰서로 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좀 살아났으나 그건 단지 공상에 그치고 말 것임을 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런 공상이 잠깐의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자신은 결코 실행에 옮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거라고. (/ p.170~171)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유럽 문학 거장이 던지는 통렬한 풍자
[안데르센 교수의 밤]은 200여 쪽에 남짓한 짧은 소설이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안데르센 교수라는 한 중년 남자의 좌충우돌하는 여정을 통해 솔스타는 행동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 모더니즘 문학과 예술 기억과 역사의 문제 공동체 내에서의 범죄와 처벌의 윤리 신의 존재 등의 주제들을 심오하면서도 해학적인 어조로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해 그려나간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한 인간의 기묘한 경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하며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기도 하다. 의문의 살인 사건에서 시작한 이 소설은 메마른 유머로 개인과 사회를 비평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 소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평과 통찰이라는 여러 겹의 의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자가 어떤 면에 집중해서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해지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서술자가 안데르센 교수를 보는 시선도 어떤 순간에는 통렬할 정도로 풍자적이다. 그렇기에 고뇌에 빠진 안데르센 교수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겨보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안데르센과 공감하면서도 그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안데르센이라는 한 개인을 향한 날카로운 풍자는 결국 사회에 대한 고민과 연결된다. 안데르센 교수는 범죄를 신고하지 않은 방임을 합리화할 온갖 논리를 생각해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온 그의 정돈된 세계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마장에 같이 가자며 집에 찾아온 살인자를 몸이 좋지 않다며 돌려보낸 후 ‘아주 뜨끈하게 목욕이나 하자.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야’ 하고 혼자 생각하는 안데르센 교수의 모습은 일견 섬뜩하기까지 하다. 솔스타는 거장다운 솜씨로 안데르센이 풀지 못하고 미뤄둔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를 능숙하게 독자들에게 건네며 소설을 마친다. 독자들은 [안데르센 교수의 밤]이 던지는 삶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곱씹으며 저마다의 기묘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