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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 경봉 큰스님의 야반 삼경(三更)에 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 경봉 스님 (지은이) | 밀알 | 1982-10-08
  • 밀알1982-10-08
[중고] 경봉 큰스님의 야반 삼경(三更)에 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 경봉 스님 (지은이) | 밀알 | 198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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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경봉(鏡峰) 대선사는 1892년 경남 밀양군 부내면 서부리에서 아버지 김영규(金榮奎) 공(公)과 어머니 안동 권씨(權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속명은 용국(鏞國)이었다. 어려서 서당(書堂)에 나가 7세 때부터 밀양의 한학자였던 강달수(姜達壽) 옹(翁)에게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사서(四書)를 익혔다.

    15세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하고 슬퍼하다가 16세에 출가를 결심하고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와 불문에 의탁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한 후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화상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정석(靖錫)이며 경봉은 후에 받은 호(號)이다. 1912년 4월에는 다시 해담(海曇) 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경전을 공부했다.

    강원을 졸업한 후 하루는 경전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 봐야 자신의 몫은 반 푼 어치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수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내원사(內院寺)에 계시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 갔다.

    혜월 선사에게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방으로 가서 정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서 참선에 몰두했다. 그 후로는 북쪽으로 올라가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경도 석왕사 선원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며 정진했다. 선사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김천 직지사에서 만봉(萬峰) 스님을 만나 선담(禪談)을 나누다 공부에 자신감과 희열을 맛보고 더욱 분발해 통도사 안양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1927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실시한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고도 불철주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다가 나흘째 되던 날 천지가 침몰하면서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를 체험하고 그해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 촛불이 춤을 추는 것을 보는 순간 화두가 타파됐던 것이다.

    스님은 이 때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我是訪吾物物頭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다가
    目前卽見主人樓    눈 앞에서 바로 주인공을 보았네.
    呵呵逢着無疑惑    하하 웃고 서로 만나 의혹이 없어지니
    優鉢花光法界流    우담발화 꽃 빛이 법계에 흐르네

    이후 스님은 제방의 대덕들과 교류하면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한암(漢巖), 용성(龍城), 동산(東山), 효봉(曉峰), 전강(田剛) 선사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교류하면서 선풍진작과 교화에 힘썼다.

    1932년에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에 취임해 승가교육에 헌신하고 후학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에는 통도사 주지에 취임하고 1941년에는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현재의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다 1949년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됐다. 1953년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었고, 이후 동화사와 내원사의 조실을 겸임하면서 납자 제접과 선풍진작에 크게 힘썼다.

    스님은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공부를 지도하며 법을 설하여 수많은 불자들을 감화시키시면서도 본분납자들을 제접할 적엔 추상같은 정법의 일침을 놓았다. 극락암에 주석한 후 ‘삼소굴(三笑窟)’에 거처하며 만년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청렴한 청백가풍을 지키시면서 사부대중을 골고루 제접했다. 때문에 ‘삼소굴’ 문밖에 항상 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1967년에는 서울 탑골공원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웠다. ‘경봉장학회’를 설립해 인재를 키우기 위한 원력을 세웠다. 한시와 묵필에 뛰어난 조예를 가지셨던 스님께서는 선지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67년 동안 일기를 쓴 일지(日誌)를 남겼다. 생애 마지막 일기가 몸이 불편하실 때 쓴 ‘今日自力大便’이라는 여섯 글자였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감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습니다. 화장실을 달리 부르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스님께서 창안한 말이다. 근심을 푸는 곳이란 말로 선미(禪味)가 배어 있다. 만년에는 극락암에서 일요법회를 열러 수많은 청법 대중이 참석하여 그 수가 항상 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또한 통도사의 가람을 수호한 공적을 많이 남겼다.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우셨고, 극락암 조사각(祖師閣)의 탱화를 조성해 모시고 매년 삽삼조사추모재(卅三祖師追慕齋)를 지냈다.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若)를 설립하시는 한편 선방인 정수보각(正受寶閣)의 신축과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을 주관했다.

    스님의 생애에 장엄한 낙조가 드리워 열반에 드신 것은 1982년 7월 17일(음력 5월 27일) 이었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아라”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랍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 시문집(詩文集)인 <원광한화(圓光閑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그리고 스님이 주고 받은 서간문을 모은 <삼소굴 소식(三笑窟 消息)> 등이 있다. 또 스님이 18세부터 85세까지 67년간의 삶을 소상히 기록한 일기를 담은 <삼소굴 일지(三笑窟 日誌)>와 스님의 일대기를 소설화여 쓴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보아라> 라는 책이 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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