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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이 물가상승을, 디플레이션이 물가하락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화폐 가치의 하락이라는 관점에서 인플레이션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개별 재화의 가격 상승 문제 즉, 학교 앞 짜장면이 얼마였었네, 배춧값 때문에 김장을 못하겠네, 하고 말 문제는 아닌 것이다. 화폐 가치의 하락은 곧 실질 소득의 감소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관점으로 노후와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은퇴 후 매달 몇십만 원씩 수령하기 위해 다달이 연금보험에 불입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원금을 빨리 갚는 것이 정말 유리할까. 은행에서는 왜 체증식 상환을 선호하지 않을까. 1980년의 만 원이 지금의 만 원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지금의 만 원이 2040년의 만 원과 다를 거라는 걸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독일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저자 하노 벡이 책 서두에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끼칠 타격을 우습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돈과 함께 시작된 인플레이션의 역사는 2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책은 그 역사를 훑으며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일시적 디플레이션 조짐들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을 빗겨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부동산 불패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국가는 돈을 계속 찍어내며 화폐의 가치를 조작해왔다. 우리는 돈을 찍어내는 '권력'의 인플레이션 게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걸까. 하노 벡은 투자자가 아닌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그 대응책도 함께 내놓는다. 맹목적인 저축과 현금 보유는 노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이 책은 깊이와 재미를 모두 잡은 경제 교양서로, 독일 최우수 경제경영 도서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그의 필력이 느껴진다.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독일인의 구구절절함은 경종을 울리기에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