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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종로의 새벽, 시인 기형도가 떠나고 꼭 30년이 지났다. 우리의 손에 놓인 그의 시 목록은 더이상 갱신될 수 없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읽힘으로써 풍성해진다.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시들과 미발표 시 포함 97편 전편에 시인이 첫 시집의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대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라는 제목을 입혀 '거리의 상상력'을 주제로 목차를 새롭게 구성한 시전집이 출간되었다.
기형도의 시를 생각하면 푸른 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를 스치며 묵묵히 걷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어느 푸른 새벽> 中) 익명의 존재들.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걸음걸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이들의 묵묵한 표정들.
30년간 기형도의 시와 함께 걸어온 이들이 기형도에게 보내는 답신, 젊은시인 88인의 트리뷰트 시집 <어느 푸른 저녁>도 함께 출간되었다. '안양천 건너 소하동 입구에는 망자의 혀로 적힌 글들'(<빈집> 中)이 있음을 기억하는 이. '오늘 저녁이, 나를 투명하게 통과해가는 줄만 알았는데 계절마다, 내 몸에 나뭇잎 하나씩 달아주고 갔다는 것'을 말하는 이. (<오늘 푸른 저녁> 中)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라는 기형도의 문장에 '기적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이. (<형도> 中) '기형도를 먼저 읽은 게 내가 아니어서' (<질투는 나의> 中) 그 애가 싫었음을 고백하는 이. 위계 없이 나아가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기형도를 함께 읽었고, 또 함께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형도라는 세계는 계속 두터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