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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로, 좋아하는 것들로, 다정한 것들로. 이를테면 잘 길들여진 돼지처럼 순하고, 남국의 산록같이 보드라운 것들로." (185쪽)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삶.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 거대한 세계의 질서에 휩쓸리고서도 여전히 꿈을 멈추지 않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 소설가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통해 사랑하는 개인들의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한 후로 8년, 매일 읽고 쓰고 달리는 작가 김연수가 기행을 만났다. 시인 백석.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일명 기행이라고 소개되던 남자. 1930년대의 흥성하고 눈부셨던 백석의 시간을 지나 이제 김연수의 소설이 그리는 순간은 1958년 기행의 시간. 기행은 아프리카의 기린의 목에 (혁명의) 붉은 깃발을 단 동시를 썼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아프리카의 기린이 현실의 삶을 반영하기엔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게 그 이유이다.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55쪽) 자아가 너무 많은 기행은 그들의 문학을 따를 수 없고, 그의 자아는 그 존재만으로 비판의 이유가 된다. (한때 그는 '박시봉'의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 했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고, 꿈꿀 수 없는 곳에서 개인은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 김연수가 물음을 계속한다.
이 소설의 첫 장 첫 문장은 "벨라와 빅토르는 시인이다."로 시작하고, 다음 장 첫 문장은 "기행은 시인이다."로 시작한다. 시인은 어떻게 시인이 되고, 어떻게 시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 시인으로 살기보다 러시아어 번역가로 살기로 한 기행이 러시아 시인 벨라에게 보낸 시작노트가 벨라의 러시아어 시 두 편으로 돌아오면서 기행의 삶은 그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어떤 이야기는 소설이 된다.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던 꿈. 눈 내리는 정주의 풍경을 그리던 시인의 꿈은, 60년 전 그에게서 시작되어 마침내 지금 우리에게, 김연수의 아름다운 문장을 타고 도달한다.